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빚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는 대문 없는 집이 많았다. 당연 우리집도 대문이 없었다.
그래서 약속 같은 것도 없이 동무들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마루에 엎드려서 함께 숙제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친한 동무집에서 놀다가 그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온 적이 있다. 나는 집에 가려고 일어섰는데 친구 엄마가 밥을 먹고 가란다.
밥을 먹고 집에 오니 엄니가 엄청 화를 냈다. 빗자루로 엉덩이도 몇 대 맞았다. 엄니의 꾸중은 이랬다.
꽁보리밥을 먹더라도 밥때가 되면 집에 와서 먹을 일이지. 아무리 친구 엄마가 밥을 먹고 가랬다고 덮석 앉아서 먹었느냐고 했다.
엄니는 이렇듯 남의 공밥(공짜 밥) 먹는 것을 질색했다. 엄니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은 후로 나는 친구 집에서 놀다가도 밥때가 되면 얼른 집으로 달려왔다.
엄니는 이런 것도 전부 갚아야 할 빚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노름빚으로 오랜 기간 시달렸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내가 민폐 끼치는 일이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을 갖게 된 것도 이런 엄니의 영향 때문이다.
나는 10대 중반부터 서울 가리봉동에서 공장 생활을 했다. 그러다 열일곱 살이 되면서 야학을 다녔다.
공장 기숙사 형들은 야학을 다니면 금방 빨갱이 물이 든다고 했지만 빨갱이 물은커녕 내 삶의 기초 일부가 그곳에서 형성되었다.
선생님이 대부분 대학생이었는데 참 열심히 가르쳤고 친절했다. 야학을 다니다 그곳 사무실에서 창작과비평을 처음 만났다.
내가 활자로 된 것이라면 무조건 들춰 보는 편이라 그 잡지를 빌려다 읽었다. 어려운 내용은 건너 뛰고 소설 위주로 읽었다.
전부 과월호였지만 무척 흥미로웠다.
야학 사무실에 몇 권 있는 잡지를 다 읽고는 청계천 헌책방까지 가서 창작과비평을 여러 권 구해다 읽었다. 덕분에 나의 세상 보는 눈이 조금씩 넓어졌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창비 잡지를 애독하는데 올해 60주년을 맞이했다. 열악한 출판 환경에서 한 잡지가 60년을 생존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야학에서 창비처럼 만난 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나와 다른 공장에서 일을 했으나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서로 잘 통했고 1년 가까이 야학을 함께 다니며 우정을 쌓았다. 다음해부터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해서 함께 시험을 치르자는 약속도 했다.
내가 야학을 꾸준히 나올 수 있었고 검정고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 친구 영향이 크다.
어느 날 야학 선생님 한 분이 입대를 위해 떠나게 되었는데 야학생들이 송별회를 열었다. 회비를 오천 원씩 각출하기로 했으나 하필 나는 그날 돈이 없었다.
그 친구한테 부탁했더니 기꺼이 오천 원을 빌려줬다. 다음 주에 갚기로 했는데 그가 결석을 했다. 내일이면 오겠지 했으나 일주일 내내 결석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 친구 집을 찾아갔다. 내가 집을 아는 것은 몇 번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집에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말하길 고향집에 일이 생겨 급하게 내려갔다고 했다.
조만간 올라오겠지 했으나 석 달이 지나도록 그는 야학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친구 집을 방문했더니 아예 방을 빼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데 어쩌지였다. 이후 나는 18세와 19세에 연속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중고등 졸업 자격을 얻는다.
내가 2년 만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공장 사장님의 배려가 있었다. 당시 공장 퇴근이 보통 7시였는데 나는 오후 5시면 끝나고 학원을 다닐 수 있게 배려해준 것이다.
나는 종로1가에 있는 금자탑 학원 야간 과정을 2년 동안 다녔다. 내 자랑 같지만 공부를 잘 했기에 학원비는 면제가 되었다.
나는 스무 살이 지나서야 친구를 찾아 나섰다. 그의 고향은 여천군 손죽도라는 곳이었다. 내가 그의 고향을 기억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열일곱 살에 처음 만났을 때 그 친구 집에서 놀다 몇 번 자고 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아낀다며 기숙사에서 지냈으나 친구는 방을 얻어 살았다. 사글세 쪽방일망정 토요일 밤에 내가 찾아가면 그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팝송 가사를 배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등, 늦은밤까지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때 친구의 고향이 손죽도라는 말을 들었다.
