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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史 원문보기 글쓴이: Death-Ripple
비잔틴 제국의 교육(11세기) : 휴머니즘? - The byzantine teaching(11th century) : Humanism ? - 김 차 규 I. 머리말 III. 교사들 II. 콘스탄티노플의 교육기관 IV. 맺음말 I. 머리말 일반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문화에 관한 연구는 미술사와 관련하여 건축, 예술 특히 성상에 관한 것이 주로 연구되어 왔다. 비잔틴사 개론서에서는 문학이나 교육에 관한 내용을 피상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학이나 교육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럽의 르네상스(14-16세기)에 관한 연구는 잘 되어 있다. 또한 카롤링조, 오토조, 12세기의 문화에 대해서도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할 것인지 혹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이 시기를 연구하여 논쟁을 해왔다. 그러나 비잔틴사에 있어 문화에 대한 르네상스 혹은 휴머니즘에 관한 논쟁은 아주 더물게 이루어져 왔다. 아마 이것은 동로마 제국이냐 혹은 비잔틴 제국이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제국의 용어에 관한 문제는 주로 보편적 관념론, 황제의 대관식, 황위계승, 공식칭호, 공식적인 언어가 라틴어에서 희랍어로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1), 문화적인 측면은 제국의 초기부터 로마제국의 요소를 그대로 답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학자들인 Bury, Louis Brehier, Ostrogorsky 등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비잔틴 역사가의 저서에서 르네상스 혹은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비잔틴 제국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로마 문화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이 르네상스 혹은 휴머니즘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를 수용·발전시켰으며 7세기부터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로마 문화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볼 수 없다. 특히 7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헬레니즘적인 민족주의는 라틴세계와는 다른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7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비잔틴 문화는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뿐 아니라 그 이후에 나타나는 발전된 문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르네상스 혹은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르네상스에 대한 용어는 바실리에프(A. A. Vasiliev)가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단지 콤네노스 왕조와 앙겔로스 왕조 즉 12-13세기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 그리고 휴머니즘에 관한 용어는 폴 르메를르(Paul Lemerle)가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9-10세기를 첫 번째 휴머니즘 시대로, 13-15세기를 두 번째 휴머니즘 시대로 보고 있다.3) 그런데 이 두 학자의 견해 속에는 11세기가 빠져있다. 그렇다면 이 11세기는 문예부흥과 전혀 관계는 없는 혹은 문예분야가 갑자기 일시적으로 쇠퇴한 시기인가? 필자에게는 이 점이 궁금점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필자는 이 점을 추적·연구하기로 했다. 여기서 연구의 대상은 7세기 이후의 비잔틴 문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가 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매우 적은 양의 그리스 고문헌을 필사했으며, 6세기 혹은 5세기로부터 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문학에 관한 고문헌은 모두 사라져버렸다.4) 또한 성상파괴의 시대에서 성상숭배의 시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성상숭배의 시대와 관련된 내용들이 파기되거나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세기 이후에 관한 것은 우리들에게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시기들 만을 다룰 수밖에 없다. 또한 지면관계상 9세기 이후라고 하더라도 비잔틴 문화 전체를 모두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비잔틴의 교육 그 중에서도 11세기의 교육을 살펴보려고 한다. 혹자는 문화 중에서 왜 교육부분을 살펴보려고 하는가?에 대해 의아심을 가질 것이다. 물론 지면이 일차적인 이유가 될 것이고, 다음으로 문화 속에서 교육부분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교회, 수도원, 국가의 재정, 사상 등과 밀접하게 연관될 뿐 아니라 비잔틴의 문화는 문학, 시, 철학, 교육, 미술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비잔틴의 문화는 모두 교육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교육은 문화의 근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비잔틴 제국의 11세기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어떠하였을까?를 먼저 살펴보고, 이 시기에 대해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원사료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II. 콘스탄티노플의 교육기관 로마 제국의 교육은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도 단절됨이 없이 계속되었는데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 교육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이교적인 전통의 교육으로서 국가가 담당하고, 또 다른 하나는 종교교육으로서 교회가 담당하였다. 4-15세기까지 콘스탄티노플에는 대학이 존재했는데 이 대학은 헬레니즘적·로마적인 양쪽 전통 모두를 가지고 있었으며 문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신학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주교들이 이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 가운데서 뽑혔다는 것이다. 비잔틴 제국에는 물론 콘스탄티노플 대학외에도 지방학교와 공·사립학교들이 있었다. 종교교육은 총대주교좌 학교가 독점했다. 총대주교좌 학교는 호교론적 기독교 선교을 위한 학교였다. 물론 수도원에도 종교교육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이 종교교육 학교는 초심자를 위한 곳으로 헬레니즘적인 학문을 배제하였다.5) 콘스탄티노플에 있어 공교육은 330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카피톨리움에 대학이 세워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대학의 초기 교수들은 리바니우스(Libanius)와 테오도시우스1세 때 도시장관을 역임했던 테미스티우스(Themistius)처럼 이교도 출신들이 중심이었다.6)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대학을 재조직 확대개편하였는데, 425년 2월 16일 칙령은 31개의 강좌로 구성된 한 강의실의 설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31개의 강좌는 16개의 그리스어 강좌와 15개의 라틴어 강좌 즉 문법(그리스어 10강좌, 라틴어 10강좌), 수사학(그리스어 5강좌, 라틴어 3강좌), 철학(그리스어 1강좌), 법학(라틴어 2강좌)으로 이루어져 있다.7) 동방의 큰 대학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세워진 콘스탄티노플 대학은 교사들의 명성과 교육의 질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 앞서 세워진 대학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당시 지방의 공교육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 아테네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Mouseia Akademia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trivium(3과목 : 문법, 논리, 수사)과 quadrivium(4과목 : 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 철학, 법학, 의학을 가르쳤다. 4세기와 5세기에는 많은 교수들이 이교도이거나 단성론자였다.8) 그리고 베이루트에는 법학교육으로 유명한 대학이 있었다.9) 아테네에는 대학 자체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의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10) 그런데 국가에 의해 이제껏 보여왔던 상대적인 공정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와서 끝이났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단, 사마리아인 그리고 이교도들에 대한 교육을 금지했다.11) 이어 529년 플로클루스의 사망이후 쇠퇴함과 더불어 이교도의 수도원의 역할을 해왔던 아테네의 신플라톤 학교를 폐교시켰다.12) 한편 유스티니아누스의 관심은 법률연구를 재조직하는데 있었다. 529년의 칙령은 아테네에 있어 철학학교를 폐교시킴과 동시에 5세기에 세워진 법률학교도 폐지시켰다.13) 8명의 법학자들(이중 4명은 베이루트의 법학자들)에게 보내진 Omnem이라는 임명 정관(533년 12월 16일)에 따르면 황제는 3개의 법률학교 즉 콘스탄티노플, 베이루트, 로마(아직까지 동고트족에게 속해있었다)법률학교만을 단지 보존시켰다.14) 당시 베이루트의 학교는 콘스탄티노플 학교를 능가했다.15)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의 의도는 이 두 법률의 중심지의 관계를 점차적으로 좁히는데 있었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551년 7월 16일 해일에 의한 지진과 화재로 베이루트와 그 대학이 파괴되었다. 시돈(Sidon)으로 옮겨진 법률학교는 아랍인의 공격이전에 사라졌다.16) 그리고 토틸라(546-554)에 의한 로마 정복은 로마의 학교제도를 파괴시켰다.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가 수복된 후 유스티니아누스의 첫번째 생각은 이곳에 문법학자, 수사학자, 의학자 그리고 법학자들에게 1년분의 양식을 주면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상태는 대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비참했다.17) 결국 여러 가지 강압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법률연구에 있어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공교육은 드물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분명하지도 않았다. 테오필락토스(Theophylactos de Simocatta)의 저서 서문에 따르면 포카스(Phocas)에 의해 혹사된 교육은 헤라클레이오스(Herakleios)에 의해 제국 황실에서 부활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황궁에 망명중인 철학과 역사간의 한 대화에 불과하다.18) 또한 공교육 기관에서 라틴어 교육이 7세기 말까지 파울로스(Paulos de Byzantium)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19) 교황 특사였던 그레고리우스 1세가 특사시절(579-585) 라틴문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수 있는 번역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20) 라틴어 교육을 받는 학생 수는 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학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에 확실히 존재했으며,21) 이 대학은 중단없이 성상파괴주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훗날 성상숭배주의자들의 저서에 따르면 레오 3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교수들로 하여금 그의 독트린을 따르도록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교수들이 가르치던 건물 주위로 불붙기 쉬운 재료들을 쌓아놓고 건물뿐 아니라 교수와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한다.22) 다마스(Damas : 예루살렘 근처의 도시)의 요한과 스테파누스(Stephanus nova)의 전기에도 나타나지 않는 이 무시무시한 범죄의 진위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콘스탄티노스 6세와 이레네의 통치시기와 더불어 혼란, 군사혁명, 박해를 포함하는 성상파괴주의자들의 시대는 교육의 발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요한 그라마티코스(Iohan Grammatikos)에 의해 교육을 받았던 테오필로스 황제 시대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공공교육기관을 세웠다.23) 그리고 830-838년 이 기간동안 테오필로스 황제는 몇몇 제자들에게 개인교습을 하고 있었던 수학자 레오를 발견하고 그를 공공교육의 수장으로 삼았다.24) 테오필로스 황제 사후 테옥티스토스(Thoktistos) 장관은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테살로니카의 대주교가 되었던 수학자 레오를 황궁에서 강의하도록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불러들였다. 이곳에서 레오는 포티오스(훗날에 총대주교가 됨)를 동료교사로 그리고 슬라브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콘스탄티누스를 제자로 두었다.25) 그후 테옥티스토스가 살해당한지 7년이 되던 863년에 와서야 부황제 바르다스(Bardas)는 개혁을 단행하여 콘스탄티노플 대학을 재조직하였다.26) 이러한 재조직은 수학자 레오를 철학교수로 그리고 레오의 제자들인 테오도로스(Theodoros), 테오데기오스(Theodegios) 그리고 코메타스(Kometas)를 기하학, 천문학, 문법교수로 삼았다.27) 이어 바르다스에 의해 재조직된 콘스탄티노플 대학은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네토스(Constantinos VII Porphyrogenetos) 황제까지 지속된다.28) 그리고 포티오스의 제자인 아레타스(Arethas)는 철학을 강의했으며, 아레타스의 제자인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니케타스(Nicetas)는 레오 6세 황제까지 명성을 떨쳤다.29) 레오 6세 황제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법학교육이 재조직되었다. 법학교육은 두 종류의 교수진에 의해 수행되었다. 하나는 미래의 법학자들을 위한 일반교육을 가르치는 교수진, 또 다른 하나는 40개의 제목을 가진 바실레이오스 황제의 일반법(Prochiros Nomos)과 60권의 중요한 책을 가르치는 교수진이 있었다.30) 10세기에 들어오면 백과전서주의가 활기를 띤다. 이 백과전서주의적 교육의 대표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퓌로게네토스다. 그런데 이 백과전서주의는 기독교와 고전적인 전통간의 합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퓌로게네토스 아래서 콘스탄티노플 대학은 실용과학, 4교과(quadrivium : 산술·기하·천문학·음악), 법학 그리고 의학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조직체제는 루이 브레이에(Louis Brehier)에 따르면 요한 치미스케스(Iohan Tzimiskes 969-976)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31) 그러나 루이 브레이에는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퓌로게네토스 때의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조직체제가 요한 치미스케스 시대까지 계속되었다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그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폴 르메를르(Paul Lemerle)는 원사료들은 니케포로스 포카스, 요한 치미스케스, 바실레이오스 2세 (963-1025) 황제들의 통치시기의 교육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원래 교육에 대한 원사료들이 있었는데 이 사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들 황제들이 여러 가지 걱정거리나 과업들 즉 군사적인 문제, 군대나 제국민의 동요, 점령한 영토에 대한 조직 문제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32) 사실 11세기 초반은 군사적인 면에서 영토 정복의 대(大)프로그램이 현실화되고 군사력이 강화되어 국경선은 평화를 되찾고 세계는 비잔티움에 대해 선망의 눈초리를 보냄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시기의 체제를 구성하고 군사력에 따른 빛나는 문화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과 종합 학교제도의 설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로마노스 3세 아르귀로스(Romanos III Argyros 1028-1034)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와 라틴문화가 존속하게 되었고, 미카엘 4세(Michael IV 1034-1041) 시대에 들어와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다.33) 그래서 이 당시 많은 지방 젊은이들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목은 사립학교에서만 가르쳤다. 