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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湖南)·호서(湖西)! 반도(半島) 땅엔 없다.
○ 땅(地)이 있으면 :
지세(地勢)【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세】가 있고, 그 땅(地)이, 어느 곳에 위치(位置)해 있는 가에 따라, 방위(方位)【동서남북(東西南北)】의 다름과 자연환경(自然環境)의 다름이 있고, 그에 따른 기후대(氣候帶)의 다름이 있고, 거기에 따른 동식물(動植物)의 다름, 풍토(風土)와 풍속(風俗)의 다름과 있고, 인종(人種)의 다름이, 필연적(必然的)으로 발생(發生)하고 있는 것이, 이 행성(行星)의 철칙(鐵則)으로, 인류(人類)탄생(誕生)의 기원(起源)때부터 일망정, 추측(推測)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선왕조(朝鮮王朝)【옛 조선(朝鮮)의 많은 나라를 총칭(總稱)함】
크게 보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루었던, <땅(地)·백성(百姓)·군주(君主)>의 삼(三) 요소(要素)는, 그 땅(地)에 따라, 백성(百姓)들과 군주(君主)가 어떤 인종(人種)이었는가? 까지도 일 수 있으며, 풍속(風俗), 그에 따르는 동식물(動植物)이나, 특이(特異)함 등을 알 수 있으며, 지세(地勢)나 지형(地形)은 모방(模倣)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많은 산물(産物)과 토산물(土産物)등의 특이(特異)함이, 대대(代代)로 전(傳)해지고 있는 것이다.
○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인간(人間)의 생활(生活) 자체(自體)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다. 20세기(世紀) 중반(中盤)까지도, 농촌(農村)이나 어촌(漁村) 조그만 도회지(都會地) 같은 곳을 보면 : 온 동네가 일가(一家)일 경우(境遇)가 허다(許多)했다. 특히 열도(列島)를 보면 : 한 동네에서 가까운 일가(一家)끼리도 혼인(婚姻)을 하는 경우(境遇)가 많았는데, 이것은 당시(當時)의 사회(社會)풍속(風俗)과 지세(地勢)가 많은 영향(影響)을 끼쳤다고 이야기 한다.
1950∼1960년대를 보더라도, 농촌(農村)이나 어촌(漁村)의 마을을 보면 : 일가(一家)친척(親戚)으로 엮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서 여기에 엮이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大槪) 먼 곳에서 어떤 연유(緣由)로 인하여 이주(移住)한 사람이나, 종살이 하다가 어떻게 하여 풀려난 사람 등이었을 뿐, 예외(例外)는 많지 않았다.
이러한 예(例)를 드는 것은 :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뤘던 백성(百姓)들도,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영향(影響)아래 살아갔다는 것을 강조(强調)하기 위함이다. 대륙조선왕조(大陸朝鮮王朝)를 주장(主張)하며, 원전(原典)을 찾아, 그 논거(論據)를 일일이 고증(考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가(代價)를 원(願)하지 않는, 스스로를 위한 노동(勞動)이니, 누가 뭐라 한 들 무슨 상관(相關)이 있겠는가!
다만 거기에 찬물을 확 쏟아 붓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이나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보다도 더 무지(無知)한 주장(主張)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폄하(貶下)하고, 비참(悲慘)하게 만들고 있어, 안타까움이 배가(倍加)된다. 이런 자(者)들은 혹(惑), 누구의 지시(指示)를 받고, 대륙조선왕조(大陸朝鮮王朝) 사관(史觀)을 허물기 위해, 등장(登場)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疑懼心)마저 들도록 한다. 나 혼자만의 기우(杞憂)라면 얼마나 좋을까?
