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은사 중의 한 분인 서옹스님의 말씀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무서워도 무서워도 상좌만큼 무서운 사람 없다.’ 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는 이가 바로 옆의 상좌다. 그래서 스님도 90여명의 상좌들에게 늘 강조한다. ‘포교하는 이는 무엇보다도 단정하고 성실해야 한다.’
“지혜 사랑 어우러진 청정행이 깨침의 길”
“남은 돕는 것” 은사 한영스님 가르침 실천
형형한 눈빛은 ‘광주의 도인’ 풍모 느껴져
광주 향림사 조실 천운스님 하면 떠오른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스승을 세분이나 모신 것, 오갈 데 없는 고아들과 함께 지내는 스님 그리고 ‘호남불교의 얼굴’이다. 세수 일흔일곱의 스님은 향림사 관할 교구본사인 제22교구 대흥사의 조실을 겸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외부활동이 대폭 줄어들긴 했지만 안거대중 격려, 종립학교 건학이념을 챙기는 일 등에는 아직도 몸을 아끼지 않는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스님은 지역 사찰의 법문이나 복지시설 점검, 종립학교 업무로 쉴 틈이 없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그런 스님 때문에 상좌들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결국 은사를 위해, 은사는 상좌들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치매에 결렸다고 소문을 내고 광주광역시 상무동 치평산 자락의 오랜 주석처 향림사에서 무문관(無門關) 정진과 다름없는 1년을 지냈다.
지난 7월23일 찾은 향림사. 광주불교대학, 향림출판사, 향림유치원, 향림사 신용협동조합 등 광주불교 활성화의 기초가 된 각종 단체들의 현판이 걸린 5층 건물을 지나 허름한 종무소 한쪽에서 스님을 만났다. 부축을 받긴 했지만 ‘광주의 도인’ 다운 체취가 그대로 느껴졌다.
“재작년엔 사방을 잘 다녔어. 법문 요청이니 가야지. 하다 보니 병이 나. 치매 걸렸다고 흘려버리니 안 오더라고.” 스님은 사숙인 영암스님이 법문하다 입적하신 이야기를 꺼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향림사 주지 혜향스님은 그런 은사 때문에 속이 어지간히 탔던지 하소연하듯 한마디 건넸다.
“한 달 중 25일은 법문하러 다니셨어요. 다른데서는 음식을 통 못 드시니 새벽에 싸 간 김밥으로 차에서 끼니를 해결하시니…. 병이 나신 겁니다. 작년 1년 동안 힘들게 계셨습니다.”
무릎에 금이 가 한 때는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예불도 어려울 정도였다. 종무소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홀로 참선, 독경을 많이 했다. 출가 이래 조석예불을 거른 적이 없다는 스님.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참선하고 예불 모시고 좌선, 염불, 다라니까지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공양 후에는 1시간 동안 포행을 하고 나서 줄지어 기다리는 신도들을 만나 일일이 상담을 해주었다.
60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는 이런 수행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첫 번째 은사 박한영스님에 대해 물었다. 순간. 스님의 목소리가 잠기면서 눈가엔 이슬이 맺히는 듯 했다.
“순하고 감정이 없어요. 상대한테 감정이 없고 한번 시켜서 안 되면 당신이 나가요. 기가 막혀요. 그 분의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어요. 내게 참 잘 해주셨어요.”
전북 고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천운스님은 해방이 되었을 때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신학문을 부정하는 할아버지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서울로 도망쳐 진학하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가출을 단행했다. 발길을 재촉했지만 겨우 30리 길. 정읍이었다. 허기에 지쳐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때마침 만난 한 비구니 스님이 권하는 대로 내장사로 갔다. 16살 때 일이다.
설움이 복받쳐 숨 죽여 울다 새벽을 맞이했다. 도량석, 화엄경 약찬게, 청아하면서 절절한 염불소리에 빠져들던 차에 당대의 대강백 박한영스님(1870~1948)을 만났다. 절에서 글을 배우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자연스럽게 한영스님의 시자가 됐다. 공양상 챙기고, 측간에 모시고 다니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조석예불과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스님은 그를 친손자처럼 귀여워했고 그는 스님을 친할아버지 이상으로 따랐다.
“남은 돕는 것이지,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다. 돕고만 살아라.”는 그 때 말씀은 평생 봉사하며 사는 오늘날의 천운스님을 만들었다.