밤새 기차를 타고 가서 여수역에 도착했고 여수항으로 갔다. 손죽도는 참 멀었다. 약간 배 멀미도 했을 것이다. 내 생애 처음 가는 섬 여행이었다.
친구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친구는 바다에 나가고 없고 어머니가 마당에서 생선을 말리고 있었다.
친구는 해거름녘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이게 누구야, 이게 누구야를 반복했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눈물 그렁그렁한 채로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3년 사이 친구는 나보다 훨씬 더 커버렸고 어른 티가 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느냐는 친구 물음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빌린 돈 오천 원을 갚으려고,,
친구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에 소주병이 놓였다. 친구가 술을 마실 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얼마전에 배웠다고 했다.
친구가 씩 웃으면서 그랬다. 짜식, 이제 어른 다 됐네. 나는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어도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 술을 배웠다.
친구는 술맛을 아는 듯했다. 술맛을 모르는 나와 술맛을 아는 친구, 청년 둘은 밤 늦도록 그동안의 밀린 회포를 풀었다.
친구는 어부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장남인 형이 있었지만 몸이 약해 어쩔 수 없이 친구가 아버지 일을 물려 받았다.
친구는 1년 정도만 있다가 서울로 오려고 했는데 3년이나 되었다면서 쓸쓸하게 웃었다.
이튿날 떠나려는 나를 친구가 극구 말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내 가방까지 뺏어 못 가게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머물렀다. 친구는 배를 몰아 섬 주변을 돌며 구경을 시켜줬는데 아름다운 섬 풍경에 흠뻑 취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함께 낚시를 하다 보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친구는 내 검정고시 합격을 자기 일인양 아주 기뻐했다.
꼭 대학까지 진학해서 꿈을 이어가라는 격려도 했다. 자기도 조만간 서울로 가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은 동네 지인 두 명까지 불러 넷이서 송별 파티를 했다. 생선회뿐 아니라 듣도보도 못한 생선 요리가 가득했다.
그날 노을에 물든 바다는 온통 붉은빛이었다. 친구네 집 마당에 가득했던 그 노을빛을 어찌 잊으랴.
섬을 떠나는 날 포구에서 친구가 돈을 내밀었다. 나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고 받은 돈을 친구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가방 옆구리 작은 주머니에 2만 원이 들어 있었다. 친구가 몰래 넣어준 모양이다.
며칠 후 나는 박종화 삼국지를 사서 편지와 함께 소포로 부쳤다. 책 무게 때문인지 한꺼번에 보낼 수 없다고 해서 세 묶음으로 나눠 보냈다.
이후 내가 가리봉동을 떠날 때까지 이 친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제대 후에 다시 한번 이 섬을 찾았다. 친구네는 빈집이었다. 가족 전부가 육지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아직까지 이 친구의 얼굴은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성만 기억할 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잊혀진 이름이지만 그때 쌓은 끈끈한 우정 만큼은 마치 갚아야 할 빚처럼 남아 있는 아련한 추억이다.
## 그후
한참 후 내가 근무했던 공장을 찾은 적이 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으나 사장님과 경리 누나는 그대로였다.
나와 친했던 경리 누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중, 나한테 온 편지가 있다고 했다.
그녀는 서랍 이곳저곳을 뒤지면서 편지를 찾았다. 그러나 끝내 편지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온 건지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전남 어디였던 것 같다고 한다.
아! 그럼 손죽도에 사는 그 친구가 보낸 편지가 분명하다. 어쩌면 육지로 이사를 간 후에 쓴 편지일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휴가를 떠났는지 오늘 서울 거리가 많이 한산했다. 다음 주부터는 더 한산할 것이다.
이맘 때쯤의 어느 일요일에 그 친구와 함께 월미도로 놀러 간 적이 있다. 가난한 우리들한테는 휴가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월미도에서 바다를 구경한 후 어느 중국집에서 함께 짜장면을 먹으며 다짐을 했다.
우리 나중에 크면 동해안으로 피서도 가고 해외 관광도 하면서 멋진 휴가를 보내자. 열일곱 소년들의 희망은 그날 먹은 짜장면 만큼이나 맛이 있었다.
내 인생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그 친구는 분명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첫댓글 고운 우정을 간직한 유 현덕님의 글이 가슴깊이 새겨 집니다 .
언젠가 다시 한번 친구를 만나기를 바랍니다 .
