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누이는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다. 누이가 일제시대에 태어난 할머니도 아니고 1957년 2월 생이다.
그래서 내 누이가 문맹이라 하면 믿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이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까막눈이 되었다.
개차반이었던 내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몽땅 털어 먹고 빚만 잔뜩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일찍 혼자가 된 어머니는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면서도 남의 집 품팔이로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만 했다.
내가 지금까지 도박, 게임, 투기, 내기노름 같은 것을 일체 하지 않은 것도 이런 아버지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유산은커녕 노름빚만 남기고 간 아버지로 인해 내 어머니와 큰형은 마치 죄인처럼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해야만 했다.
누이는 일을 다니는 엄니 대신 나를 돌봐야 했다. 유모처럼 나를 키우느라 누이는 아홉 살이 되어서야 국민학교를 입학했다.
그러나 누이는 입학을 하자마자 남의 집 애보기로 갔다고 한다. 엄니 처지에서는 입 하나라도 덜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누이가 애보기로 간 곳은 내 아버지한테 노름빚을 받지 못한 집이었다. 그것도 나와 성이 같은 먼 친척 뻘이다.
강제로 끌고 간 것은 아니지만 빚 대신에 누이를 데려갔다고도 볼 수 있겠다.
누이는 그집에서 아이 넷을 길러주고 16살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니 웬 처녀가 나를 안고 펑펑 울었다.
나는 그때까지 누이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리 막둥이가 이리도 많이 컸네. 내 동생이 이렇게 커 버렸네. 누이가 하도 우는 통에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누이는 이날부터 엄니를 도와 일도 다니고 산에 나무도 하러 다니면서 온갖 일을 했다. 내 누이는 엄니만큼이나 부지런했다.
이때가 내겐 가장 황금기였지 싶다. 불과 3년도 안 되는 기간이지만 나와 누이한테는 제일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어느 날이었을까. 동무들과 놀다가 집에 오니 누이는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누이가 편지 한 통을 내밀더니 읽어달라고 했다. 누이한테 온 편지였는데 누이가 애보기로 있던 마을에 살던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나는 낭낭한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다 읽고 누이를 쳐다보니 얼굴에 온통 눈물 범벅이다.
누이의 눈물은 아궁이 불빛에 반짝이면서 더욱 붉게 보였다. 나는 대뜸 누이한테 말했다.
병신, 울긴 왜 울어? 답장해주면 되잖아.
지금이야 통곡하고 싶을 정도로 후회되는 말이지만 그때 나는 그랬다. 아무리 슬픔을 몰랐던 나이라고는 해도 누이의 슬픔을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이런 나를 누이는 언제나 내 동생 내 동생 하면서 끔찍이도 아꼈다.
이미자 노래를 좋아했던 누이는 명절 때면 열리는 동네 콩클 대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글을 모르는 누이가 유행가 가사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부른 것이 신기하다.
어느 날 엄니와 누이가 심하게 다퉜는데 며칠 후 누이는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 친하게 지내던 동네 누나와 함께였다.
누이는 인천에 있는 형광등 공장을 다녔는데 그만 임신을 했다. 공장 기숙사에서 잠을 자던 중에 침입한 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에도 남자의 요구는 집요했다.
공장에 소문을 내겠다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한 번, 며칠 후에 이런저런 구실로 또 한 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면서 또 한 번 등등, 남자는 순진한 내 누이를 유린했다.
결국 임신에 이르게 된 누이는 결혼식도 없이 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갔다. 내 누이 나이 열아홉 살이던 초겨울이었다.
누이보다 13살이나 많은 키도 작고 못생긴 남자였다. 부모 복이 없으면 남편 복이라도 있을 일이지, 내 누이는 이렇게 처녀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나는 이 못된 남자를 오랜 기간 미워했다.
시거든 떫지나 말랬다고 남자는 생활력이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체면과 권위 내세움에는 완전 일등이었다.
누이는 2년 터울로 아들을 낳아 길렀다. 아이를 키우는 중에도 누이는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미운 남자가 없을 때만 누이 집을 방문했는데 거실 한쪽에는 항상 부업거리가 가득 쌓여 있었다.
누이는 아이들 어느 정도 키운 후부터는 평생 직장을 다녔다. 생활력 강한 누이 덕분에 나중 빌라를 사서 전세살이를 면할 수 있었다.
다행히 조카들은 착하게 잘 자랐고 성인이 되어 독립을 했다. 나는 누이한테 글을 배워볼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누이 말을 들은 매형이 눈을 부라리면서 그러더란다.
이 여편네가 남편 얼굴에 먹칠할 일 있어? 아예 까막눈이라고 이마빡에다 쓰고 다니지 그러냐.
이 남자는 당신 아내의 배움보다 당신 체면이 먼저였던 것이다. 결국 누이는 글 배우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재작년에야 누이는 문해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때는 매형도 체면을 내세우기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함께 한글 배우는 사람들이 죄다 70대 80대들이고 내 누이가 막내였다고 한다. 누이는 더디지만 조금씩 글자를 깨우쳤다.
그러다 이런 배움도 순탄치가 않아 잠시 멈춰야만 했다. 매형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생겼고 둘째 조카한테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누이는 자식들한테 부담주는 것을 질색으로 알면서도 아이들 집에 일이라도 생기면 그건 그냥 못 지나가고 애를 태운다.
한동안 쉬었다가 누이는 작년 겨울에야 문해학교를 수료할 수 있었다. 큰 조카 말로는 TV 자막도 곧잘 읽는다고 했다.
올초 설날에 누이를 만났을 때 나한테 편지 쓸 것을 권유했다. 누이는 요즘 누가 편지를 쓰냐면서 정색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꼭 누이한테 편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에는 행여 부담을 될까 싶어 편지 얘기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어제 누이의 편지를 받았다. 봉투 주소는 매형이 쓴 걸로 보였지만 편지는 누이 글씨가 분명했다. 편지 글은 딱 여섯 줄이 전부였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누이는 몇 달을 망설이며 고민하다가 이제서야 썼을 것이다.
내 동생 보아라.
편지가 늦었구나.
엄니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엄니가 없구나.
동생아 고맙구나.
그럼 이만
나는 편지를 읽으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50년 전에 내가 읽어주는 편지를 들으며 누이가 아궁이 앞에서 흘렸던 눈물이 이랬을까.
고생만 하고 살았던 불쌍한 내 누이, 입으로만 누이를 위하는 척하면서 평생 당신을 까막눈으로 방치한 나를 결코 용서하지 마시라.
편지를 읽으면서 후회와 고마움이 교차했다. 어제는 우느라 못 느꼈는데 오늘 보니 누이 글씨체가 참 얌전하다.
칠순이 되어서야 쓴 누이의 생애 첫 편지가 나는 너무나 자랑스럽다.
가슴 울리는 글 다시보고 갑니다
유현덕님 감사합니다
쪽빛하늘님께서 다녀 가셨군요.
님도 저의 오랜 글팬으로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건강한 날들이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