그럼 여기서 10세기 중엽의 상황에 대한 폴 르메를르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는 이 시기 상황을 크게 3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현학적인 문법학자들에 의한 기초 교육은 제국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는 아마 200명 혹은 300명을 넘지 못하는 학생수를 가진 중등교육기관이 단지 10개 정도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대부분이 관리들 혹은 교회와 관련된 부모들의 자제들이었다. 교육 프로그램은 문법, 시, 수사학이었다 : 언어 교육은 편협된 사회계층의 독특한 표시였다. 이들 학교는 사립기관이며, 교장이며 중요 교사인 단 하나뿐인 마이스트로(maistor)는 학생들의 가족으로부터 학비를 받았다. 교회 즉 총대주교구는 교사 지명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 약간의 보조금을 제공함으로써 약간의 영향력을 끼친다. 국가에 의한 규제 혹은 통제의 시초는 마이스토레스(maistores)의 하나에게 ≪학교장(長)≫의 칭호를 수여하는 것을 통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좌≫에 교수를 임명하는 것은 황제의 승인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둘째, 법률직업을 가지기를 원하는 자는 특히 콘스탄티노플의 공증인 협회의 미래 회원이 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한 준비과정은 협회 회원들에 의해 조직된 직업 학교에서 실시되었다. 에파르코스(eparkhos : 주지사, 주교)의 책은 미래 회원에 대해 매우 상세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셋째, 고등교육은 아주 작은 숫자에게만 해당되었다. 현학적인 내용은 4명에게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은 이어졌으며 바르다스(Bardas)에 의해 설립된 4강좌만을 가진 학교 조직이 보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철학, 수사학, 기하학, 천문학의 교사를 지명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것은 ≪철학≫(바르다스 시대의 철학자 레오처럼)이었다.34) 그럼, 여기서 우리는 폴 르메를르가 정리한 10세기 중엽상황을 상기하면서 11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교육기관에 대해 살펴보자. 11세기에 있어 콘스탄티노플의 학교는 공공학교가 7개, 사립학교가 1개, 공공교육과 사립교육을 동시에 수행한 학교가 1개 있었다. 그외에도 이와 같은 고등교육 기관은 아니지만 수도원에는 초등학교와 같은 초급과정의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35) 폴 르메를르에 따르면 이 숫자는 10세기보다 많다고 한다.36) 그러나 우리들은 이들 학교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자료의 부족에 기인한다. 그럼, 여기서는 고등교육기관만 살펴보겠다. 먼저 사립학교를 살펴보자. 황궁에서 형성된 10세기의 백과 전서주의(백과 전서적 지식)는 행정관료가 되려는 자들에게 가부장들이 그들의 자식들에 대해 꿈꾸어왔던 경력적인 측면에서 요구했던 다양한 문화의 토대와 교섭을 가졌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전통적으로 항상 종교와 관계없는 사립학교에 의해 나타났는데 이들 사립학교들은 10-11세기에 그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37) 이들 학교의 교육은 의심할 여지없이 넓은 사회 계층에게 행해졌다. 그러나 그 수준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었다 ; 일반적으로 알려졌듯이 이 교육은 교회뿐 아니라 국가에 큰 이점을 주었다. 그런데 11세기 사립학교에 대한 사료를 찾아보면 명성이 있는 학교는 요한 마우로푸스(Iohan Mauropous) 학교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학교는 요한 마우로푸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요한 마우로푸스는 1028년경 소아시아의 킬리키아 속주의 크라우디오폴리스(Claudiopolis)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왔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콘스탄티노플에 사립학교를 개설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직업은 힘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밤·낮으로 말하면서 지냈다고 불평하고 있기 때문이다.38) 그의 학생수는 많았으나 그는 학생들에게 보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교육은 구술강의와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의 강의는 약간 자유분방했으며 훌륭한 강의이기는 하였지만 학생들을 위해서는 완벽한 교육이 되지 못했다.39) 그러나 이러한 교육상황은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Constantinos Monomachos 1042-1055) 황제의 시대에 와서 끝을 맺는다.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 황제는 과학과 정치, 행정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는 제국이 군인들이 아닌 문인들에 의해 다스려지기를 원했다. 이에 고등교육이 다시 등장하였다. 1045년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 황제는 칙령을 발표하여 노모필락스(nomophylax : 법의 수호자)직을 만들었다. 이 직책은 법률도서관관장이자 법률학교장의 지위를 의미한다. 또한 이 직책은 상당히 중요한 직책으로 모든 법학자들 위에 군림하는 직책이었다.40) 이어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 황제는 성 게오르고스(St. Georgos) 수도원에 법률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육비는 무료였지만 집안이 부유한 학생들은 교수들에게 선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노모필락스가 주는 학위를 받는데 이 학위증은 국가관료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41) 그럼 두 번째로 공공교육을 살펴보자. 1) 칼코프라테이아 학교(? σχολ? τ?ν Χαλκοπρατε?ων) 소피아 성당 근처에 위치한 이 학교는 미다스(Midas)라는 인물로 인해 잘 알려진 학교다. 프셀로스는 이 학교에 한 이름모를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탐욕적인 인물이며 철학자로서의 품행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혹평하고 있다.42) 크리스토포로스 미틸레나이오스(Christophoros Mitylenaios)의 풍자시 그 중에서도 시기적으로 미카엘 4세(Michael IV : 1034-1041)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풍자시(9, 10, 11편)에서는 이 인물이 미다스이며 그는 탐욕스러운 인물이므로 그의 탐욕적인 손으로부터 모두 도망을 치라고 경고하고 있다.43) 이 풍자시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미다스가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하여 문법교육을 가르쳤는데 '황금가격' 즉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받고 교육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가격은 그 자신에게는 적당한 가격이었을 줄 모르지만 직접 학비를 내는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070년 1월 20일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미사용 복음서 초록(Paris. Suppl. gr 1096, fol. 329)에 칼코프라테이아 학교의 문법학자 페트로스(Petros)의 이름이 적혀있는 점과 크리스토포로스 미틸레나이오스의 풍자시 78과 79편이 페트로스에게 보내어졌던 점으로 볼 때44) 11세기 후반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헤라클레아(Heraclea)의 니케타스(Nicetas)도 이 학교에 있었다.45)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이 학교는 문법을 주로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스포라키오스의 성(聖) 테오도로스 학교(τ? σχολε?ον το? ?γ?ου Θεοδ?ρου τ?ν Σφοραχ?ου) 크리스토포로스 미틸레나이오스의 풍자시 9편과 10편을 보면 이 학교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나온다. 