추소리님을 오랜만에 뵙네요.
50년 가까이 된 일이지만 마치 작년에 있었던 것처럼 그때의 우정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답니다.
제가 정규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이런 우정에 더욱 목이 말랐었던가 봅니다. 더운 날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가슴시린 추억이군요
가리봉 오거리 70년대 후반
나의 거리였지요
군특례 때문에 몇년간 머물렀던 기억이~~~
잘 찾아보시면 찾을수 있을듯~~~
왓~ 반가운 골드훅님이세요. 말씀처럼 가슴 시리면서 따뜻한 추억이기도 합니다.
골드훅 선배님께서 가리봉동과 인연이 있는 분이란 걸 예전 제 글에 달아주신 댓글로 알고는 있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역 이름도 바뀌고 동네가 많이 변했더군요. 어쩌면 우리도 당시 가리봉 오거리 음악다방 앞에서 살짝 스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좋은 날들 되셨으면 합니다.
역경속에서 핀 우정이라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편지로만 연락하던 시절이라
연락 타이밍도 안맞은 것도,
경리 누나가 잃어버린것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군요
마치, 시청율 올리려는 주말드라마처럼요.ㅎㅎ
끝날때까지는 끝난것이 아니니
검게 그을린 얼굴의
남도 사투리 구수하게 쓰는
손죽도 사나이와 해후하시기를
시청자는 간절히 빌겠습니다
와우~ 엄청 힘이 나게 하는 뱃등님의 댓글입니다. 오늘 이 글 쓰느라 손가락이 좀 바빴는데 뱃등님 댓글이 바로 피로회복제면서 비타민입니다.
추억에 젖어 쓰다 보니 장막극이 되더라구요. 시청율 생각해서 중간중간 가지치기를 좀 해서 단막극이 되었습니다.
뱃등님 말씀처럼 그 친구가 구수한 사투리에다 꾸밈없는 사람이었답니다. 몇 살 위 형처럼 의젓하면서 배려심도 많았었네요.
저도 행여나 이 친구와의 인연이 다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열혈 시청자이면서 공감 백배 댓글을 주신 뱃등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요.ㅎ
감동이 깊어
감히 글 짧은 제가 댓글 하기도 미안스럽네요
참 생각도 깊고
속도 넓고
정이 넘칩니다
비교도 안되지만
어느 회식자리에서
어느분이 식사할때 하루에 한통씩 생마늘을 먹는다 하시길래
시골에서 가져온 생마늘이 있으니 좀 드리겠다 하고
까지 않고 통채로 냉장고에 넣어둔 마늘을 봉지체 그대로 드렸는데
아뿔사 모양은 그대로 인데 속은 다 썩었드라 하시네요
어찌나 민망하고 죄송하던지 다시 약속도 못하고
그렇게 2년이 지난 얼마전에 다시 그분과 식사할 일이 있어서
햇마늘 상품으로 50 통을 챙겨
그때 너무 미안했노라 하니
그걸 기억하냐며 고맙게 받드라구요
저도 이제야 빚갚은 기분으로 편해졌어요
겸손의 말씀입니다. 채원님처럼 아무 가식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그대로의 이런 글이 바로 명품 댓글입니다.
제가 속은 깊지 않아도 정이 깊은 것은 있습니다. 통하는 사람한테는 마음을 온전히 열고 주기 때문이지요.
이 친구와의 우정은 기간이 길진 않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쌓은 정 때문에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모양입니다.
댓글 사연에서 채원님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인 것을 알 수 있겠네요. 받기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신 분이실 테구요.
늦게라도 햇상품으로 갚을 수 있었으니 빚진 마음이 조금 놓였겠습니다. 사람 사는 향내와 신뢰가 느껴지는 채원님의 댓글 고맙습니다.
감동적인 사연이네요.
저도 활자 읽는걸 좋아해
잡지든 소설책이든
닥치는대로 읽을 때가
있었지요.
책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다보니
늘 책을 가까이 하니 아이들도
책을 좋아하네요.
순수했던 우정만큼
빛나던 청춘이였네요.
지금까지 왕래가 있었다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값진 우정을 나누셨겠죠.
조금의 아쉬운 마음이네요.^^
파란여우님께서 활자친숙자라니 무지 반갑습니다. 책을 잘 읽지 않은 시대라는데 여전히 책을 가까이 하신다니 대단한 분이시네요.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지요. 파란여우님 영향 때문에 아이들도 책을 가까이 한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아무리 AI 시대가 된다해도 생각하는 것까지 대신할 수는 없지요. 사고력은 기계보다 독서로 길러야 오래 가는 법입니다.
