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우.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콜록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막차는 오지 않았다
베리꽃.
대합실 문이 덜컥 열리고
역무원이 무심히 고개를 내밀었다.
"눈 때문에 오늘 막차는 못 옵니다.
첫차 타실 분들은 대합실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툭 던져진 말 뒤로
대합실 안에는 낮은 한숨이 번지고
사람들은 말없이
낡은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댄다.
역무원은 톱밥 한 바가지를 난로에 털어 넣고
눈 내리는 플랫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뛰어오느라 더워졌던 몸의 열기도 식어 가고
말도 눈빛도 끊긴 지 오래.
톱밥난로만
타닥타닥 붉은 불씨를 살려 낸다.
창문 너머 선로는 점점 더 두터워지고
전신주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오지 않는 열차를 대신해 운다.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졸고 있는 노인,
아기 등을 감싸 안은 여자,
주머니 속 편지를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다
끝내 꺼내지 못하는 사내.
이 밤은
집에 못 가는 밤이 아니라
저마다 못다 한 말을 안고 머무는 밤인지도 모른다.
간이역이 하얗게 파묻혀 가는 밤,
창밖은 점점 더 희어지고
사람들은 그저 아침을 기다린다.
카페 게시글
삶의 이야기
이 더위에 대합실 톱밥 난로 켜놓고 갑니다.
베리꽃
추천 1
조회 329
26.07.27 11:51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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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이역의
애튿한 사연들이
애간장을 녹입니다~~
삼복더위에 이열치열 제목 하나 붙여봤습니다.
시원하시지요?
겨울이 그리워집니다
십 년만 젊었다면 다시 오는 겨울엔 멋진 사내 하나 잡아 러브 란걸 해보고 싶은 ...베리님 표 글입니다 아~~ 겨울의 정취여 ~~
저 글은 곽재우님 시 흉내.
사실은 오손도손 분위기로 가보고 싶었어요.
밖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막차는 끊기고
톱밥 난로에 둘러앉은 사람들.
내일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속에 깊어가는 밤.
낯선 사람들과 정겨운 삶의 이야기.
그리던 풍경인데요.
열차를 기다리는 군상들의모습이
애절합니다.
완전서민들의모습이지요?ㅎ
저 때가 아득한 옛날 같아도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지요.
참고로 제 전 직업 역무원.ㅎ
재직시절이 그립네요.
@베리꽃 역무원?
베리꽃님의 문학의 원천이된것같아요.ㅎ
내가 좋아하는 시(詩)중의 하나이며 가끔씩
암송하기도 한다오. (^_^)
제 글은 어때요?
겨울 정취와 간이역 대합실의 낭만이 느껴지나요?
@베리꽃
물론 베리낭자의 글도 좋지요.
삼복 더위에 서늘한 겨울 이야기 참 좋습니다 ^^
어렴풋한 시절 한두번 보았을 법한 대합실 풍경......
저마다의 사연들 .....
문득 사평역을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언제 그리로 지나실 일 있으시면 사진찍어 올려주세요.
서울시내 에
사평역 실재하는거 아시나요 ?
첫차는 어떨지 모르되,
막차 는 언젠가는 옵니다.
눈 때문에 못 오면 그건 막차가 아니겠지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좀처럼이 아니라
막차가 끊어졌어요.
한번쯤 저런 환경에 놓이고 싶은데
세상이 이젠 너무 달라졌지요.
한때 저 시가 좋아서
여러번 읽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동네 카페 나왔더니 추운데서
꽃님의 시를 읽어요
톱밥난로는 재가 많았던 기억
향이 좋았을텐데
기억은 못합니다
톱밥난로 향이 코를 간지럽히네요.
장작난로의 추억이 대부분이겠지요.
강마을님과 사평역 비스무리한 역에서 막차 한 번 끊겨보고 싶네요.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데, 거기다 베리꽃님의 2차 창작까지 더하니 더욱 좋습니다.
삼복 더위에 겨울의 기차역으로 데려다 주시니 땡큐입니다. ^^
이 밤은 집에 못 가는 밤이 아니라 저마다 못다 한 말을 안고 머무는 밤,
마음에 와 닿는 아름다운 표현에 공감하고 갑니다.
눈내리는 사평역의 대합실 풍경.
경험해 보지 않았는데도 가슴 아리게 그립네요.
어제는 그산님의 '바닷가 버스 정류장'이 가슴을 훑더니요.
그래서 삶방이 좋아요.
달항아리님의 사랑의 빚도 자꾸 떠오르구요.
겨울이야기 ..
더운여름에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요..
폭설내린 사평역.
이만하면 여름 선물 충분하지요?
키즈카페안
빵빵 에어컨에 할미는 으스스
톱밥난로의 따스함이 그립네요
담부터는 톱밥 난로대신
가디건을 챙겨야
혼자인 이시간이 따스해질것 같아요
옛역무원 시절 수많은 에피소드의 추억도 가득이지요
그런것들도 하나씩 풀어보셔요
키즈까페로 피서가셨군요.
톱밥난로가 그립겠어요.
저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요.
폭설로 밤차들이 연착하고 난리도 아니었던 그 때가
떠오르네요.
한겨울 대합실이라
기차는 오지 못하고 추위에 떨며 톱밥난로 앞에 모여 군불째는 아득한 예날의 모습들
좋아요
그 대합실에 지존님 계셨으면 재밌었을텐데요.
이젠 저런 역사도 없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