○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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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언(記言) 제47권 속집 사방(四方) 1 / 贈 湖 南 方 伯 序 : 호남(湖南) 방백(方伯)>에게 선사한 서(序) :
《老人平生好遊.中年落南十年.出湖外.遵海而西.自晞陽至章德,牟陽.出入六七百里.歷謠俗古事. : 내가 평소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중년에 남녘으로 내려가 지낸 10년 동안, 호외(湖外)로 나가,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희양(晞陽 광양(光陽))으로부터 장덕(章德 흥덕(興德)), 모양(牟陽 함평(咸平))에 이르기까지, 6, 7백 리를 출입하며, 풍속과 고사(古事)를 두루 탐방하였다. 江南,海陽.本馬韓之地.後幷於百濟.西南際海.饒鹽,鐵,海錯,梅,橘,竹箭之利.江南.江海之都會.物貨之途.商賈之所.風俗尙儇利. : 강남(江南), 해양(海陽)은, 본래 마한(馬韓) 땅인데, 후에 백제(百濟)에 병합되었다. 서(西)쪽과 남(南)쪽 사이의 바닷가는, 소금(鹽), 철(鐵), 어물(魚物), 매실(梅實), 귤(橘), 살대(竹箭)의 이로 움이 있고, 강남(江南)은, 강(江)과 바다(海)가 모이는 곳으로서, 물화가 이동하는 길이고, 장사치가 모여드는 곳인데, 그곳의 풍속은 민첩하고 정교함을 높이 친다.》
➊《老人平生好遊.中年落南十年.出湖外.遵海而西.: 내가 평소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중년에 남녘으로 내려가 지낸 10년 동안, 호외(湖外)로 나가,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고 하였는데 :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의 남방(南方) 땅에서 ‘호외(湖外)의 땅’이란 : 경상도(慶尙道)지방(地方)뿐이다.【호남(湖南) 땅은 전라도(全羅道)요, 호서(湖西) 땅은 충청도(忠淸道)라고 했기 때문이다.】그러함에도 위의 원문(原文) ‘기언(記言)’의 저자(著者)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호외(湖外)로 나가, 바다를 따라 서(西)쪽으로 갔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호남(湖南)이니 호서(湖西)니 하는 특정(特定)지방(地方) 밖(外)에【특정(特定)지방(地方) 곧 호(湖)지방을 벗어나면】, 또 다른 땅(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의 형세(形勢)로는 불가능(不可能)하다.
● 위 원문(原文)이야기는 : 반도(半島)지방(地方) 이야기가 아니다. 무지(無知)하고 무식(無識)한 우리네가, 반도(半島) 땅에 억지로 맞춰보려고 별짓을 다하는,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➋《강남(江南), 해양(海陽)은, 본래 마한(馬韓) 땅인데, 후에 백제(百濟)에 병합(倂合)되었다.》: 이곳이 마한(馬韓)의 땅일 수 없는 것은, 이미 우리 카페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說明)한 것이므로 생략(省略)키로 한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유랑(流浪)하고 있던 진한(秦韓)인들을 딱하게 여긴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그 동(東)쪽 일부(一部) 땅을 주어, 그들이 살 수 있도록 해줬다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에 맞추다보니, 전라도(全羅道) 땅이 마한(馬韓)의 땅으로, 둔갑(遁甲)해 버린 곳으로,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조작(造作)이며, 이는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아킬레스건’이다.
➌《서(西)쪽과 남(南)쪽 사이의 바닷가는, 소금(鹽), 철(鐵), 어물(魚物), 매실(梅實), 귤(橘), 살대(竹箭)의 이로 움이 있고, 중략(中略).》: 반도(半島) 전라도(全羅道) 바닷가에서는 귤(橘)이 생산(生産)된 적이 없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의 전라도(全羅道) 바닷가 지방에서는 많은 귤(橘)의 생산지(生産地)로 유명(有名)했다. 대륙조선(大陸朝鮮)을, 반도조선(半島朝鮮)으로 만드는 과정(過程)에서의, 중요(重要)한 오류(誤謬)다.
➍《강남(江南)은, 강(江)과 바다(海)가 모이는 곳으로서, 물화가 이동하는 길이고, 장사치가 모여드는 곳인데, 중략(中略)》: 반도(半島) 땅 어디가 강(江)의 남쪽지방인 강남(江南)지방(地方)인가? 더하여 강(江)과 바다가 모이는 곳으로, 물화(物化)기 이동(移動)하는 길이라서 장사치가 모여드는 곳이라는 설명(說明)은, 반도(半島)조선(朝鮮)이 조작(造作)됐음을 확실(確實)하게 보여주는 구절(句節)이다.
강남(江南)이란 강(江)의 남(南)쪽이란 말이며, 강(江)이란 ‘장강(長江)’을 말하는 것이니, 「장강(長江)의 남(南)쪽」 지방을 일컫는 말이다. 장강(長江)과 바다가 모이는 곳이므로, 당연(當然)히 온갖 물화(物貨)가 모이고, 물화(物貨)들은 이곳저곳으로 팔려나간다. 이러한 곳에 장사치들이 모여드는 것은, 인간사(人間事)의 가장 흔한 이치(理致)다.
