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이 본 53 선지식 30차 40, 정약용 호 다산의 의미
정약용은 호가 다산이라고 칭하는데
정약용에게 다산이라고 했는가
이러한 의문을 접하고 다산에 대한
연구시를 탐구하려고 함이네
정약용 17세때 화순현에 있는 동림사에서
독서를 하였다라고 하는데 맹자를 읽고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에 선발
정약용은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화회를 열고
이벽이 눈속에 촛불을 켜고 서양학문을
토론하였다라고 하는 기록을 보면
정약용도 서양학문에 깊이 간여했다
이벽은 천진암에서 정약전 정약용
권철신 이승훈과 천주교에 대한 학문을
정약용은 21세 때 창동 남대문
정약용은 22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순조의
세자 책봉에 기념하는데 초시에 합격하고
회현방 재산루에 거처를 옮겨살았다
정약용은 23세에 한강 두미협을 지날 때
이벽과 배를 타고 가는데 이벽으로하여금
서양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약용은 천주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지만
천주교에 대한 유학자들과의 차이가 있음을
알고 부터 관심을 멀리하였다고 본다,
정약용은 남인계의 소장학자 이가환
이벽 이승훈 교유 실학의 이익의 유고를
탐독하였던 것으로 알려저 있다.
정약용 24세 정시에 초시에 합격
정조는 나라에 경사가 있는 날이면
시험을 보게하였는데 언제나 정약용은
장원하여 정조로 하여금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정약용이 급제하지 못함을 민망히여겨
문신의 시험에 수석을 5번 수석에 비교된 시험에
8번이나 합격하였다는 것을 정조임금이 알았다,
정약용 29세 한림회권에 선바예문관검열관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정약용에 있어서는 정보르부터 신임을 받았는데
사헌부지평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이익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이다,
정조 15년에 겨울 호남에서 진산사건
최초로 천주교 사건이 발생했다
목만중 이가경홍낙안 등이공모하여
서교에 빠진 자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사건
정약용 31세때에 마현에서 여막을 짓고
겨울에 수원성규제를 지어 기증가도설
정양용 정조임금의 총예를 받았다
정약용 38세 시기에 정치적 위기에 몰렸는데
충청 감사 이태영은이가환 정약용주문모 밀입국을
보고한 한영익부자를 서교에 탐익하였다라고
정약용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는데
마침 정조임금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초전에 별장을 짓고 형제들과 함게 살았다
정약용은 40세 순조 1년 10월에
사간원의 계로 인하여 하옥되었다
사건의 발생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정약용은 47세 순조
8년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약용은 다산 남쪽에 만덕사중심
정약용은 다산을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실지로 다산이란 호를 사용하였지만
차에 대한 시를 창작하지는 않고
다산에서 책을 읽고 저술을 하였네
정약용은 처음에 아암 혜장을 찼아 갔을 때
아암은 한나절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정약용인줄을 몰랐는데 돌아가려고 할 때
그를 다시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루가 멀다하고 시를 나누었다고 한다
탁옹이라고 하는 별칭은 정양용을 말한다
아암 혜장은 정약용에 시를 보내고
정약용은 아암에게 시를 보냈다,
다산 초당에서 차 생활을 하였다는 것은
다산에게 있어서는 차 시에 대한 의미를
강진에 있는 백련사에서 찾아야 한다면
초의는 정약용을 스승처럼 여기고 있으니
다산과 초의는 차에 대한 역사를 바르게
전승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함을 말하면서
승려들에게 있어서 차는 수행이라는 것을
백련사에 거주하는 승려들과의 차연구
시대적 변천에 대하여 탐구하려는 것은
조선 승려들의 수행의 단절을 말함이네
2024년 9월 6일
출처: 불교평화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진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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