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들레름과 마르틴 들레름 부부가 짓고 그림을 그렸다. 번역은 박정오가 했으며, 동문선에서 발행했다.
난 이책의 물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남들이 잘 쓰지 않는 판형의 독특함과 책의 내용에 적절한 면지의 선택, 그리고 그림과 구절에 어울리는 다소 두꺼운 스노우화이트지의 선택에 대해 탁월한 선택이였다고 말하고 싶다. 디자인도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디자인만!
보통 구절구절에 오는 제목이 어떤 팁처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는데, 난 다 읽고 난 뒤에 상단 귀퉁이에 그 글에 대한 제목이 있음을 발견했다. 읽는 사람에 따라 그런 시스템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신선한 시도였다고 말하고 싶다.
문제는 이 책의 아주 깃털처럼 가벼운 글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스노우 캣’의 혼자놀기를 보는 듯했다. 혼자 주절거리고 끝나는 그런 허망한 글! 뭘 생각해 보란 말인가.
내용을 잠시 소개해 보면
내가 할 차례이다. 아직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이기도 변하기도 원치 않는다. 왜 무언가를 선택하여야만 하는가? 어째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모든 것이 너무도 단순해 보이는데, 나는 여전히 떼어 놓아야 할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는데, 물러선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머지 않아 나 또한 이 세상의 절반에만 속하게 될 것을, 이제 내가 할 차례이다.
이 책에 나오는 ‘망설임’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런 구절들 옆에는 항상 그림이 나오는데, 그림의 효과는 종이질과 판형의 효과 덕에 아주 돋보인다. 하지만, 도대체 읽어서 생각할 꺼리가 있는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느낌을 가진 글. 뭘 말하고 싶은가. 망설임에서 느껴지는 인생의 ‘망설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오는 30가지 제목과 그 글들은 말하고 싶은 것 보다 저자 혼자서 웅얼거리다, ‘그래도 인생의 시간은 가는 거다’ 하고 허망하게 돌아서는 그런 글들이다. 그림 이외는 봐 줄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