➎ <동(東)·남(南)·서(西)쪽의 삼면(三面)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북(北)쪽 한 면(面)만이 대륙(大陸)의 땅과 접(接)한 반도(半島)>는 : 자연환경(自然環境)에 따른 기후(氣候), 산하(山河)의 특이지형(特異地形), 방위(方位), 지방(地方)특색(特色), 풍토(風土)에 따른 풍속(風俗)등은, 일만(一萬)년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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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언(記言) 제47권 속집 사방(四方) 1 / 贈 湖 南 方 伯 序 : 호남(湖南) 방백(方伯)>에게 선사한 서(序) :
《帶方輕悍好勇力.昇,羅風俗富麗.尙任俠奇氣. : 대방(帶方)의 풍속은 가볍고 사나우며 용력을 좋아하고, 승주(昇州)와 나주(羅州)의 풍속은 부유하고 화려하며, 임협(任俠)과 남다른 기개를 높이 친다. 金馬古國之餘.多沃野葆澤之地.瀆田萬頃.好鬼神.尙巫覡淫祀倡優. : 금마(金馬)는 고국(古國)의 풍모가 남아 있다. 비옥한 땅이 많아서 수로(水路)가 있는 전지(田地)가 1만 경(頃)이나 되며, 귀신을 좋아하고 무격(巫覡), 음사(淫祀), 창우(倡優)를 숭상한다. 卞山宮室舟車材木之所出.大屯,月岳.冠山海上名山.多浮屠古跡. : 변산(卞山)은 집과 배, 수레를 만드는 재목이 생산되는 곳이고, 대둔산(大屯山), 월악산(月岳山), 관산(冠山)은 바닷가의 명산(名山)으로서, 부도(浮屠)의 고적(古跡)이 많다.》
➊《대둔산(大屯山), 월악산(月岳山), 관산(冠山)은 바닷가의 명산으로서 부도(浮屠)의 고적(古跡)이 많다.》고 하였는데,
➋ 대둔산(大屯山)은, 내륙지방(內陸地方)에 있다.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및 금산군 진산면에 걸쳐 있는 산인데, 해발고도(海拔高度) 878m이다. 대둔산(大屯山)은 ‘호남(湖南)의 금강산(金剛山)’이라고 불리며, 천여 개의 암봉(巖峰)이 6㎞에 걸쳐 이어져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대둔(大芚)이라는 명칭(名稱)은 ‘인적이 드문 벽산 두메산골의 험준하고 큰 산봉우리’를 의미한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둔산(大芚山)>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한자어(漢字語)가 대둔산(大芚山)으로, 위의 대둔산(大屯山)과는 다르다.
➌ 월악산(月岳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월악산(月岳山) : 충청북도(忠淸北道) 제천(堤川)시·단양군(丹陽郡)·충주(忠州)시와 경상북도(慶尙北道) 문경(聞慶)시에 걸쳐 있는 산(山)으로, 월악산(月岳山)의 높이는 1,092m이며, 소백산맥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악지대이다. 충주호(忠州湖)에 바로 인접하여 있고, 산의 동북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남서쪽으로는 속리산국립공원이 있다. 신라(新羅)시대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
➍ 관산(冠山) :
ⓐ 두산백과 : 경기도(京畿道)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산. 높이 556m이다.
ⓑ 한국지명유래집(韓國地名由來集) 경상(慶尙)편 지명 : 관산(冠山) : 경상북도 경주시의 서면 도리와 영천시 북안면 관리·신촌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 : 394m). 금호강과 형산강 유역의 분수계 역할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조선지도』(경주)에는 고관산(高冠山)으로 나온다. 이어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지도에도 동일하게 표기되며, 『대동지지』(경주)에 고관산이 경주 중심지의 서북쪽 40 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고관산의 위치는 실제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언제 고관산에서 관산으로 변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조선지형도』에는 관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 자연지리정보관 : 지형지물 : 관산(冠山) : 황해도(黃海道) 은률군 관산리의 서남쪽 소재지 옆에 있는 산. 갓바위가 있다. 갓산이라고도 한다.
ⓓ 자연지리정보관 : 지형지물 : 관산(冠山) : 평양시 삼석구역 삼성리 서북쪽 관학동 북쪽에 있는 산. 갓처럼 생겼다. 그 외(外)에도 관산(冠山)이란 이름은 많다.
➎ 위 본문(本文)의 :《卞山宮室舟車材木之所出.大屯,月岳.冠山海上名山.多浮屠古跡. : 변산(卞山)은 집과 배, 수레를 만드는 재목이 생산되는 곳이고, 대둔산(大屯山), 월악산(月岳山), 관산(冠山)은 바닷가의 명산(名山)으로서 절과 고적(古跡)이 많다.》고 한 구절(句節)에 있는,
『대둔산(大屯山)·월악산(月岳山)·관산(冠山)』을 찾아보니, 이들 산(山)은, 바닷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륙(內陸)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의 이름들이다. 이들 세 개의 유명(有名) 산(山)에는 불교(佛敎)와 관계(關係)된 많은 고적(古跡)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기언(記言)의 저자(著者)가 글을 쓸 당시만 해도,【기언(記言)의 저자(著者)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은 : <1595년(선조28)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탄생하여, 1682년(숙종8) 경기도 연천(漣川)에서, 88세의 고령(高齡)으로 세상을 떠난 분>이라고 전(傳)하고 있다.】세 개의 산(山)【대둔산(大屯山)·월악산(月岳山)·관산(冠山)】에는, 부처와 관계(關係)되는, 많은 유적(遺跡)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➏ 반만년(半萬年),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의 영토(領土)였다는 반도(半島) 땅의 <대둔산(大屯山), 월악산(月岳山), 관산(冠山)>은, 바닷가, 해안(海岸)가가 아닌, 내륙(內陸) 깊숙한 곳에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說明)해야 할까? 17세기에, 필자(筆者)가 가장 선호(選好)하는 구절(句節)인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있었다는 이야긴가?
