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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 또 다른 설레임이 시작되다.
임자가 있는 사람과의 약속이라도 데이트가 아닌가?
여름이라 잘 하지도 않는 화장을 한다고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섀도도 두 가지 색을 섞어서 바르고 마스카라도 칠하고 볼터치도 간만에 해본다.
무슨 옷을 입을까 어제 저녁 내내 고민하다가 검정색 원피스로 낙찰!
이거 이거 보통 때랑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냐? 이렇게 티내는 거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구!
그래도 간만의 데이트 설렌다, 설레!
헉! 근데 이렇게 준비하고 출근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
오후 늦게 미팅하고 들어오시던 실장님, 청천벼락 같은 말 한마디를 하신다.
“
이런 젠장! 브레인 스토밍 회의가 들어가면 보통 3시간은 꼼짝없이 회의실에 있어야 한다.
그럼 내 ‘맘마미아’는? 물 건너 가는겨? 아침부터 들떴던 마음이 한 순간에 ‘착’하고 가라앉는 순간이다.
이재민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회의 중이란다.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주셨다.
다 피우고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이재민’이라는 이름이 떴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폴더를 열었다.
“경주씨?”
“네, 죄송해요. 힘들게 구하셨을텐데…”
“그러게요. 이렇게 되면 2번이나 커피 사야 하는데…”
“꼭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일때문인데 어쩔 수 없죠. 근데 언제쯤 마쳐요?”
“한 9시쯤 끝날 것 같아요.”
“그럼 마치고 전화줄래요?”
“네?”
“어차피 저녁 시간은 경주씨랑 만날 약속 때문에 다 비워놨으니까… 바람 맞힌 대신 맛있는 거 사줘야 하는 거 알죠?”
“네네. 그럴께요.”
“그럼 나중에 전화주세요.”
“네, 그럼…”
아~ 이렇게 자상할 수가… 완전 흔들린다.
근데 말야… 이 무슨 시츄에이션? 공연은 뭐 내가 전공자라니까 같이 보러 가자 할 수도 있지만 늦은 시간에 만나자는 것은…
혹시 이거 말로만 듣던 불륜? 그럼 내가 멜로 드라마에 나오는 눈물의 불륜녀가 된단 말이야.
안돼! 그럴 순 없어! 이 사실이 밝혀지면 이팀장님의 가족도, 이팀장님도, 저도 모두 불행해진단 말예요.
제발 그 마음을 접어주세요.
“민대리님, 실장님이 들어오시라는데요.”
기둥에 기대있던 나는 지혁의 말에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다.
“근데 대리님, 기둥이랑 왠 퍼포먼스예요?”
“아니… 그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지 말란 말야.”
나는 머쓱해진 기분을 숨기기 위해 지혁에게 버럭 화를 내고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시계를 보니
“그럼, 이번 작업은 이렇게 정리하는 걸로 하고 다음 주엔 다들 야근할 생각하고… 그럼 주말 잘…”
“수고하셨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나는 실장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에서 나와 내 자리로 갔다.
컴퓨터도 끄고 가방도 챙기고 거울도 함 봐주고…
이팀장에게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더니 문자가 와 있다.
디자이너스 클럽 옆 ‘홈스테드 커피’에서 기다린다고.
문자 온 시간이
아니면 그냥…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 발걸음은 이미 그가 기다린다는 장소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홈스테드 커피’에 도착해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숨을 고르며 그가 있는지 확인하니… 없다.
몇 번이나 봤지만 없다. 시계를 봤다.
그 때 울리는 진동 소리. 이재민 팀장이다.
“어디세요?”
“저 홈스테드 커피에 있어요?”
“몇 층요?”
“2층요.”
“아… 내가 내려 갈게요.”
3층에서 내려오는 이재민 팀장. 그를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데이트부터 바람맞히고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거예요?”
“네? 아니… 그게… 제가…”
“하하하… 농담이에요.”
“네.”
“전 와인 한 잔 하고 싶은데 어때요?”
“좋아요.”
“경주씨가 쏘는 거죠?”
“네네… 당연하죠. 제가 이팀장님 금요일을 망쳤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그럼 갈까요?”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커피숍을 나왔다. 아까는 뛰어온다고 몰랐는데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오긴 하나 보네.”
“그러게요. 제법 시원하죠?”
“네”
“참, 어디 아는 와인바 있어요?”
“아니요. 전…”
“그럼 제가 가는 곳으로 가셔도 되겠죠?”
“네”
“좀 걸어도 상관없죠? 일부러 차를 안 가지고 왔어요. 숙녀분한테는 죄송하지만.”
“괜찮습니다.”
둘은 나란히 시네시티 극장 쪽으로 길을 걸었다.