이 시들은 스틸리아노스(Stylianos)와 훌륭한 교육자이며 용모와 덕성에 있어 흠잡을 때 없는 레오(Leo)를 칭송하고 있다. 스틸리아노스는 1030-1050년대 사이에 스포라키오스의 성 테오도로스 학교에 근무했던 것 같다.46) 그리고 레오는 학생들로 하여금 글쓰기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도록 만들었는데 이 경연대회의 우승으로 이 학교는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이탈로스(Italos)의 소송장(1082년)에는 훗날 니케아의 대주교가 되었던 그의 제자 에우스트라티오스(Eustratios)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소송장에 따르면 에우스트라티오스는 경력 초기에 스포라키오스의 성 테오도로스 학교에 근무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47) 3) 40인 순교자 학교 이 학교는 글쓰기 경연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잘 알려졌다. 마우로푸스(Mauropous)의 풍자시는 이 학교의 글쓰기 경연대회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즉 이 학교는 40인의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이 순교자들이 이 학교를 보호하고 있으니 이들에 의해 보호를 받는 학생들이 글쓰기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경쟁을 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48) 1949년 스키로(G. Schiro)가 바티칸 고문서(Vatic. gr. 1587)로부터 제목이 없는 5편의 시를 발췌하여 발간하였다.49) 이 5편의 시 속에는 글쓰기 경연대회의 훈련과 경연대회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교사들 혹은 교수들은 학생들 가운데서 2명을 불러 1조가 되도록 하여 훈련과 경연대회를 했다는 것이다. 4) 디아코니사(Diakonissa : τ? Διακον?σση?) 학교 이 학교는 프셀로스가 총대주교에게 보낸 성 페트로스 학교에 관한 교훈적인 편지에 언급되어 있다.50) 이 학교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으며, 이 학교의 교사들은 총대주교에 의해 선발되었는 것 같은데, 프셀로스의 편지의 내용으로 볼 때 총대주교는 이 학교의 교사들을 성 페트로스 학교의 교사로 지명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디아코니사와 아래에서 언급할 성 페트로스 학교는 총대주교좌의 관할 아래 놓인 학교로 보여진다. 또한 이러한 점은 디아코니사와 성 페트로스 학교가 이전 시대의 ≪보통학교≫와 매우 유사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5) 성(聖) 페트로스 학교 성 페트로스라는 학교의 이름은 이 학교의 교사였던 니케타스(Nicetas)가 사망했을 때 이 니케타스에게 헌정한 프셀로스의 추도사에 등장한다.51) 프셀로스는 이 추도사에서 니케타스가 이 학교에 교사로서 임명되었던 것을 마치 왕이 왕관을 쓰는 것에 비유했는데 니케타스는 이 학교의 문법교사였다. 이 학교는 12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중요한 학교였다.52) 또한 수사학자 무잘론(Mouzalon)이 쓴 총대주교 니콜라스 3세(1084-1111)의 찬사문에도 이 학교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 찬사문에 따르면 니콜라스 총대주교는 사제가 되기 전에 이 학교에서 문법과 수사학, 철학 그리고 성경해석을 배웠으며(11세기 중엽), 그후 그는 이 학교에서 그가 배운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고 한다. 수사학자 무잘론은 니콜라스 3세 총대주교에 의해 1084년 이후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이 니콜라스 3세의 찬사문에 따르면 총대주교는 교사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다.53)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될 사실은 이 학교가 성경해석을 가르쳤고 1116년에 필사된 헤라클레아의 니케타스에 의한 누가복음주석 필사본에 이 학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점으로 볼 때 이 학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다른 학교들과 구분되는 기독교적 성격이 강한 특수 학교였던 것 같다. 6) 오르파노트로페이온(Orphanotropheion) 성(聖) 파울 학교 안나 콤네나는 그녀의 저서 『알렉시아드(Alexiad)』에서 그녀의 아버지 알렉시오스 황제의 투르크에 대항한 소아시아 원정을 기술한 후 그녀의 아버지가 세웠던 혹은 그녀의 아버지가 새롭게 단장한 오르파노트로페이온 성 파울 학교에 대해 길게 서술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알렉시오스 황제는 소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후 포로들과 피난민들 그리고 고아들에게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아들은 교육을 위해 수도원에 보내지거나 혹은 오르파노트로페이온 성 파울 학교에 보내졌다. 이 오르파노트로페이온 성 파울 학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파울 대성당이 있는 그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알렉시오스 황제가 이 학교의 건축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나 콤네나는 이 학교를 ≪도시속의 도시≫로 기술하고 있다. "이 작은 도시의 울타리를 들어서면 왼편에 성 파울 대성당이 있고 오른편에 문법학교(παιδευτ?ριον τ?ν γραμματικ?ν) 즉 오르파노트로페이온 성 파울 학교가 있다. 이 학교에는 교장이 있고 이 교장을 중심으로 아이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한 집단은 문법을 배우고 다른 한 집단은 글쓰기를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드』에서 이 학교의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외국인들(라틴인, 스키티아인, 로마인)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글자를 모르는 헬레네인이 글자를 정확하게 쓰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54) 이와 같은 점은 교육을 위한 알렉시오스 황제의 큰 근심에서 비롯된 것 같으며, 바로 이러한 점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다른 학교들과의 차별된 점이다. 조나라스(Zonaras)에 따르면 이 학교는 문법을 가르쳤으며, 교사들과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다고 한다.55) 이 학교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른 사람으로는 트레비존드(Trebizond)의 대주교인 스테파노스 스킬리체스(Stepannos Skylitzes)가 있다.56) 세 번째로 공공교육과 사립교육을 동시에 수행한 학교를 살펴보자. 이런 학교로는 프셀로스-크시필리노스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 학교에 대한 정보는 아주 간략하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1045년에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os IX Monomachos) 황제가 새로 설립한 제국대학으로 아래에서 언급할 두명의 석학 프셀로스와 크시필리노스를 위해 황제가 궁중에 세운 학교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 황제는 크시필리노스에게는 법률연구의 방향을, 프셀로스에게는 수사학-철학의 연구 방향의 지도를 맡겼다. 이 학교는 사립교육과 국가의 공공업무를 위한 교육이란 측면으로 나누어졌으며 정부의 보조금을 받았다.57) 그리고 크시필리노스에 의한 법률연구의 지도는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 황제에 의해 공포된 칙령에 의해 법률학교의 탄생을 가져왔다.58) 당시 황제는 군대만큼 법률도 중시여겼다. 그러나 황제는 국가개혁 차원에서 법률학교 출신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법률학교를 세웠지 그 교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또한 이 법률학교는 사적인 교육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될 점이 있다. 프셀로스-크시필리노스 학교는 대학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크시필리노스의 법률학교는 대학이라고 부르기에는 기능상 문제가 있다. 즉 크시필리노스의 법률학교는 연구적인 측면은 없고 단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법률 인재만을 배출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었다. III. 