내장사 생활 1년여 무렵 한영스님이 입적해 월정사로 옮기게 됐다. 지암스님(1884-1969)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고창 선운사에서 구족계 계사로 다시 만난 지암스님은 대교과를 마치도록 공부를 이끌어 준 두 번째 스승이 되었다. ‘평생 동안 <금강경>을 독송하라’는 가르침을 받아 20살 때 금강경 전문을 암송했고 지금도 새벽이면 여지없이 금강경을 펴든다. 최근에는 법문총서 첫 권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을 펴내기도 했다.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스님의 혜안이 담긴 것”이라며 <청정행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네 번째 총서에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 반야지혜에 정통한 천운스님의 무소주(無所住)와 청정심(淸淨心)은 언제나 어려움에 처한 중생들을 널리 보살피는 지혜와 큰 사랑으로 주변을 감동시킨다”는 축사를 실었다.
천운스님의 세 번째 스승은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과 종정을 역임한 서옹스님. ‘참사람’ 운동을 펼쳤던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혜명을 받들어 지속적으로 중생제도에 나서라는 전법게(‘咐囑正法法暻上人’)를 받았다. “무서워도 무서워도 상좌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어. ‘내 주변을 다 보고 나중에 내 말할 사람이 옆에 있던 상좌 밖에 더 있겠느냐’는 말씀이지. 상좌 때문에 게을러 질수 없다는 말씀이지.”
이같은 선지식들을 스승으로 모신 덕인가. 천운스님에게는 ‘무서운 상좌’가 90여명 있다. 연락이 닿는 이들만 해도 70여명. 1967년 향림사를 창건하면서 따르는 대중이 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제자를 키워야 한국불교의 미래도 밝아진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상무대 근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도량을 열었다. 어린이.중고생법회를 운영하며 찬불가를 보급했다. 수련회까지 열면서 향림사는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도심포교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불모지에서 불교를 일군 스님은 ‘광주의 도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스님이 한 시도 쉬지 않고 한 것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길거리서 얻어먹고, 타종교시설에서 외국으로 입양되어 가는 아이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절에서 아이들은 키우기 시작됐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스님의 보살핌을 받은 아이들은 150여명. 이 가운데 20여명은 출가해 스님을 뒤를 잇고 있다.
“성철스님이 이 얘기를 누구한테 전해들은 것 같아. 전보를 치셨더라고. 찾아가서 뵈었더니 ‘야 이 녀석아! 네가 중 공장장이냐. 웬 놈의 중을 그렇게 만드느냐?’ 그래. 그래서 내가 ‘중 만들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오갈 데 없으니 밥이라도 먹여야 할게 아니요? 거기서 좋은 놈도 나올 것이요’ 그랬지.”
고아 돌보기에서 인재양성, 도심포교에서 지역사회복지 활성화까지. 성공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간명했다. “성실해야 한다”는 것.
“생활을 성실하게 하면 포교는 저절로 됩니다. 상(喪) 당한 이들을 위해 염을 해 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신도들의 일이면 뭐든지 먼저 쫓아가 해줘야 합니다.” 그 이상 바라는 것도 아쉬운 것도 소중한 것도 없다. “성불(成佛)은 이미 다 되어 있는 것이니 조금 잘못된 것을 고치면 되는 것이지. 고칠 만큼 성실하게 정진하면 되는 것이지. 일도 무한대로 했고.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종무소 안팎에 붙어있던 ‘와불조성’ 문구가 생각났다. 아쉬움을 보완하기 위한 불사는 아닐까? 답을 재촉하는 듯 스님을 쳐다봤다.
“부처님이 태어났고, 정진해서 성불했고, 그 다음 포교해서 성취한 분. 마지막 단계는 뭔가? 와불(臥佛)이지. 그 단계에서 와불(열반상) 조성도 못하면 뭔 포교를 했다고 하겠어요?”
천운스님은…
1932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천운스님은 1946년 정읍 내장사로 출가, 지암스님을 계사로 1947년 평창 월정사에서 사미계를, 1958년 고창 선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선운사에서 다시 지암스님을 만나 사교과 및 대교과를 마치면서 은사로서 연을 맺었다. 이후 순천 송광사 자장선원을 비롯 화순 용암사 선원, 영암 도갑사 선원 등 전국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으며 1990년에는 서옹스님으로부터 전계전법을 받았다.
구례 화엄사와 해남 대흥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비상종회의원, 광주사암연합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1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후 2004년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1983년 향림유치원을 시작으로 향림어린이집 향림사신용협동조합 향림출판사 광주불교대학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등을 설립했으며, 정신지체장애인 및 노인, 아동보호 전문 생활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총무원장 공로패와 포교대상, 법무부장관 표창장과 국민포장 등 종단 내외에서 포교 및 사회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포상 및 감사패 등이 50여건에 이른다.