걷는 동안 별 대화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보통 친하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 아무런 말이 없으면 너무 불편해서 상대방이 안 보는 사이에 살짝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선선한 바람에 별이 총총한 밤 하늘, 그리고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
저 손을 잡고 걸어간다면 하루 종일 걸어도 피곤하지 않겠건만… 저 반지가 문제네, 문제야.
와인바 ‘라뮤’의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도산 공원이 오늘따라 신비한 느낌을 준다.
좋은 와인과 좋은 음악, 그리고 좋은 사람… 모든 것이 훌륭하다.
하루 동안 있었던 짜증과 우울함이 싹 가시는 듯 했다.
이상하게도 나와 이팀장은 관심사가 비슷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쉼없이 계속되었다.
처음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인데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맛집, 영화, 만화, 그리고 패션까지…
우리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물며 화제를 이어갔다.
‘내 운명이 이 사람이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유쾌했지만 시끄럽지 않았고 똑똑했지만 잘난 척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팀장님은...”
“아~ 또 그런다. 재민씨. 좋잖아요.”
“아!”
“함 불러봐요. 네?”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와인 몇 잔을 하고 나니 약간 취기가 오르니 이 남자 귀여운 짓도 한다.
“재민씨”
“네, 경주씨”
“하하하하”
나는 그의 대답에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고 내가 당황해하자 그가 말했다.
“웃음 진짜 호탕하다. 경주씨 웃음 그렇게 웃는 구나. 좋아요. 개성있어요.”
나는 그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 주책! 왜 이 순간에…
모두들 내가 여자 같지 않게 호탕하게 웃는다고 했다.
여러 차례 보통 여자들처럼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나를 비롯하여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닭살이라는 말에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는 포기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경주씨 웃음 소리 들으면 안 좋은 일 있어도 즐거울 것 같아요. 나한테 자주 그렇게 웃어줘요.”
아니, 이 무슨 작업성 멘트! 그래도 좋다. 일단 멋진 남자가 나한테 작업이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물론 임자있는 몸이라 좀 걸리지만 말이다.
“실은 오늘이 제 아내의 생일입니다.”
“아니 그럼 이렇게 계실 게 아니라…”
“집에 가도 그 사람은 없어요. 이미 죽은 사람이라…”
“아… 죄송합니다.”
“경주씨가 왜요? 이야기는 제가 꺼냈는데…”
“그래도…”
“경주씨 나 좀 취한 거 같으니까 내가 넋두리해도 이해해줘야 해요. 알았죠?”
“네. 괜찮으니까 맘껏 하세요. 맘껏…”
“아내를 만난 건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어요.
친구 결혼식에 갔는데 신부 친구 중 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여자가 있었어요.
미인은 아니었지만 결혼식에 그렇게 나타나니 눈에 확 띄더라구요.
그냥 좀 독특한 여자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저와 같은 회사를 다니더군요.
그 곳에선 한국인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참 저 미국에서 몇 년간 살았습니다.
그렇게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해서 제가 데이트 신청을 했죠.
전 퇴짜 맞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순순히 좋다는 거예요. 하~ 만나보니 무척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잘 웃고 떠들고 길 가다가도 목청껏 노래하고 춤추고…
그때 전 매우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와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처럼 되어가더군요.
좋은 변화였어요.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죠. 무척 행복했어요...
하지만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어요....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어요. 위험하니 운전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야근을 해야한다며 굳이 차를 가지고 가드라구요.
새벽녘에 전화가 왔어요. 병원이라더군요. 사고가 났다고. 좀 와줘야겠다고…
그녀가 하늘로 가고 나서… 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내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더는 미국에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는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흐느끼지 않았다. 단지 그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체 그와 같이 창 밖만 바라보았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냥 그렇게 두는 게 더 나을 꺼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유쾌해보였는데…
그가 지금껏 결혼 반지를 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아내와의 추억을 잊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여전히 아내의 부재를 알리지 않는 것도 아내를 너무 사랑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지레 짐작했다.
그런 그가 나는 무척이나 안쓰럽고 가여웠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잊어진다고 하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고 마음 저 밑에 숨겨져 있어 가끔 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감쌌다. 그리고 눈물을 닦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이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속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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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읽어주시고 제게 힘이 되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멋지네요^^ 안타깝긴 하지만^^
멋져여~~^^일조심해서 셤셤하세여~~건강생각해서~~^^홧팅이여~~^^
ㅋㅋ 재민이가 불쌍하기도 하지만,, 저는 왜지 진이더,,,ㅎㅎ
처음에 쓰기 시작했을 땐 아무도 안 읽어주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쓰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님들의 응원이 있어서 지금 저는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재밌당~~건필하셔요~^^
감사 또 감사합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