교사들 마우로푸스(Mauropous) ― Paulus de Lagarde가 편찬한 Euchaita의 수석대주교인 요하네스 마우로푸스(Iohannes Mauropous)의 저서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저서가 되지 못한 것 같다.59) 그의 생애와 그의 생애의 연대는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다. 여기서는 그의 교육과정과 교사로서의 활동만이 우리들에게 흥미를 주는데 이것들은 텍스트가 없으면 알 수 없을 만큼 베일에 쌓여 있기 때문에 마우로푸스(Mauropous)의 저서와 함께 프셀로스(Psellos)가 그의 친구에게 바쳤던 찬사문은 우리들에게 좋은 사료가 된다.60) 10세기에서 11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에서 태어나서 한명은 클라우디우폴리스(Claudioupolis)의 주교이고 또 다른 한명은 불가리아에 특사로 간 교육을 잘 받은 두 삼촌에 의해 양육된 마우로푸스(Mauropous)는 일찌기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모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날 때 이 집에 대한 헌사를 남겼다. 즉 그는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어떻게 식생활을 하고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 기술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가 자주 만날 수 있었던 학문과 학교 그리고 그가 어떤 교사의 수업을 들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프셀로스는 더 이상의 것을 알고 있었는가? 그의 '찬사(Eloga)'에서 프셀로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γκ?κλιο? παιδε?α, γραμματικ?, με?ζονα μαθ?ματα.61) 마우로푸스(Mauropous)가 학교에서 훌륭한 교육을 가르쳤다고 프셀로스가 말했을 때 이것은 단지 마우로푸스가 독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바실레이오스(Basileios) 2세의 통치시기인 11세기 초기 25년 동안에 콘스탄티노플에는 교사들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프셀로스는 그의 '찬사(Eloga)' 1편에서 마우로푸스가 다방면에 걸쳐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62) 프셀로스는 그의 친구 마우로푸스가 세가지 교육 즉 필수불가결한 보충과목인 수사학, 철학 그리고 이탈리아 과학(법학 혹은 정치학)을 정통했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나찌안쯔(Nazianze)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고대인들 가운데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데마도스(Demados), 이소크라테스(Isocrates)와 니시아스(Lysias) 등의 수사학적 표현의 교사들 가운데 마우로푸스(Mauropous)는 모델로 그레고리우스를 선택했다고 프셀로스는 말한다. 그러나 마우로푸스는 이소크라테스에 더 접근하였다.63) 또한 마우로푸스는 삼단논법, 변론법, 논증법(실증법) 그리고 논리학 등의 분야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이 시를 싫어했듯이 궤변술을 싫어했다. 그리고 마우로푸스는 자연과학, 땅과 하늘, 영감을 타고난 존재, 동·식물에 대해서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64) 그는 자신의 집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술활동에 몰두하였다.65) 니케타스 마이스토르(Nicetas Maistor) ― 리쿠디스(Lichoudis), 크시필리노스(Xiphilinos), 프셀로스(Psellos)를 언급하기에 앞서 우리들은 성(聖) 페트로스 학교의 마이스토르(maistor)인 니케타스(Nicetas)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셀로스의 장례식 축사를 살펴보아야겠다. 이 축사에서 프셀로스는 젊은 나이에 수사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배웠는데 이러한 공부를 위해 그는 교사를 찾았으며, 그후 그 교사의 제자중에 공부에 재능을 보인 학생을 찾아 교분을 가졌다고 한다. 그 학생이 바로 니케타스다. 이 축사에는 어휘에 관한 내용과 프셀로스의 동창생이며 친구이고 동료인 니케타스(Nicetas)가 ≪문법≫ 혹은 ≪철자법≫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점은 흥미롭다. 니케타스에 관한 것은 이처럼 약간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66) 콘스탄티노스 리쿠디스(Constantinos Lichoudis) ―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리쿠디스는 국가에 이어 교회 업무의 장(長)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 관한 것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프셀로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자신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친구인 콘스탄티노스 리쿠디스에 대해 단지 주요경력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다 : 미카엘 5세 아래에서 장관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 아래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승진한 것, 그의 실추, ≪원로원의 통솔자≫로서 참가한 것, 프셀로스와 레오 알로포스(Leo Alopos)와 함께 미카엘 6세에 의해 이삭키오스 콤네노스에게 대사로 파견된 일, 1059년 2월 이삭키오스 콤네노스에 의해 케룰라리오스(Kerullarios)를 계승하여 총대주교가 된 일, 그리고 1063년 8월에 사망한 일 이것을 제외하고는 프셀로스는 단지 콘스탄티노스 리쿠디스가 수사학과 법학 혹은 정치 과학을 공부하고 권위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67). 그러나 프셀로스는 리쿠디스(Lichoudis)에 의해 주어진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결론에 가서 철학에 대해 언급할때 조차도 그 의미를 종교적인 의미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사료에는 리쿠디스가 처음에는 문법을 가르쳤으며, 이어 수사학, 법학을 가르쳤다고 기술되어 있다.68) 크시필리노스(Xiphilinos) ― 1075년 8월에 사망한 요한 크시필리노스 총대주교의 장례식 축사는 프셀로스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 1075년에 가까운 해인 것 같으며 어쨌든 미카엘 7세(1071-1078)가 황제로 있을 때였다.69) 크시필리노스는 프셀로스보다는 몇살 많은 것 같다. 그는 트레비존드(Trebizond)에서 단지 교육 때문에 콘스탄티노플로 왔다. 먼저 법학을 이어서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70) 그후 그는 법학 연구에 있어 콘스탄티노플의 주요한 대표자로 등장하였으며 제국 재판소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가 재판관이 되었던 이유는 제국의 공공업무의 ≪민주화≫를 기도하기 위한 황제의 의도 때문이었다. 그후 서서히 승진을 거듭하여 제국 재판소의 장(長)이 되었다.71) 당시 국가에서 관료로 봉사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크시필리노스에게 교육을 받고자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수도자 같은 태도는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이러한 비난에 대해 크시필리노스는 당연히 화를 내었다.72) 만년에 크시필리노스는 총대주교가 되었는데 이것은 교회적인 측면에서는 무자격 취임이다. 프셀로스(Psellos 1018-1078경) ― 플라톤 철학을 그리스도교 교리와 이상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뒷날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영향을 준 비잔틴 고전 학문을 부흥시켰던 프셀로스는 5살때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8살 때 수학을 배웠고, 이어 중급과정의 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철자법을 1년 배우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시를 공부했다. 16살이 되자 프셀로스는 수사학을 이어 철학, 법학을 공부했다.73) 그 외 그는 역사, 지리, 윤리, 고고학, 신학, 수학, 기하학, 물리, 화학, 자연사, 농업, 의학도 공부했다고 한다.74) 당시 프셀로스는 많은 보수를 요구하는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곧이어 그는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 요한 마우로푸스의 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됨으로써 요한 마우로푸스의 제자가 되었다. 훗날 프셀로스는 파트리키오스(Patrikios)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Constantinos IX Monomachos) 황제에 의해 관료직에 진출하게 된다.75) 그가 관료직에 진출하게 되었던 이유는 제국의 공공업무의 ≪민주화≫를 기도하기 위한 황제의 의도 때문이었다. 