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그의 이력은 ‘목사, 전 경찰공무원’이라고 나온다. 1938년생. 1979년에 조선일보사가 주는 청룡봉사상을, 1981년에 내무부장관 표창, 1986년에는 옥조근정훈장을 각각 받았다. 그 밖의 자잘한 상들과 특진은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대단한 수상 이력이다. 현직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이고 취미는 독서, 특기는 합기도라고 한다.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72)씨. /조선일보DB
1985년 9월4일. 청년활동가들의 민주화 운동 단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의장이 경찰 치안본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민청련 의장은 그곳에서 한 ‘고문기술자’에 의해 20일 동안 물고문 등 각종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평생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렸다. 2011년 12월30일, 민청련 의장은 64세의 이른 나이에 숨졌고, 고문기술자는 목사가 돼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민주통합당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72) 전 경감의 이야기다.
김 상임고문의 직접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26년 전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물고문을 당해 생긴 후유증이 비염과 축농증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고문이 직접 사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문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축농증 등의 수술을 20년 가까이 미룬 김 상임고문은 지속적인 잔병에 시달렸다. 지난 2007년에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는데, 고문 후유증 때문으로 알려졌다.
김 상임위원장을 고문했던 이 전 경감은 1970년 경찰에 들어온 뒤 대공 수사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1988년 김 상임위원장을 고문한 혐의로 수배를 받자 잠적했다 10년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해 7년형을 선고받고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했고, 지난 2006년 11월 출소했다.
출소 후 그는 독실한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지난 2008년 한 교회의 신앙 간증에서 “감옥 나가서 나이 칠십에 할 게 뭐 있나. 손가락질 받는 거 안 해야 하는데 그럼 전도사업밖에 더 있느냐”고 밝혔다.
하지만 종교에 귀의하고서도 이 전 경감은 자신의 고문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임금이 바뀌면 충신이 역적 되고 역적이 충신 되는 수난의 역사 속에 두 시대를 사는 죄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면서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신문(訊問) 기술자’가 맞을 것”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전 경감은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면서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김 상임고문의)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김 상임고문을) 신문해서 단 몇 시간 만에 노동계와 학원에 침투한 조직을 캐내 전원 검거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이 전 경감은 2005년 여주교도소에 면회를 온 김 상임고문에게 용서를 구했다. 김 상임고문은 당시 사죄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씨를 보고 진정성이 의심돼 차마 “용서한다”고 말하지는 못한 채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