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가 가진 힘
1913년. 알프스의 오지를 여행하던 청년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홀로 사는 알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 1858~1947)를 만난다. 가족을 모두 잃어 외톨이인 그는 매일 도토리 100개를 하나씩 땅에 심는다. 그래도 제대로 자라는 것은 열에 하나뿐이라며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10만 개를 심었다. 청년은 몇 년 뒤 다시 그곳을 찾는다. 부피에가 심었던 도토리들은 숲을 이뤘다.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부피에는 여든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무를 심는다. 숲의 혜택을 누리며 사는 마을 사람들은 그 숲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부피에는 세상을 뜰 때까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해 온 일을 생색내지 않았다.
'나무를 심는 사람(The Man Who Planted Trees)'은 나무와 닮았다. 긴 안목으로 끈기 있게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자이다. 내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가 지닌 성정을 나는 하나도 못 갖췄기 때문이다. 나무는 성실하다. 불평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주기만 하면서 결코 자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말이 없다.
최근에 세종시에 갔었다. 지도를 보며 걸었는데도 길치답게 헤맸다. 허둥대며 제시간에 맞췄지만 앞 순서들이 꽤 밀려 있었다. 심판기일에 의견진술을 하고자 간 터였다. 주변에선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렸지만, 자신감 과잉이었을까? 부모님 앞으로 부과된 재산세, 상속세, 심지어 건강보험료까지 계산 착오로 과하게 부과된 걸 내 힘으로 밝혀낸 전적이 있기에 의견진술을 위한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내 머릿속은 점점 곡선 대신 직선으로 가득 찼다.
한 시간 반을 기다리자 내 차례가 왔다. 들어가자마자, 내가 제출한 자료가 충분해서 진술은 필요 없다며, 질문이 없으면 가도 된다고 했다. 예상 못 했다. 여러 달을 준비했기에 그 정성을 알아주십사 두서없이 떠들었다. 5분짜리 코미디를 찍은 셈이다. 전문가들이 오르는 링 위에 깜냥도 모르고 덤빈 걸까? 차라리 영화 만들 때 도움 되게 심판실 정경이라도 눈에 담을걸, 당황한 탓에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직업을 밝히고 잠시 구경 좀 하겠다고 할걸…. 다양한 아쉬움으로 끌탕을 치며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올 때는 몰랐는데, 사방이 녹색이다. 잔디도, 나무도 반짝반짝 초록의 기운을 뿜고 있다. 순간, 내가 우주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내 안의 커다란 덩어리가 공기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푸르른데, 더 소중한 것들이 많은데, 나 여태 뭘 한 걸까? 내 안의 직선들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 장지오노(Jean Giono, 1895-1970)의 ‘나무를 심은 사람(The Man Who Planted Trees)’ 에니메이션
https://youtu.be/X2aYTYmKg0o
글: 장 지오노(Jean Giono, 1895-1970) 원작, 프레데릭 바크(Frederick Valk, 1924-2013)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바크 감독은 5년간 이 영화를 만드느라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나는 몇 달간 서류와 씨름하느라 안과 신세를 졌다.
* 장 지오노(Jean Giono, 1895-1970)는 1895년 프랑스 남부 오트-프로방스의 소도시 마노스크에서 태어났다. 16세 때부터 은행에 들어가 18년 동안 일하었다. 17세 때 1차 세계대전에 5년 동안 참전 하였다. 독학으로 많은 고전을 읽고 습작을 하면서 작가가 되었다.
* 프레데릭 바크(Frederick Valk, 1924-2013)는 원작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The Man Who Planted Trees)>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영화로 만들어 1987년 오스카 단편 애니메이션 최우수 상을 받았다. 또한 안시, 로스앤젤스, 루아양, 히로시마, 바야돌리드, 오타와 영화제에서도 대상을 받은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계의 큰 별이다.
프레데릭 바크는 1924년 자르브뤼켄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 파리,렌느 등에서 살았고, 마튀렝 므외와 함께 렌느의 에콜데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948년부터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살면서 몬트리올의 에콜데보자르에서 강의하다가 1952년 라디오-캐나다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의 교육, 과학, 음악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면서, 수많은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모형, 세트를 만들었다. 1968년 위베르 타송이 부장읕로 있는 라디오-캐나다 애니메이션부에 초빙되어 여기서 환경보존과 관련된 주제로 단편영화 여덟 편을 만들었다. 라디오-캐나다 프랑스어 텔레비젼 방송국이 제작한 그의 영화들은 전세계에서 갈채를 받았고 두 개의 오스카상을 포함하여 60개가 넘는 상을 받았다. 프레데릭 바크와 그의 아내 질렌은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며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연 환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 <책 속 인상깊은 문장>
p13. 마을 사람들은 숯을 구워 먹고살았다. 그런 곳에서는 누구나 살아가기가 힘겹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견디기 힘든 날씨 속에서, 어떤 희망도 없이 서로 부대끼며 이기심만 더해 간다. 오직 그 곳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만 커져 갈 뿐이다.
p20. 그 곳에서 노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고 잇따라 아내마저 잃었다. 그 뒤로 노인은 이 고적한 곳으로 물러나 개와 양을 기르며 한가롭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노인은 나무가 없어서 이 곳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달리 중요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곳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고 노인은 덧붙였다.
p24. 이십대 젊은이의 눈에는 오십대 노인은 앞으로 죽을 일밖에 남지 않은 사람처럼 비친다. 노인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나무를 심어 왔던 것이다.
p25.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기술적 도움도 없이 오직 한 사람의 손과 영혼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만큼 유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p30. 한때 노인은 일 년 동안 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단풍나무는 모두 죽었다. 이듬해에 노인은 단풍나무에서 손을 떼고, 참나무보다 더 잘 자라는 너도밤나무를 다시 심었다. 이 남다른 면모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노인이 철저히 고독하게 지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얼마나 고독했는지 말년에 이르러서는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을 정도였다. 아니 말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일까?
p35. 저 분은 나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스스로 행복해지는 훌륭한 방법을 발견한 거야!
p48. 그러나 위대한 영혼으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일생을 바친 고결한 실천이 없었다면, 이러한 결과를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과 다름없는 일을 훌륭히 해낸 사람, 배운 것 없는 그 늙은 농부에 대한 크나큰 존경심에 사로잡힌다.
✵ ‘장 지오노’에 하루를 열매 따듯이『나무를 심은 사람』
201family | ‘장 지오노’에 하루를 열매 따듯이『나무를 심은 사람』 - Daum 카페
참고자료 및 출처: 동아일보 2023년 05월 17일(수) [이정향의 오후 3시(이정향 영화감독)], Daum·NAVER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