훗날 프셀로스는 국무대신이 되었다. 제국 대학이 재조직 되자 당시 고등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학생들은 프셀로스에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 황제도 프셀로스의 강의를 듣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고 한다.76) 제국대학 교수시절 프셀로스는 대학교과과정을 개혁했으며, 새로운 교과과정 속에서 그는 그리스 고전, 특히 플라톤의 사상과 더불어 기독교 계시의 전조라고 해석한 호메로스의 문학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신학·철학·문법·법률·의학·수학·자연과학에 대한 논문과 시를 써서 백과사전적 지식을 과시했다. 이 글들은 모두 힘있고 때로는 적의에 찬 표현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의 수도자 같은 태도는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수도사들이 가르치는 종교적인 학문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프셀로스는 크시필리노스와 똑같은 입장에 놓였으나 그는 크시필리노스와는 달리 웃으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77) 1054년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에 의해 분리되자 프셀로스는 학문생활을 그만두고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후 여황제 테오도라(1055-56)의 부름을 받아 총리직을 맡았고 제자였던 황제 미카엘 7세 두카스(1071-78)의 재위기간에도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그후 미카엘 7세가 내전으로 물러나고 황제 니케포루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1078-81)가 즉위하자 마지막 유배를 떠났다.78) 요한 이탈로스(Iohan Italos) - 프셀로스의 계승자인 요한 이탈로스는 노르만 용병의 아들로서 그의 어머니는 의심할 여지없이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049년경 시실리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왔다. 그의 이전 공부는 요아누(Ioannou)가 암시하듯이 갓 태어난 스콜라철학과 접촉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의 경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안나 콤네나(Anna Comnena)와 그의 소송기록이 '철학자의 consul'로서 임명되기 이전에 교육활동을 하였다고 증명한다는 것이다. Psellos와는 달리 Italos는 문인도 정치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Psellos 이상으로 철학이 독자적인 과학처럼 발전되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아마 신학의 영역으로 떼어둔 전통적인 분야까지 그의 논리적인 귀결을 추구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79) 그러나 요한 이탈로스는 그의 철학과 교회문제에 대해 좀 덜 신중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제재를 받아 소문이 자자한 소송이 있은 후 1082년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게다가 교회, 황제, 제국민 그리고 수도승들은 그의 파문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후부터 절대로 버리지 못했던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때부터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라틴 스콜라 철학을 앞지르면서 벌써부터 얼마만큼의 지적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교회는 처음부터 문화적인 전통 추종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 교회는 누구나처럼 문화적인 전통 추종주의를 받아들였다. 이어 전달 수단을 만들어 갔다.80) IV. 맺음말 고대 말의 공공교육기관은 단절없이 동로마 제국에서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유사한 교육기관이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졌다. 많은 본질적인 특색이 이러한 교육기관의 성격을 규정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교 전통의 세속적인 교육과 국가에 의해 먼저 조직되고 이어 교회에 의해 조직된 종교적인 교육을 분리했다는 점이다. 4세기에서 15세기까지 콘스탄티노플에는 제국 대학이 존재했는데 이 대학은 헬레니즘 전통과 로마 전통(알렉산드리아에 있는 Lagides가의 교육기관과 아테네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교육기관)과 관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문학, 자연과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신학은 가르치지 않았다. 같은 종류의 지방 교육기관은 시(市)당국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사립교육기관도 있었다. 종교교육은 총대주교구 교육기관이 독점하였다. 이 교육기관의 교사들은 성(聖) 소피아의 성직자 소속이었다. 이 종교교육은 2 . 3세기에 로마, 카르타고,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에뎃사 등의 대도시에 세워진 기독교 변증론(호교론)의 교육기관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수도원에 세원진 교육기관들은 초심자들을 위한 학교였다. 어쨌든 제국의 법률에 의해 여러번에 걸쳐 재조직되었던 이러한 교육기관은 때때로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했던 때도 있었지만 어떠한 모양으로든 비잔티움이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았다. 불행하게도 천년동안의 이 공교육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11세기 공교육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필자는 비잔틴 제국의 초기부터 10세기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후에 11세기 콘스탄티노플의 교육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위의 내용을 가지고 11세기 전체가 휴머니즘 시대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실레이오스 2세 시대를 제외한 시대 적어도 11세기 중반부터 말까지 콘스탄티노플의 교육은 비잔틴 초기부터 10세기까지의 교육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발달했다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훌륭한 교사들이 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비잔틴사에 있어서 9-10세기, 12-13세기를 휴머니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11세기 중반부터 말까지의 시대도 휴머니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김차규, 동로마 제국에 있어 로마적 관념론의 존속, 인문과학연구논총(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제16호, 413-435쪽을 참고하라. 2) A. A. Vasiliev,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324-1453), vol. II, pp. 487-505. 3) Paul Lemerle, Le premier humanisme byzantin, Paris, 1971, p. 7. 4) Paul Lemerle, Le premier humanisme byzantin, Paris, 1971, p. 8. 비잔틴의 문학에 관해서는 Louis Brehier, La civilisation byzantine, Paris, 1950 et 1970, pp. 275-354를 참고. 5) Louis Brehier, La civilisation byzantine, Paris, 1950 et 1970, pp. 383-384. 6) Louis Brehier, Notes sur l'Enseignement superieur a Constantinople, Byzantion, 1926, pp. 73-94 ; F. Fuchs, Die hoheren Schulen von Konstantinopel im Mittelalter, Byzantinisches Archiv, VIII, 1926, pp. 1-3. 7) Codex Theodosiani, XIV, ix, 3 (1). 교수직에 응모한 자는 원로원 앞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들은 1년 단위로 봉급을 받았으며 20년을 봉직한 후 일류의 고관(지방장관)이 되었다. 끝으로 이 강의실은 공교육을 독점했다. 