현재 제22교구본사 대흥사와 광주 향림사 조실로서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이사장, 종립 광주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
광주=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 2449호/ 8월9일자]
조계종 원로의원 천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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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천지가 부처인데 왜 화를 냅니까”
웃는 얼굴.고운말.자리양보.방사시 등
돈없어도 베풀수 있는 보시 얼마든지…
지암스님 친일매도는 너무 안타까워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모든 타인은 지옥’이라며 엄살을 떨었다. ‘상좌 하나가 지옥 하나’라며 문하에 들이는 것을 멀리했던 성철스님(1912~1993)의 일화도 사람간의 온전한 관계 맺기가 얼마나 까다로운 난제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격언은 정치적 용인술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나 살기도 바쁜데 남 신경 쓸 시간 있느냐”는 푸념도 누군가와 거래를 하거나 지시를 주고받거나 수다를 떠는 순간에 나오는 것이기 일쑤다. 일상의 절반은 사람 만나는 일에 쓴다. 타인으로 외롭고 피곤해 하지만 타인으로 즐겁고 부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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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원로의원 천운스님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받는 마음이 포교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김형주 기자 | 지난 16일 광주 향림사에서 만난 조계종 원로의원 천운스님은 불쑥 자신을 키운 스승들 이야기부터 꺼냈다. 박한영스님(1870~1948), 지암스님(1884~1969), 서옹스님(1912~2003). 모두 위대한 ‘타인’들이었다. “70평생 지금껏 부처님을 모시고 절밥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준 평생의 은인들이지.” 은사인 박한영스님은 갓 출가해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더벅머리 소년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노스님은 내장사 아랫마을로 산책다니기를 좋아하셨죠. 시자인 나도 당연히 따라나섰는데 노스님의 행동엔 원칙이 있었습니다. ‘있는 대로 내어준다.’” 당신의 그지없이 넉넉한 성격을 아는 아랫마을 장사꾼들은 매번 스님을 에워싸고 ‘이것 팔아달라’ ‘저것 팔아달다’ 북새통을 이뤘다. “스님은 불편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이들이 내놓는 물건을 덥석덥석 사주며 요구를 다 들어주었습니다. 덕담도 잊지 않으셨죠. 요즘같이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더욱 절실해지는 추억입니다.” 영악한 속인들에겐 스님의 행동이 세상물정 모르는 노인의 어리석음으로 비춰질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목마르지만, 베풀면 또 채워지는’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이 더 크다. “탐욕은 밑 빠진 독과 같아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끝내는 홍수를 이룬 방 안에 빠져죽고 말지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에 뜻을 두지 않습니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은 스님에게 전법게를 부촉한 분이다. ‘부디 부처님과 조사님의 명맥을 지속적으로 융창토록 하여 천운(天雲)과 더불어 무궁토록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라’라는 서옹스님의 격려가 여전히 가슴 속에 살아있다. “지고한 수행력과 튼실한 지계사상으로 참사람 운동을 펼친 스님의 빈 자리를 제대로 메우고 있는 지 늘 죄스럽고 걱정입니다.” 천운스님은 선지식들에 대한 상찬 뒤로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이 스님들이 깨친 불법의 정수를 거저 얻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을 뿐”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앞서간 수행자들에 대한 존경보다 그들을 향한 충직한 믿음이 더욱 돋보였다. 수행자적 ‘의리’랄까. 특히 지암 이종욱 스님을 이야기할 때 그 무게감은 커져만 갔다. 지암스님은 조계종단의 기틀을 마련한 현대 한국불교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불교계 친일인사라는 의혹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암스님은 천운스님에게 화두를 주고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을 통달하게 하는 등 불교의 핵심을 가르쳐준 분. “스님은 일제 치하라는 살벌한 상황에서 겉으로는 친일하는 척 했지만 실은 많은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후세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친일 승려로 매도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상해 임시정부 수송사령관의 중책을 수행한 전력이나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낸 일을 까맣게 모르고 하는 소립니다.” 스승의 관련자료를 수집해 평전을 내기도 했다. 친일의 진실 여부를 떠나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애가 물씬 풍겼다. 스님은 수십명의 버려진 고아들을 거둬 향림사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엄마에게 투정을 부려야 할 나이에 저물녘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질 때가 많다.” 힘닿는 대로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며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는다. 하지만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외로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 짐이라 생각하니 가슴은 늘 무겁다. “절에서 크는 아이들은 정에 굶주려 출가자가 키우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임을 느낍니다. 내게 맡겨진 아이들은 결코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전체가 비정하고 아둔해서 그런 겁니다. ‘모두가 짓고 모두가 받는’ 공동의 죄업입니다.” 수년전만 해도 호남은 포교의 황무지라는 인식이 파다했다.