멋진 댓글로 공감해주신 파란여우님, 고운 밤 되시기 바랍니다.
창비가 지금도 나오는군요.
저는 그 유명하고 수준 높은 문학지의 명성만 익히 알 뿐 읽은 일은 없습니다.
1년 간격으로 중 고등 검정고시에 합격하시고 성적 우수로 학원비도 면제 받으신 현덕님,
그 탁월하신 두뇌가 놀랍기 짝이 없네요.
손죽도의 그 친구분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아마도 육지로 이사 가서 열심히 노력하여 잘 사셨을 거예요.
저도 친구에게 끝내 못 갚은 빚이 있습니다.
언제 한 번 써볼게요.
그 친구를 떠올리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현덕님의 좋은 글을 읽노라면 이 카페 이 삶방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내 소중한 글벗 현덕님 최고! ^^
창비 창간 해가 1966년이라 올해 60주년이라네요. 저는 외국 나가기 전까지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했더랬습니다.
오랜 외국 생활에서 돌아와서도 유일하게 애독하는 잡지이기도 합니다. 저의 사회과학 쪽 사고를 이 잡지와 창비사에서 출판한 책으로 길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공부가 재일 재미가 있네요. 비록 돋보기 힘을 빌리기는 해도 몇 시간씩 독서에 몰입할 수 있는 시력이 받쳐줘서 다행이긴 합니다.
손죽도 친구는 여수로 이사를 갔다고 하는데 이후로 그만 연락이 끊겼습니다. 편지만 찾았어도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찾을 수도 있었겠으나 당시 저도 너무 정신 없이 살던 시대라 그리 되었네요.
저도 달항아리님 같은 통하는 글벗이 있기에 글 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ㅎ
평화로운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현덕님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할
가슴시린 글 잘봤습니다
와중에도 열심히 주경야독해서
오늘날이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돌아보면 제게도 며칠씩 굶고 지냈던 시절
너무나 배고파 찾아갔던 친구집에서
말없이 따스한 밥을 주셨던 어머님몇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이젠 모두 그친구들과 연락도 끊기고
어머님들은 모두 돌아가셨을겁니다
내가 서있는 지금 이자리가 다른 분들의
눈물위에 있다는걸 다시금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산님의 댓글이 바로 한 편의 서사시로 읽힙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다른 분들의 눈물 위에 있다는 대목에서 그만 감동의 눈길이 딱 멈춥니다.
저는 굶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산님은 굶은 경험이 있으시다니 뜻밖입니다. 그래도 따스한 밥을 차려주셨던 분들이 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세상이 험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좋은 분들이 있기에 살만한 세상이라 하나 봅니다.
비록 갚지는 못했다 해도 고마운 마음을 담고 사시니 그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구요. 그산님, 우리 가능한 착하게 오래오래 살기로 해요.ㅎ
제가 유현덕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활자를 좋아한다는 동질감도 있습니다.
요즘도 저는 거의 매일 도서관으로 가 책을 읽고 옵니다.
유현덕님 글 친구 이야기는 내용이 살아 펄떡이며 움직이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
반가운 수피님 잘 지내시지요?
매일 도서관을 다니신다는 말에 그만 제가 더욱 수피님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ㅎ
행여 제 글이 살아 있다고 느껴진다면 양념을 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쓰기 때문일 겁니다.
독서를 좋아하는 수피님, 고운 밤 되세요.
어려웠던 시절의 두 분의 아름다운 심성이 잘 담긴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공장 기름밥을 먹던 시절이었지만 희망을 밝히는 꿈은 바닷빛처럼 파랗게 빛이 났지 싶습니다.
마리님의 짧은 댓글이 임팩트가 있어 참 좋습니다. 더운 날 모쪼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감동적인
추억이네요~~
한편의 명작
영화 평론을 보는 듯 합니다.
소년들의 깊은 아름다운
우정이 이토록 애절할 수 있다는 게
느낍니다.
창비는 유명하지요.
광고 대행사 기획부장을 하다가
1985년도에 광고대행사를 창립하였다가
1년만에 출판업으로 업종을 바꾼 뒤에
단행본, 월간지 무가지 발행, 인터넷 신문 발행하다가
나이가 들고, 출판업이 사양 산업이라 미련을 버렸지만
지금도 수많은 시간들의 추억이 아련 거립니다.
