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와 피아노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
김윤자
1.꾸륵이
고향은 시골 들녘이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 아들의 손에 안겨 왔다.
야생의 옷을 벗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람과 함께 산다.
연못과 풀숲을 만들어 주었지만
삭막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을 살아주니 고맙다
우리는 그를 꾸륵이라 부른다.
예쁜 개구리의 애칭이다.
2.아가
꾸륵이는 아가다.
종(種)이 다른데도 막둥이 마냥 귀엽다.
우리 가족은 아침에 눈뜨면 꾸륵이를 찾는다.
안 보이는 날이면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밤새도록 혼자 놀다가 늦잠 자는 아가
풀숲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숨바꼭질을 잘 하여 여기저기 숨어 놀라게 한다.
뜀뛰기도 잘 하여 고추장 항아리 망 위에 올라앉는다.
빠지면 위험하다고 타일러 내려놓아도 자꾸 올라간다.
3.예쁜짓
문만 열면 들어와 예쁜짓을 한다.
어느 날 저녁 사람도, 바람도 아닌 것이
문을 툭툭 치는 소리에 나가보니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노크했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선뜻 들어오지 않고
마치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는 것처럼
하루는 학교에 간 아이 방에 숨어들어
책꽂이 위에 앉아 윙크했다.
승낙없이 들어와 미안하다는 듯
4.일기예보
날이 궂음을 잘 맞춘다.
저녁에 울면 다음 날 아침에 비가 오고
아침에 울면 그날 저녁나절 비가 온다.
하늘이 아무리 맑게 개여 있어도
꾸륵이의 울음은 비를 몰고 온다.
'꾸르륵, 꾸르륵' 울 때, 우리는 우산을 챙긴다.
5.기적
어느 해 무더운 여름날
집수리 할 때 베란다에 가구를 내어놓느라
꾸륵이의 집을 망가뜨린 적이 있다.
연못과 화분을 다 치워 발붙일 곳 없이
손바닥만한 그릇에 물 한 모금 떠다 놓았을 뿐
일주일 후 가구를 들일 때 겁이 났다.
말라 죽은 모습이 보일 것 같아서
아, 그런데 가구 사이에서 툭 튀어 나왔다.
먹이도 없거니와 피부호흡으로 몸이 마르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일주일을 견뎠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다.
6.피아노
피아노를 치면 꾸륵이는 노래를 부른다
피아노 음정이 높아지면 따라서 높아지고
피아노 가락이 빨라지면 따라서 빨라진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하나 되어 합창을 한다.
피아노를 그치면 꾸륵이도 노래를 멈춘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다른 소리에는 아무 대꾸도 없는데
피아노 소리에는 반응을 한다.
그래서 피아노 위에 앉으면 행복하다.
아름다운 선율에 꾸륵이의 노래를 실으니 더욱 좋다.
7.봄의 전령사
추워지면 흙 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잔다.
화분을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다칠까봐, 하지만 꾸륵이가 나오는 날을 안다.
경칩이 지나고 이삼 일 후면 나온다.
꾸륵이가 나오면 경사가 난듯 좋다.
한동안 보지 못 했음에
바싹 마르고 핏기 없는 모습이지만
어김없이 희망을 실어 오는 봄의 전령사다.
8.사랑
우리 가족은 정말 꾸륵이를 사랑한다.
이런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이
손에 품어 안아주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체온이 흘러 사랑으로 퍼진다.
누군가 그랬지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꾸륵이는 우리에게 길들여지고
우리는 꾸륵이에게 길들여져 있다.
9.인연
사람 나이로 치면 백사십 살쯤 된다.
개구리의 평균 수명이 오 년이라는데
그보다 배, 십 년을 살고 있으니
사람의 평균 수명을 칠십 살 정도로 보면
그 배인 백사십 살쯤 된 것이 아닌가
전생에 인간과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가보다.
그러기에 사람의 집에서 저리도 오래 살지
10.바람
걱정이다. 꾸륵이가 너무 늙어서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크던 몸집이
왜소해져 뼈만 앙상하게 튀어 나왔다.
커다란 두 눈만 껌벅이며 시름에 잠기곤 한다.
오래도록 함께 살고 싶다.
내년 봄에도 꾸륵이가 나와야 할 텐데
꾸륵아 알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도 좋아하던 피아노 더 많이 쳐 줄게
이 간절한 우리의 바람을 잊지말고
화분 속 새싹 곁에서 목청 가다듬고 꼭 나오렴
* 1999년 11월 25일 목요일 쓰다
꾸륵이는 10년 동안 가족으로 함께 지낸 개구리의 애칭이다.
해마다 경칩 무렵이면 화분에서 나왔는데, 2000년 봄에는 나오지 않았다.
겨울잠과 함께 고이 영면한 것이다.
개구리와 피아노-보령문학 2024년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