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nction deleteArticleSomething( ki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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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전후로 쓰여진 역사 서술은
계몽운동 또는 구국운동이라는 이름아래
개항이후 침략을 노골화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고
나아가 근대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당시 역사 서술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군상과 한계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지점이라 하겠다
조금 지루하고 길겠지만 끝까지 살펴보기를 바라면서
대한제국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역사 저술은 다음과 같다
<<朝鮮歷史>>(국한문, 1895, 학부 편찬)
<<朝鮮歷代史略>>(한문, 1895, 학부 편찬) <<朝鮮略史>>(국한문, 1895, 학부 편찬)
<<東國歷代史略>>(한문, 1899, 학부 명의, 金澤榮 서술) <<東國歷史>>(국한문, 1899, 학부 명의, 玄采 서술)
<<東國輯略>>(한문, 1902, 金澤榮 지음) <<歷史輯略>>(한문, 1905, 金澤榮 지음)
<<大東歷史>>(한문, 1905, 崔景煥 지음) <<大東歷史>>(한문, 1905, 鄭喬 지음) <<大東歷史略>>(국한문, 1906, 국민교육회 지음) <<新訂 東國歷史>>(국한문, 1906, 柳瑾, 元泳義 지음) <<東國史略>>(국한문, 1906, 玄采 지음)
이들 저술에는 전근대 방식의 하나였던 '정통론' 논의가 과도할 정도로 많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과도기 이론의 특수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접근하기도 하겠다
이 당시 역사 저술을 '계몽주의사학'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의 경우 역사에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강조하려고 애쓰다 보니
역사 사실을 민족주의적 명분으로 포장하게 되었고
나아가 명분을 중시하다가 논의 방식을 구시대의 정통론에서 찾은 경우라 하겠다
그러면서도 이들 사서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첫째, 비로소 연호를 독립시키고 있다
둘째, 역사저술에서 국한문을 혼용하여 서술했다. 독립의식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다
셋째, 전통사서가 모두 정통론에 따라 단군을 격하시키고 있었으므로 역시 정통론의 방법
으로 단군조선을 개국왕조로 복귀시켜 대중국 독립을 강조하였다
넷째, 단군의 아들 부루의 塗山會議도산회의의 朝夏조하와 같은 전통시대의 인식을 탈피해
가는 모습도 단군조선의 인식에 따라 往會왕회나 參會참회 등으로 변해 갔다
다섯째, 단군 말년의 처리가 점차 北遷夫餘說북천부여설로 변하는데 따라 발해의 위치가 부
상하고 그것이 확산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섯째, 조선 후기 이래의 마한정통설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1897년 국호를 정할 때 '韓'을 취하여 '대한제국'이라 할 정도로
마한정통의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곱째, 단군 후예의 북천설과 마한정통설의 두 갈래 주장이 병립 발전하여
근대사학의 남북조시대설을 예고하는 듯, 대한제국기 전후 사서가
다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겠다
여덟째, <<신정 동국역사>>처럼 가락국에 대한 이해가 부각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4국시대 인식을 생산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으나 일본의 제국
주의 역사학이 상륙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이 대두하여 가락국의 존재가 소멸 또는 소
멸 위기를 맞아 4국 인식이 발생 단계에서 봉쇄 당하였다(뒷날 계봉우계봉우만은 끝
까지 4국시대설을 고집한다).
가락과 가야와 임나의 관계에 대한 견해가 조선 후기 이래 오늘날까지도 일치하지 않
으므로(이병휴. 이문기 1997 <조선후기의 가야사인식> <<우송조동걸정년기념논총 :
한국사학사연구>>1, 나남출판사) 그 때는 더욱 혼란스러운 문제였겠지만, 혼란할수
록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하여 사실 규명을 회피한 경향을 낳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
날 가야지역 발굴 성과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일이다.
아홉째, 3국에 대한 無統무통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문무왕 이후의 신라에 대하여 정통
으로 규정한 내용은 남북조시대설의 정착을 위하여 방해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열째, 1902년부터 일본의 제국주의사학이 당시 사서에 수용되기 시작하여 한국사학은 근대
사학을 성립시키기도 전에 식민사학의 문제를 부담하게 되었고, 이것은 당시 계몽주의
의 한계를 보여주는 성격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이미 한국사학은 일본의 침략적 식민사학에 무릎을 꿇고 만다. 당시 역사학에서 관학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였던 김택영이 남보다 앞서 오염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계몽주의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현재 이해되고 있다. 그것이 개화운동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개화파의 외향성과 물질개화 일변도와는 달리 주체적이요, 대중적이요, 정신적인 근대주의를 표방한 측면을 평가하여 개화운동과는 다른 구국운동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사회진화론도 진화의 주체를 국가로 보았느냐, 민족으로 보았느냐에 따를 다를 수 있다 하겠는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고 미화하더라도 계몽운동의 중추적 위치에 있던 역사서술이 근대사학에 이르지도 못한 채, 식민사학에 무방비로 상태로 침몰해 갔다고 한다면 당시 계몽주의는 파상파상으로 일그러져 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멺망에 앞서 역사 의식과 그것을 선도하던 지식인이 먼저 멸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행히도 일한합병이 있기 직전에 한국 근대사학의 빛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신채호의 <<讀史新論>>(1908)과 황의돈의 <<大東靑史>>(1909~10)였다.
조동걸 1998 <<현대한국사학사>> 나남출판사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