포시즌님 다녀 가셨군요.
창비도 아시고, 더구나 광고대행사와 출판업에 종사하셨단는 말씀에 친근함과 함께 제 귀가 솔깃해집니다. 제 지인 중에도 비슷한 이력을 갖은 분이 있거든요.
오래전 충무로 중부경찰서 부근 작은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인쇄소 사장과 막 언성을 높이며 통화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든 생각이 나보다 더 먹고 살기 힘든 분도 있구나였지요.
그동안 오프에서 멀리서만 포시즌님을 지켜봤는데 다음에는 인사 나누면서 친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언제 술잔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항상 건강하시구요.
@유현덕 출판을 하려면
원고에서 사진 식자 하청,
필름 하청, 인쇄 하청, 제본 하청,
거의 4단계를 거쳐야 책이 완성되니
중간에 어느 한군데 문제만 생겨도 안 되니
의견 충돌이 생길 수 있답니다.
너무도 순수했던 우정들 사회 험한 곳에서 살았어도 그 순수를 간직했던
두 청년의 우정 감동입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알아 본다는 말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도.. 지금처럼 전화나 있었으면 그렇게
안 헤어졌을 텐데 살아 오면서 못되게 살았는지 나와 맞는 사람을
못 만났지요 험한 일을 많이 당해서 부정적인 시야를 가진 저가
누굴 깊게 믿어 본 적이 없어서 겠지요
저는 오래 이어온 만남은 있어도
마음을 다해 얻은 친구는 없어요
현덕님 글 읽으니 제 마음이 좀
씁쓸해집니다 언제나 열심히 살아가시는 현덕님
복 많이 받으세요!
운선님, 저라고 왜 좋은 인연만 있겠는지요. 돈 빌려가서 떼먹은 친구도 있구요. 동업자에서 제 뒤통수를 제대로 친 배신자(?)도 있었답니다.
제가 누굴 탓하고 원망하기보다 내가 부족했거니 하는 편이라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랠 수 있었지 싶네요.
운선님 말씀 대로 전화 같은 것이라도 있었으면 변동되는 일상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편지 외에는 연락수단이 많지 않았습니다.
친구와의 우정이 끊긴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만남도 헤어짐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이라 여긴답니다.
운선님은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으니 너무 쓸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를 삶방에 머물게 하는 운선님의 진심어린 응원 고맙습니다. 평화로운 일요일 되세요.
창비이야기가 나오니 반갑네요.저도 뒷편의 창비소설을 탐독하다 앞편의 시들도 읽는척했지요
시작은 영문학전공 둘째오라비집에서 주워보았다가 나중에는 정기구독을~ 그리고 붓잡으면서 잊혀진 창비~
지란지교하면 여자들 우정인데 지난시대 청년들의 순수한 우정이야기를 보니
참 맑고 담백하네요.
난 언제 그런 빚진 우정이 배로 되어 귀하게 된
값진 우정이 청춘시대에 있었는지~.
조금 손보아서
완전 단편소설로 창비에 내어도 손색없네요
서울와서 자다깨어 좋은 글 읽어 감사합니다
왓~ 늘평화님께서도 창비 구독자이셨나 봅니다. 저도 처음에는 창비가 다소 어려워서 평론이나 시 같은 것은 넘어가고 쉬운 소설 위주로 읽었습니다.
평화님의 줄충한 글솜씨도 영문학 전공이신 둘째오빠와 창비의 영향이 있지 싶네요. 저한테는 창비가 세상 보는 눈을 다양하게 길러준 소중한 잡지였습니다.
마치 창(窓)과 거울 같은 잡지였다고 할까요.
늘평화님 서울에 계시는 모양이군요. 서울은 어제부터 거리가 무지 한산해졌음을 느낍니다. 오늘 이른 아침 집 부근 체육공원을 갔다왔는데 거기에도 사람이 별로 없데요.
조금 느슨해진 서울에서 평화로운 날들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운 댓글 감사합니다.
글을 읽다가 아주 오래전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잊을수 없는 사람 편의 수연스님이 떠오릅니다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인연이야기 ...
님의 글은 언제나 저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날씨가 넘 덥습니다
건강한 날들 되세요.
