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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6~16절/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예수님의 계획
1.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 위에 세워진다.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표적인 나사로 사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4절에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이 사건이 전개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출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누셨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다른 부분들과 같이 동문서답하는 형식의 대화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만나는 신앙의 문제들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계십니까? 나는 자기생각으로 가득차서 자기관점이 변하지 않은 채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기독교신앙이란 근본적으로 바른 지식 위에서만 세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은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7:3).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하신 말씀이 또한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지식이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하나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지만, 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기에 성경을 아는 지식과 별개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는 심각한 상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영양분은 오직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오래된 오해와 오류를 깨뜨리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깨닫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성경 지식이 하나님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봅니다. 이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오해는 머리만 커진다는 생각인데, 그것은 성경의 지식이 하나님 아는 지식이 되도록 하는 기도의 삶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성경을 공부해야 소용없다가 아니라, 말씀이 믿음으로 소화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얼마든지 우리도 넘어질 수 있는 문제들, 특히 예수님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사로 사건의 표적의 핵심으로 접근해 들어가기 위해서 이런 문들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여 성장하며, 그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을 요구합니다.2. 나사로 사건의 본질: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게 하기위한 사건나사로 사건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라고 부연된 것을 4절에서 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그 아들의 영광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영광을 얻으실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라는 말과 함께 ‘영광’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구속 언약의 내용이 성취되는 구속사 최대 최고의 사건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성취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나사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문제는 제자들이 전혀 이런 진리를 배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시는 일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열심과 충성으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도 허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사건이 제자들의 믿음을 위함이라는 말씀으로써 이 사건의 의미를 조금 더 설명하십니다.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믿음이 주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 믿음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바른 앎, 바른 지식에 근거합니다.3. 제자들의 착각과 예수님의 생각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자들이 약 세 가지 정도의 오해와 착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착각: “예수님께서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유대로 가는 모험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먼저 볼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을 지체하시는 동안의 일입니다. 나사로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제자들의 염려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나사로가 아프니 그리로 당장 가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돌로 쳐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8; 요10:39). 아직 유대인들의 분노가 가라앉지도 않았을 텐데, 다시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사로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 한 사람 아프다고 유대로 가시는 모험을 하지는 않으시겠지. 아무리 그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말이야.”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틀이 지난 다음 날 아침에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시니까(7)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8절에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하루를 낮과 밤, 각각 열두 시간씩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아직은 해? 이 세상의 빛이 있는 낮이라는 말씀은 일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이 수차례 말씀하신대로 아버지의 일입니다(요5:19; 6:38,39). 즉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낮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다하기 전에는 밤이 오지 않습니다. 그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8:20). 그러나 밤이 옵니다. 그때가 되면 빛이 없으니까 실족하여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되면 제자들도 다 실족하여 예수님을 떠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나사로 한 사람을 위해서 내가 유대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기에 내가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설마 나사로 한 사람을 위해서 가시겠는가?”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나사로 한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로 답하시는 것입니다. 아직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이 나사로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일의 감추어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한 명이냐? 만 명이냐?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기준입니다.2) 두 번째 착각: “나사로가 회복 중이니까 유대로 가지 않아도 되겠다(12~13).”제자들의 두 번째 착각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셨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 말이 죽었다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런 용법이 매우 드물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렇게 이해한 것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이어서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12절에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니까? “나사로가 이제 회복되겠구나, 잠자고 나면 일어나겠구나!”라고 생각하고(13) 그러면 갈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하는 뉘앙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사로가 아니라는 예수님과 자신들의 안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아마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4). 그런데 문제는 하나는 들었는데 하나는 놓칩니다. 놓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안전의 문제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반응은 전부 안전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 의도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도 자기 자신에게 딱 맞는 것만 듣고 그 다음 것은 흘려보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신앙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무지와 오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지고 바로잡아지는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자들은 착각과 오해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11절에 “나사로가 잠들었다(죽었다)”고 하시고는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더 어려운 문제, 또 한 번의 오해로 제자들을 인도합니다.3) 세 번째 착각: 16절에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님은 무모한 결정을 하셨다(도마).”나사로가 회복 중이 아니라 죽었다면 더욱 위험을 무릅쓰고 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게 제자들의 생각이고 도마를 통해서 드러난 그들의 착각입니다. 도마는 마치 다른 때의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참 무모한 결정을 하셨다”는 판단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예수님도, 우리도 다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다 죽으러 가자”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다른 제자들은 침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께서 비록 무모한 결정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태도지만, 앞에서 말한 우리 다 같이 죽으러 가자라는 말로 인하여 그 말의 힘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 말은 충성이라는 말로 들리지 않고 비난의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바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4. 예수님의 기쁨(15)이런 오해와 착각 속에서 예수님은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이야말로 제자들의 오해와 착각을 향해서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15절을 보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사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자고 하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인지 믿게 하려 함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나사로 사건의 큰 차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차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뻐한다고 표현하신 부분입니다. 지금 주의 사랑하는 자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은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기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Severe mercy)의 본질은 항상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기초한다.” 잔인한 자비라는 말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는 언제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기초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나사로의 죽음까지 아무 일도 안 하시고 고의적으로 지체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들도 이런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이 기쁘다고 말씀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마르다나 마리아의 말처럼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차원 곧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부재하심(absence)으로써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한다고 하심으로써 이 기쁨이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더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임을 밝히십니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의 기쁨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곧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는 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게 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 역시 제자들에게는 아직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5. 제자들의 믿음의 내용을 형성하는 교훈들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라고 하신 이 차원을 생각할 때,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과 우리들의 믿음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장12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것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 사건이 화근이 되어 관원들에게 붙잡혀 죽음에 이르게 되시는, 즉 죽음으로써 생명을 주신 그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지요?
11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굳이 여기 ‘친구’라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제자들은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예수님과 자기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지만, 정녕 친구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두고두고 이 나사로 사건을 생각나게 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 뒤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했을 때,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이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배워야 하는 진리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던 제자들의 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바른 진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의 의향과 의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여기 제자들의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당시의 제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계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예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최상의 신앙은 도마의 말로 대변되는 수준의 신앙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런 신앙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의 열매는 쓴 뿌리일 뿐입니다.6. 지식이 없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는 신앙으로!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지식이 없는 믿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나사로 사건의 핵심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문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위에 여러분의 신앙을 쌓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이 몇 년을 신앙생활을 해오셨든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신앙이,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고 성숙해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을 토대로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1) 결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라: “예수님이 저희를 위해 기뻐하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먼저 결심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결심, 결단, 헌신 다 좋은 것입니다. 이게 없는 게 우리 신앙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도마처럼 하는 결심은 안 됩니다.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도마가 했어야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는데도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을 저희를 위해서 기뻐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신앙은 ‘그냥 무조건 따라가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제대로 따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직한 질문을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셔야 합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계속해서 평행선을 그리는 제자들의 착각과 오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의도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것입니다. 질문이 없으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헌신하지 말고 결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 삶에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2)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8~29).두 번째로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요6:28~29), 일하기 전에, 일을 하려고 생각하기 전에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딤후3:14). 여기서도 자칫 일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일이 전부라고 여기고 일을 일로만 여긴다면 그는 하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곳이 가지는 특성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자원함으로 이루어지는 곳인데, 이런 점에서 교회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와 위치 증명의 근거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자기가 교회에서 하는 일로 증명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충성 봉사의 정신과 함께, 때로는 한가함도 즐길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을 믿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말씀을 잘 배우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잘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3)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의 믿음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마지막 권면은 일을 통해서 배우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배우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의 믿음을 위함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예수님은 아무 개입 없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제자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고 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것임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