사실 교수들 중에는 헬레네(이교도)들이 많았으며, 교육은 7세기까지 두가지 언어로 실시되었다(Codex Theodosiani, VI, xxi, 1). 8) Louis Brehier, La civilisation byzantine, Paris, 1950 et 1970, p. 385. 9) P. Collinet, Histoire de l'Ecole de droit de Beyrouth, 1925, pp. 63 et s., 130-156. 10) Dion Cassius, Pseudo-Codinus, De officialibus palatii, 31. 아테네의 대학은 그 체제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의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철학의 4강좌는 학생수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수사학 강좌는 수강생이 많았다. 이 대학은 카에사레아의 바실레이오스, 나찌안쯔의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동시에 미래에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도 자주 드나들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아들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의 공교육을 개혁시켰는데, 그는 이곳 아테네에 국가의 간섭을 받지않는 신플라톤주의의 세번째 학교를 세우면서 이교도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다. 그의 제자이자 계승자인 프로클루스(Ploclus)는 매일 5과목을 개설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신교의 챔피온으로서 그는 칼데아인의 신탁으로부터 나온 비교(秘敎)를 소개했다. 11) Codex Justiniani, I, v, 18 et xi, 10. 12) Ioan Malalas, Chronographia, XVIII, 451 ; J. B. Bury,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vol. I, 1889, pp. 369-370 ; Ch. Diehl, Justinien et la civilisation byzantine au VIe siecle, 1901, pp. 562-564. 이 당시 가장 강경한 다마스키우스(Damascius)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은 자발적으로 페르시아로 망명하였는데 코스로에스(Chosroes)는 이들을 환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동로마 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왕은 532년에 맺은 유스티니아누스와의 협상에서 이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또한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지 않도록 한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13) Ioan Malalas, Chronographia, XVIII, 451. 14) Corpus iuris civilis Iustiniani, Digesta의 서문. 15) 당시 베이루트의 oecumene 교사들은 그들의 중요성으로 말미맘아 Corpus Iuris 편찬에 참가했다. 16) Agathias, Historia(552-558), PG 88, 1360 et s. ; Michael Syrus, Chronographia, edit. J.-B. Chabot, II, Paris, 1905-1906, p. 247 ; P. Collinet, Histoire de l'Ecole de droit de Beyrouth, 1925, pp. 55-58. 17) Corpus iuris civilis Iustiniani, Codex, aliae constitutiones(칙령 22 : 554년 8월 13일). 18) Theophylactos de Simocatta, Historia(582-602), ed. de Boor, Leipzig, 1887, 20 et s. 19) F. Fuchs, Die hoheren Schulen von Konstantinopel im Mittelalter, Byzantinisches Archiv, VIII, 1926, p. 6. 20) M. Jugie, Le Schisme byzantin, Paris, 1941, p. 41(나르세스에게 보내는 편지). 21) 그 이름은 판딕타토리온(Pandictatorion)이었으며 황제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한 명의 교수를 초청했는데 그는 필로포노스(Philoponos)의 제자인 스테파노스(Stephanos)로서 철학과 quadrivium(4과목 : 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베이루트에서 만들어졌던 에쿠메네(oecumene) 교사라는 칭호를 얻었다.(K. Krumbacher, Geschichte der byzantinischen Literatur, 2e ed., Muchen, 1897. pp. 430 und 621) 22) 이 화재 사건은 「총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생애」와 「Patria」라는 단지 후대의 두 사료에서 발견된다.(「총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생애」는 Georgus Monachus의 Chronica universalis(PG 109) 속에 재편집되어 있으며(IV, 742), 「Patria」는 Banduri의 Imperium Orientale sive antiquitates Constantinopolitanae 속에 편집되어 있다(I, 12). 「총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생애」는 9세기의 1/4시기에 쓰여졌으며, 「Patria」의 한 장(章)은 99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항상 일치하지는 않지만 저수지 근처에 콘스탄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Didaskaleion oekoumenikon이라는 대학이 존재했다고 한다. 게르마노스에 따르면 12명의 교수가, Patria에 따르면 16명의 교수가 한명의 oecumene 교수에 의해 통솔되었다고 한다. 23) Theophanes, Continuatus, PG 109, 69, 84. 24) Theophanes, Continuatus, PG 109, 206 ; Georgus Monachus의 Chronica universalis, PG 109, 868. 25) F. Dvornik, Les legendes de Constantin et de Methode vues de Byzance, Prague, 1933, pp. 352 et s. 26) Ibidem, p. 83. 27) Theodoros Prodromos, Carmen, Vii, PG 109, 200, 208. 28) J. Genesios, Regum Libri, Bonn, 1834, p. 98 ; Theodoros Studiosus, Ep, 21. 29) Vita Euthymii, ed. de Boor, Berlin, 1888, XVI, 1-5 und 56. 30)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IV : The Eastern Roman Empire, 716 (Collinet) ; Schlumberger, Sceau d'un professeur de droit du Xe siecle, dans R. N., 1905, p. 26. 31) Louis Brehier, La civilisation byzantine, Paris, 1950 et 1970, p. 392. 32) Paul Lemerle, Cinq etudes sur le XIe siecle byzantin, Paris, 1977, p. 195. 33) Psellos, Chronographia, I, 29, III, 2. 34) Paul Lemerle, Cinq etudes sur le XIe siecle byzantin, Paris, 1977, p. 196-197. 35) P. Gautier, Le synode des Blachernes, REB, 29, 1971, p. 220. 장 다루제(Jean Darrouzes, Le mouvement des fondations monastiques au XIe siecle, Travaux et Memoires 6(Recherches sur le XIe siecle), Paris, 1976, pp. 160-176)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22개의 수도원이 그리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도 7개, 그리스와 도서지방에도 16개, 소아시아에도 12개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수도원 모두에 초등학교와 같은 초급과정의 학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 도시 주변의 수도원에는 아마 있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잔틴 제국에는 상당수의 초급과정의 학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6) Paul Lemerle, Cinq etudes sur le XIe siecle byzantin, Paris, 1977, p. 242. 그런데 폴 르메를르는 10세기에 학교가 몇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37) Alain Ducellier, L'Eglise byzantine : Entre Pouvoir et Esprit(313-1204), Paris, 1990, p. 198. 38) Michael Attaliates, Historia, II, 8. 