부족한 제 글에 법정스님까지 나오니 무지 부끄럽습니다. 그 스님의 정갈하면서 울림 있는 글을 어찌 제가 감히 따라 가겠는지요.
저도 법정스님의 도반이었던 수연스님과의 사연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한겨울 눈밭을 뚫고 감기약을 구해오신 도반의 정을 깊이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은세님께서 제 글의 독자인 듯해서 반갑습니다. 님의 댓글 읽고서 글로 나누는 교김이 바로 이런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님도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가슴이 찌릿찌릿합니다..
손죽도의 그을은 어부 친구 모습도 상상이 되고..
하얀 얼굴로
멀미에 시달리다 배에서 내린 현덕아우는
또 뭡니까..ㅎ
영화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 같아요..
늘
등장하는 창작과비평..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수시로 수집하던
쾌쾌한 갈증들..
드라마 한편이 엮어집니다...ㅎ
ㅎ 요석 누이도 오셨군요.
요석님 댓글 읽으며서 오래전 손죽도에서 마주한 그 친구의 인상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훌쩍 커버린 키, 바닷바람에 그을린 까만 얼굴, 순박하게 웃던 모습까지 미완의 우정이지만 아직도 생생합니다.
요석님도 청계천 나들이까지 할 정도였으면 창비의 열혈독자였던 모양입니다.
예전 누이 글을 읽을 때면 세상 보는 눈이 참 넓고 깊구나 생각했었는데 청계천 헌책방 영향도 있었을 테지요.
많이 덥네요. 그래도 조금 헐렁해진 서울이라 이 더위를 견뎌내 보렵니다. 요석 누이도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감동입니다 ㆍ
한 사람 한 사람을 일러
태백산맥 같은
장편소설이 걸어가고
있다더니
마치
창비
유현덕
손죽도에 살고 있었다는 그 친구
마음 속
괄호 안에 들어있는 말들을 풀어
놓은 듯
다시
감동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한테는 윤슬님이 주신 댓글이 더 감동입니다. 때론 제 인생이 마치 누군가 이미 짜놓은 각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 때 친구가 등장해서 저를 눈뜨게 했고 우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퇴장한 게 아닌가 싶네요.
등장 인물에 악인도 있었지만 적기에 나타난 선한 인연들에 의해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윤슬님이 자주 오시니 참 좋네요. 숲에서든 가정에서든 기쁨 충만하고 건강한 날들 되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님에겐 애달픈 추억이지만
읽는 저는 너무나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인연이 닿여서 그친구분 꼭 다시 만났음 좋겠습니다 세상은 넓고 글잘쓰는 사람은 많다입니다
정말 좋은글 잘봤습니다
몸부림님 오셨군요.
부족한 글 좋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지만 이 친구와의 우정이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순박했던 친구에 대한 기억은 오래 간직하고 싶네요.
글 쓴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몸부림님의 댓글이었습니다. 평온한 일요일 밤 되시기 바랍니다.
감동이고
가슴이
아리는 장편소설같은글들
오늘은 시간이나
몆번을 읽었네요
저도 어린시절
친구네가서 놀다
저녁까지 먹고
왔어요
울 엄니는
뭐라 안하셨던걸로
기억이 나네요
쌀밥을 맛있게
먹었던 가슴아린 기억들...
저희 동네는
누에농사를 2모작으로
했기
땜에 부자인
친구들이 많았어요
세월이 흘러
가난했던 이야기 하면서
눈물 그렁그렁하면서
말하면 몰랐었다구..
추억을 곱씹으며
지내지요
부족한 글을 여러 번 있으셨다니 대단한 정성입니다. 엄니가 남의집에서 밥 먹고 온 것을 질색한 것은 행여 내가 그집에 폐를 끼치까봐 그랬을 겁니다.
엄니는 늘 남 아니면 깨 홀랑 벗고 산다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어릴 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고 커서야 깨달았지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엄니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네요. 저는 외모뿐 아니라 엄니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저도 부자 친구가 몇 명 있는데 밥을 얻어먹지는 않았지만 책을 많이 빌려다 읽었습니다. 문선이님 공감댓글 감사합니다.
드라마같은 내용의 글 잘보았습니다 친구분이 이글을보시면 참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복사꽃님께서 좋게 읽어주시니 다행입니다. 휴가철이 되자 아주 오래전 인천 월미도에서 그 친구와 약속했던 추억이 떠올랐답니다.
내 친구는 어디선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답니다. 댓글 주신 복사꽃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