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과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스님. 향림사를 찾는 신도만 해도 30만명을 헤아린다. 호남불교는 천운스님이 다시 부흥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실상부한 포교의 권위자에게 바람직한 불법홍포의 방법을 물었더니 의외로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화를 내지 마라.’ 스님이 모신 스승들의 가르침엔 공통점이 있었다. “우는 아이를 다그치면 더 웁니다. 화를 낸다고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상만사가 ‘무유정법(無有定法)’이기 때문이죠. 삼라만상은 스스로가 주인일 뿐, ‘내 것’ ‘네 것’이라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나를 낮추고 그와 하나가 되어야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스님이 강조하는 양보와 겸양은 정치인들의 단골 수사인 상생과는 사뭇 다르게 들린다. “너에게 어느 정도 줄 테니 최소한의 내 몫은 보장해달라는 꼼수가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마음”이다. “재물이 없이도 베풀 수 있는 보시는 참으로 많습니다. 부드러운 눈으로 대하는 안시(眼施),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대하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좋은 말로 대하는 언사시(言辭施), 바른 예절로 대하는 신시(身施), 착한 마음으로 대하는 심시(心施), 상대방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床座施), 사람을 재워주는 방사시(房舍施). 무재칠시(無財七施)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자기자신의 순수하고 평안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큼 훌륭한 포교는 없습니다.” 화를 내지 않는 비결. 바로 선(禪)이다. “선은 우리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지혜, 덕성, 정서 그리고 자비를 조화롭게 성취시키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죠.” 선은 행복의 ‘쟁취’가 아니라 ‘발견’이다. “부처든 극락이든 우주든 모두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일체만법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의미죠. 내가 부처고 세상천지 부처 아닌 것이 없는데 무슨 손해 볼 일이 있고 역정을 낼 이유가 있겠습니까.” 최근 종단 집행부는 승려 노후복지대책 마련으로 분주하다. 스님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젊어서 제대로 수행했으면 굳이 붙잡지 않아도 제자들이 몰리고 사찰에서 대접해주기 마련입니다.” 헛되게 탕진한 청춘은 반드시 복수를 한다.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혼자서 사는 수행자들에 대한 질책도 이어졌다. “꼭 독신자들이 환속하거나 영 스님답지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머리 깎은 복이 얼마나 큰 줄 모르고 하는 짓들이오.” 삶은 관계의 연속이다. 때로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상을 곤혹스럽게 여길 때도 있다. “물론 증오와 상처도 남에게서 비롯되지만 사랑도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끊임없이 타인과 만나고 어울리지 않으면 자비도 나타날 수 없는 셈이죠.” 독신은 성숙하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고 자비로부터 격리되는 일이다. “관계의 고리를 끊으면 나에 대한 집착과 번뇌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스님이 왜 큰스님인 줄 아시오. 다른 스님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민중을 외면하고 황금가사로 치장한 채 휘황한 법좌에 앉아있을 때, 거지 옷을 입고 거지들과 함께 춤을 추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를 따라 가시오. 원수를 부둥켜안은 그 자리가 바로 법석입니다.” 광주=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 천운스님은
포교대상 2차례…
우리시대의 보살천운스님은 유난히 수상경력이 많다. 조계종 포교원이 수여하는 포교대상을 두 차례(1988년.1997년)나 받았으며 2001년 조계종 사회복지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2년엔 제1회 전국 교정인의 날을 맞아 국민포장을 품수했다.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맡아 키우고 찬불가 보급, 어린이.청소년 수련법회 신설 등 우리 시대의 보살로 살아온 삶을 불교계 내외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 군.경찰을 막론한 전방위적인 중생포교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수행력에서 나온다. 스님은 요즘도 반드시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중들과 함께 6시까지 참선하며 수행자로서의 모범을 보인다. 아침공양 뒤 잠시 경내를 산책하는 스님은 신도들을 제접하고 여러 고민을 상담한다. 이쯤만 해도 피로가 몰려들지만 정작 이제부터가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스님이 대표로 있는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학교법인 정광학원, 광주불교대학 관련서류들이 밀려든다. 눈코뜰 새 없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저녁 8시가 넘는다. 스님이 경전을 펴드는 시간이다. 대기업 총수를 방불케 하는 바쁜 스케줄이지만 스님은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다. 무심(無心)이 비결이다. 1932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천운 상원(天雲尙遠)스님은 1946년 박한영스님을 은사로 정읍 내장사에서 출가했다. 1947년 지암스님을 계사로 월정사에서 사미계를, 1958년 선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제19교구본사 화엄사 주지, 제22교구본사 대흥사 주지, 제4대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교무부장 등을 지냈으며 2001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현재 대흥사 조실, 광주 향림사 조실,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원장, 광주 우산종합복지관 관장을 맡고 있다. [불교신문 2133호/ 5월31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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