39) Louis Brehier, L'Enseignement superieur a Constantinople dans la derniere moitie du XIe siecle, Revue internationale de l'Enseignement Superieur, 1899, pp. 100 et s. 40) Ibidem, p. 105. 41) Ibidem, pp. 110-112. 42)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 429. 43) Die Gedichte des Christophoros Mitylenaios, hgg. von Ed. Kurtz, Leipzig, 1903, n°11 p. 7. Cf. Enrica Follieri, Le poesie di Cristoforo Mitileneo come fonte storica, ZRVI, 8 (Mel. Ostrogorsky II), 1964, pp. 133-148. 44) Die Gedichte des Christophoros Mitylenaios, hgg. von Ed. Kurtz, Leipzig, 1903, n°11 p. 51. 45) 헤라클레아의 니케타스에 대해서는 J. Darrouzes, Revue des Etudes Byzantines, 18, 1960, pp. 179-184를 참조. 46) Follieri, Le poesie di Cristoforo Mitileneo come fonte storica, ZRVI, 8 (Mel. Ostrogorsky II), pp. 144-145. 47) 이탈로스의 소송장에 대해서는 Browning, Byzantion, 32, 1962, p. 173을 보라. 48) Johannis Euchaitorum metropolitae quae in codice vaticano 676 surpersunt Paulus de Lagarde edidit : Abhandl. Gottingen, 28, 1881, p. 37. 49) G. Schiro, La schedografia a Bisanzio nei sec. XI-XII e la scuola dei SS XL Martiri, Bollettino della Badia greca di Grottaferrata, NS 3, 1949, pp. 11-29. 50)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p. 420-421. 51)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 93. 52) Giannelli, Codices Vaticani Graeci. Codices 1485-1683, p. 274 : J. Sickenberger, Die Lukaskatene des Niketas von Herakleia (Gebhard-Harnack, Texte und 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altchristlichen Literatur, NF VII, 4), Leipzig, 1902. 53) Paul Lemerle, Cinq etudes sur le XIe siecle byzantin, Paris, 1977, pp. 232-233. 54) Anna Comnena, Alexiad, Texte etabli et traduit par Bernard Leib, S. J., Paris, 1989, pp. 213-218. 55) J. Zonaras, Annales, M. Pinderi und Th. Buttner-Wobst (I-III, Bonnae 1841, 1844, 1897), vol. III, p. 745. 56) Chrysanthos, ? ?κκλησ?α Τραπεζο?ντο?, Athena, 1936, p. 222-230. 57) Paul Lemerle, Cinq etudes sur le XIe siecle byzantin, Paris, 1977, p. 205 ; Wanda Wolska-Conus, Les Ecoles de Psellos et de Xiphilin sous Constantin IX Monomaque, Travaux et Memoires 6(Recherches sur le XIe siecle), Paris, 1976, p. 227. 58) F Dolger, Regesten der Kaiserurkunden des ostromischen Reiches(Corpus der griechischen Urkunden des Mittelalters und der neueren Zeit, Reihe A, Abt. I), Teil II (1925), n°863 ; Zepos, Jus graecoromanum, I, pp. 618-627 ; A. Sala?, Novella Constitutio saec. XI medii quae est de schola iuris Constantinopoli constituenda et legum custode creando (Textus breves Graeci et Latini, 1), Prague, 1954, p. 6 ; E. Follieri, Sulla Novella promulgata da Costantino IX Monomaco per la restaurazione della facolta giuridica a Costantinopoli (sec. XI med.), Studi in onore di Edoardo Volterra, 2, 1971, pp. 647-664. 59) Johannis Euchaitorum metropolitae quae in codice vaticano 676 surpersunt Paulus de Lagarde edidit : Abhandl. Gottingen, 28, 1881. Iohannes Mauropous의 삶과 저서에 관해서는 Enrica Follieri, Giovanni Mauropode, Otto canoni paracletici a N. S. Gesu Cristo, Roma (Archivio italiano per la storia della pieta, V), 1967을 참고. 60)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p. 142-167 ; R. Anastasi, Michele Psello, Encomio per Giovanni, piissimo metropolita di Euchaita e protosincello, Introduzione, traduzione e note (Pubblicazioni dell'Istituto universitario di magistero di Catani, Serie filosofica, Testi e traduzioni, n. 2), Padova, 1968. 61)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 147. 62)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p. 148-149. 63)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 150. 64)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 151. 65) Kurtz-Drexl II, Lagarde n°47, v. 22-31. 66)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V, p. 87-96. 67) G. Weiss, Ostromische Beamte im Spiegel der Schriften des Michael Psellos (Miscellanea byzantina monacensia 16), Muchen, 1973, p. 79. 68)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 396. 69)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21-462. 70)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29-430. 71)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31-432. 72)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33, 435-444. 73)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29-430, vol. V, p. 12-28. 74) Michael Psellos, Chronographia, Texte etabli et traduit par Emile Renauld, Paris, 1967, introduction, p. 13. 75)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31-432. 76)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33-434. 77) K. Sathas, Μεσαιωνικ? βιβλιοθ?κη, Paris et Venise, 1872-1894, vol. IV, pp. 433, 435-444. 78) Michael Psellos, Chronographia, Texte etabli et traduit par Emile Renauld, Paris, 1967, introduction, pp. 15-16. 79) Robert Browning, Courants intellectuels et organisation scolaire a Byzance au XIe siecle, Travaux et Memoires 6(Recherches sur le XIe siecle), Paris, 1976, p. 220. 80) Alain Ducellier, L'Eglise byzantine : Entre Pouvoir et Esprit(313-1204), Paris, 1990, p. 195. |
이런 -_- 글자가 깨져 나오는군요
첫댓글 이제부터는 비잔티움관련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대략 페이지만10페이지가 넘어가니 대장정이 돼겠군요
오메~ 무서워서 못읽겠음. 스크롤을 걍 쭉 내려버렸어열....^^;;;; 지송...
괜찮아요 저두 안읽었거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