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불공평한 일들 투성이였다. 새치기하는 사람.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운전자.
모두들 일할 때는 사라졌다가 끝날 무렵 나타나 일 거드는 척하는 사람.
나는 유독 그런 꼴을 못 보는 성미였다. 화가 한번 치밀어 오르면 며칠씩 끙끙 앓았다.
상대는 이미 잊어버렸을 일을, 나는 밤새 곱씹으며 몇 번이고 다시 화를 냈다.
아내는 늘 말했다. "당신은 화를 너무 오래 품고 살아."
맞는 말이었다. 나는 불을 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 근처 다이소에 들렀다가 이상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소화기였다.
누군가 오래 사용한 듯 흠집이 많았고, 빨간색도 거의 바래 있었다. 가격표에는 천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장난감인가 싶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직원은 잠시 소화기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두는 표정이었다.
대신 계산을 마친 뒤 작은 종이 한 장을 함께 내밀었다. 사용 전 반드시 읽어보십시오. 집에 와서
펼쳐 보니 설명서는 의외로 길었다.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분노소화기
치솟는 분노를 의식 아래로 잠시 내려놓아 감정의 폭발을 막아드립니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했다.
※ 본 제품은 분노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 억눌린 감정은 내부에 저장됩니다.
※ 반복 사용 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웃었다. 별 희한한 농담도 다 있네. 설명서는 대충 접어 서랍에 넣어버렸다.
그날 밤이었다. 윗집에서 또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밤 열한 시. 참고 또 참다가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문득 낮에 산 소화기가
떠올랐다. 장난삼아 손잡이를 눌렀다.
칙— 희뿌연 안개가 퍼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 방금 전까지 끓어오르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심장은 차분해졌다. 숨도 편안해졌다. "이거... 진짜네."
그 뒤로 나는 소화기를 자주 썼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왔다.
칙.
끼어드는 차를 만났다.
칙.
무례한 말을 들었다.
칙.
효과는 놀라웠다. 화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온화한 사람이 되어갔다.
아내도 말했다. "요즘은 정말 많이 달라졌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몇 주쯤 지나자, 다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 생겨도 크게 기쁘지 않았다.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만나도 반갑지가 않았다.
어느 날 아이가 1등이라고 적힌 성적표를 들고 뛰어왔다. "아빠!" 나는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잘했네." 그게 끝이었다.
아이가 방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지?"
며칠 뒤, 아내가 승진 소식을 전했다. 정말 기뻐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축하한다는 말은 했지만,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처음으로 설명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졌다. 처음엔 없었던
페이지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경고
감정은 하나씩 억누를 수 없습니다.
분노를 오래 누르면 기쁨도, 사랑도, 연민도 함께 눌립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며칠 후. 지하철에서 누군가 내 발을 세게 밟고 지나갔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화기를 꺼냈다.
칙— 안개가 퍼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분노가 사라지는 대신, 안개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였다. 운동장에서 선생님에게 혼나던 날. 친구들이 웃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상사에게 억울하게 질책받던 나.
또 바뀌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무시당하던 날.
또 바뀌었다. 아버지에게 야단맞고 방문을 닫아걸던 저녁.
계속 바뀌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발을 밟은 사람은 벌써 저만치 사라졌는데,
내 안에서는 수십 년 묵은 분노가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화가 난 것은 발을 밟은 사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억눌렸던 감정에 불을 붙인 부싯돌이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설명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맨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억눌린 감정은 임계점에 이르면 저장된 순서와 관계없이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소화기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동안 나는 분노를 없앤 것이 아니라,
의식 아래로 억누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소화기를 거의 쓰지 않았다.
화가 나면 노트를 펼쳤다.
이번에는 왜 화가 났지. 정말 저 사람 때문일까. 피곤해서일까. 내 자존심 때문일까.
내가 먼저 무례했던 건 아닐까. 상대에게도 사정이 있었을까.
한 줄. 또 한 줄. 적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어떤 것은 오래된 상처였다. 분노는 생각보다 금방 작아졌다.
또 어떤 것은 내 욕심이었다. 물론 끝까지 화를 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노조차
더 이상 며칠씩 타오르지는 않았다. 이유를 알게된 불은, 생각보다 오래 타지 못했다.
몇 달 뒤. 서랍을 정리하다가 그 소화기를 다시 발견했다.
분명 버렸는데. 이번에는 손잡이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불을 끄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왜 불이 났는지 묻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이번에는 소화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냥 서랍 가장 안쪽에 넣어두었다.
가끔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꺼내 보기는 한다. 하지만 손잡이를 누르지는 않는다.
대신 스스로에게 먼저 묻는다.
이번에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화나게 했을까.
신기하게도,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대부분의 불은
예전보다 훨씬 빨리 잦아들었다.
<오늘의 팝송> Last Train to London / ELO
Last Train to London은 ELO가 1979년에 발표했다. 밤기차를 타고 사랑을 찾아 떠나는 설렘과 자유로움 노래한
곡이다. 차트순위는 높이 올라가지 못했지만 세련된 멜로디와 가사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ELO는 Electric light Orchestra의 약자로 1970년 부터 활동했다. 밴드는 리더인 '제프 린'을 필두로 베이시스트, 첼
리스트, 드러머, 바이올리니스트, 키보드, 기타리스트로 구성됐다.
대표곡은 'Mr. Blue Sky' , 'Last train to London', 'Midnight Blue' , 'Need Her Love', 'Twilight'등이 있다.
https://youtu.be/Up4WjdabA2c
첫댓글
네^^
그렇군요
화는 참는것이 아니라
알아 차리는 것
이라고 하더군요.
화를 내는 것은
미친증상의 일종이라죠
아! 내가 화가났구나
알아차리는 것으로
일단 진정,
이러한 경험으로
올라오는 화에
대처하는 지혜가
생긴다고 하네요.
좋은글 잘
보았어요 ^^
감사합니다. 지는해님.
화가 날때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화를 더이상 솟구치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표현력이 참 좋으십니다.
누구나 화가 납니다.
그 화를 어떻게 삭이느냐지요.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감정을 죽이면 화가 덜 나는데
감정을 죽이면 재미가 없어짐이지요.
감정의 기폭이 어느정도는 있어야 인간답지요.
나이들어서 이젠 전보다는 가볍게 지나갑니다.
화를 않내고 살 수는 없지만
두고 두고 속을 끓여서는 않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니방장님.
내용이,
童話가 아닌데요
서늘 하고 섬뜩 합니다
감사합니다. 향적님.
보기 나름입니다.
젊었을 때는 B형 남자 아니랄까 봐
화가 나면 그대로 분출하곤 했었지요.
직장 상사에게도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치받아 버리고 ~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고 직장에서도
오를대로 다 올라가 보고 세월이 흐르니
자동적으로 분노 조절이 되더군요.
이젠 가끔씩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웃어 버립니다.
맞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마음도 차분해 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영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