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슬픔과 치맥을
- 김왕노
슬픔의 계절인지 석간신문의 기사도 슬프다.
이슬같이 어딘가에 맺혔다가 톡톡 떨어지는 자욱한 슬픔의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슬픔이 마땅한가란 질문을 던지며, 갈대숲으로 잦아드는
찌르레기 떼의 울음이 슬프다.
약시로 오래 바라보던 늙은 소설가의 문장은 멜랑꼬리로 도배되었다. 맬랑꼬리
와 슬픔은 작가의 감정이기 보다, 우리 모두의 감정이 된 지 오래다. 세상 모든 사
람은 슬픔이란 개명을 했는지, 모두 슬프고 모인 사람은 슬픔의 군상이다.
그대 오라, 건장한 슬픔이 되어
물맷돌을 날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리듯이 슬픔을 넘어뜨리는 것이
반딧불이나 담뱃불이라도 좋건만
지금은 맥주집 밖에 내놓은 탁자에 앉아 치맥을
슬픔이란 삶의 부산물 같고, 뻑뻑한 일상의 윤활유 같고, 때로는 얼어붙으려는 사
랑과 그리움에 넣는 부동액이지만 끝내 슬프다는 것은, 삶의 어느 한 부분이 슬픔에
젖었다는 것, 기쁨과 슬픔이 양면을 이뤄, 시간의 바퀴를 굴려간다지만, 슬픔이 문장
의 바탕이고, 창작의 성분이 결국 슬픔일 수밖에 없는
어떤 방식으로든 물리적 행사로든 슬픔의 점유율은 낮아져야 한다. 환골탈태 하듯
벗어나야 할, 벗어야 할 슬픔, 성장을 위해 뱀허물 같이 벗어야 할 슬픔인 것, 이 모든
것을 슬픔의 오로라, 슬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슬픔 한 철에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이라 말한다.
슬픔과 어울리는 것은 치맥이다. 치킨이란 맥주와 슬픔과 조합을 잘 이루는 것, 정반
합과 같이 치킨을 먹고, 맥주잔을 채우다가 보면, 합에 이른 듯 다시 슬픔이라 거푸 잔
을 비우고 치킨을 뜯는 슬픔의 시간이라는 것, 슬픔의 지구라는 것, 슬픈 밤이라 것, 슬
픔이 출렁이는 우주라는 것
나는 지구를 치맥의 행성이라 부른다. 포만으로 가는 별 기차라 부른다. 취기를 찾아
가는 모꼬지라 부른다.
그런데 슬픔이 온 행적이 바로 우리인데, 치킨은 어디서 자란 닭의 슬픈 결말인가. 맥
주는 어디서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에서 왔으며, 홉은 어느 나라의 아침이슬을 매달다가
왔으며 물은 어느 별에서 택배로 왔는가.
그러니 기다려라. 치맥의 시간이여! 치맥으로 불콰해진 얼굴이면 그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어, 슬픔의 발원지가 어디고 뭣 때문에 슬픈지도 고백해, 치맥을 하자는 약속은 슬픔
을 앞세우고 오고 있다. 슬픔이란 명찰을 달고 오고 있다. 슬픔이란 신인류가 되어 오고 있
다. 피해야 될 이유가 없는 골목의 맥주집이다.
슬픔이어야 세상사는 맛이 난다는, 슬픔 중독자가 된 지 오래, 몸이고 마음은 슬픔이란 자
기장을 가져 슬픔과 모이기 좋아하고, 어둠은 어둠과 모이고, 빛은 빛으로 모여, 물고기가 산
란 하 듯, 세상 바닥을 치며 수정처럼 맑게 빛나는 꿈을 산란하며, 연대감을 가지는 것이 우
리 속성, 슬픔에 동조하듯 슬픈 밤 구름, 슬픈 마로니에 잎과 열매, 슬픈 숲으로 떨어지는 슬
픈 별똥별, 슬픈 마시멜로
슬픔이 즐거움의 무덤일 리가 없다. 슬픔이 또 다른 즐거움이다.
세상 모든 슬픔이 치맥을 하려는 저녁이다.
닭을 튀기는 기름의 온도는 알맞고, 숙성이 잘 된 맥주가 기다리는 저녁이다. 정철의 장진주
사가 생각나는 저녁이다. 권주가 부르며, 맥주잔에 떠오르는 정도령이 말하는 새 나라의 징
후를 느끼려는 저녁이다.
세상 모든 슬픔이 세상 모든 호프집으로, 어깨의 석양을 툭툭 털며 찾아들어야 한다.
이상한 낌새에 거품을 물고 짖어대는 사나운 개가 있는 들판을 지나, 하지 감자꽃 핀 강둑을
지나, 묘비명이 아름다운 공원묘지를 지나, 먼저 간 슬픔의 몫마저 챙겨, 세상 모든 호프집으
로 슬픔이 대세라며, 세상 모든 슬픔이 끝없이 거품을 걷어내는 맥주잔이 돌고 닭 튀기는 소
리 음악 같은 호포집의 치맥 앞으로
누구는 등불이 하나 둘 찾아드는 거리를 뒤로 두고, 불 꺼진 방에서 글루미 선데이를 듣고,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라는 나나무스쿠리의 노래를 듣고, 극으로 치닫는 슬픔으로
극단적 선택을 할까 망설이고, 그러니 세상 모든 슬픔은 슬픔이 슬픔으로 분열을 더 하기 전,
슬픔의 스트레스가 쌓이기 전, 모든 것을 해소하는 치맥 앞으로, 그리움이 꽉 찬 방광으로 오
줌을 누며, 호프 집 지붕에 반짝이는 별을 보려
세상 모든 슬픔이 그리워진다. 그간 세상을 뒤덮고 갔던 슬픔도, 소급해 부르고 싶은 슬픔
한철이다. 한데 어우러져 치맥을 하며 세상 끝으로 흘러가고 싶은 밤이다.
―웹진『시인광장』(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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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긴 시를 소개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의 잊혀진 풍경이 된 치맥집을 바탕배경으로 해서 슬픔의 현 주소를 기억해냅니다
치맥 잔 거품이라고 해서 새 나라의 징후가 느껴지진 않습니다만
세상이 그리 달라지지 않고 잇어서 슬픔은 여전합니다
국회가 취기를 찾아가는 모꼬지가 되고 있으니 정말로 슬픕니다
이 세상의 끝은 어디 일까요?
최근 3년 동안에 하루에 100만원어치를 팔았다는 자영업자의 눈물이 소개되는 어버이날 아침입니다^*^
첫댓글 슬픔은 차디차고 씁쓸한 쐬주에 하염없이 내리는 어둠이라 생각했는데
치맥이라니 마치 햄버거와 찐빵같이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슬픔과 치맥을 이만큼 끌고 나간 시인의 문장의 힘이 대단합니다.
오늘 어버이 날인데,
비가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