그 결과(結果)로 인하여, 서해(西海) 바닷가에 있던 <대둔산(大屯山), 월악산(月岳山), 관산(冠山)>이 내륙(內陸) 깊숙한 곳으로 이동(移動)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의 허구성(虛構性)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事例)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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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언(記言) 제47권 속집 사방(四方) 1 / 贈 湖 南 方 伯 序 : 호남(湖南) 방백(方伯)>에게 선사한 서(序) :
《其北數百里.潭州無等.東據嶺阨之阻.淸渠印.多山少野.茂朱,赤裳.太史所藏. : 그 북쪽으로 수백 리를 가면 담주(潭州)의 무등산(無等山)이 있는데 동쪽으로 험준한 고개에 막혀 있다. 청거(淸渠)의 동(印)은 산이 많고 들이 적으며,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은 실록(實錄)을 보관하는 곳이다. 地誌曰.耽羅.南海中小國.土瘠民貧.其民樸騃.出善馬,玳瑁,珠璣.山高海惡.風俗射獵漁釣.不用網罟. : 지지(地誌)에, 탐라(耽羅)는 남해 가운데의 작은 나라인데, 토지가 척박하여 민생이 가난하며 그 백성들은 질박하다. 좋은 말과 대모(玳瑁), 진주가 나고, 산이 높고 바다는 풍랑이 사나우며, 그 풍속은 사냥과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데 그물을 쓰지 않는다. 湖南之地.幅員五六百里.去國都極南千里.四州,五府,九郡,二十六縣,館驛六.南方之國.風氣習尙.考天下誌.與荊楚大槩相類.西海燕,齊諸島.其南琉球,日本諸蠻夷. : 호남 땅은 직경이 5, 6백 리이고, 국도에서부터 1000 리나 떨어진 남쪽 끝이다. 4주(州), 5부(府), 9군(郡), 26현(縣)이고, 관역(館驛)이 여섯 곳인 남방의 나라이다. 그곳의 풍기(風氣)와 습속은, 천하지(天下誌)를 살펴보면, 형초(荊楚)와 대략 비슷하다. 서해에는 연(燕)과 제(齊)의 여러 섬이 있고, 그 남쪽에 유구(琉球)와 일본 등 여러 만이(蠻夷)가 있다. 上之卽位之二年.南漢府尹朴公以防海多虞.擢拜湖南觀察使.辭朝過我.作江海小序.略擧南國體要以贈. : 금상 2년(1676, 숙종2)에, 남한 부윤(南漢府尹 광주 부윤(廣州府尹)) 박공(朴公 박신규(朴信圭))이 바다를 방어하는 데에 근심스러운 일이 많다고 하여, 호남 관찰사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하직 인사를 하고 나에게 들렀기에 강해소서(江海小序)를 지어 남국(南國)의 체요(體要)를 대략 거론하여 선사한다.》
➊ 《南方之國.風氣習尙.考天下誌.與荊楚大槩相類.西海燕,齊諸島.其南琉球,日本諸蠻夷. : 남방의 나라이다. 풍기(風氣)와 습속은, 천하지(天下誌)를 살펴보면, 형초(荊楚)와 대략 비슷하다. 서해에는 연(燕)과 제(齊)의 여러 섬이 있고, 그 남쪽에 유구(琉球)와 일본 등 여러 만이(蠻夷)가 있다.》고 하였는데 :
ⓐ 형초(荊楚)와 <대개(大槩) 비슷하다. 대략(大略) 같은 종류(相類)이다.>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 형초(荊楚) 문화지역 (중국문화답사기 2 : 형초지역의 도원지몽을 찾아서, 2004. 7. 7. 다락원) / 형초(荊楚)는, 호북성(湖北省)·호남성(湖南省)·강서성(江西省)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을 말한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강회(江淮)와 형주(荊州) 지역에 있던 묘족(苗族)이 순(舜)·우(禹) 임금의 공격을 받아 장강 유역으로 물러나 염황족(炎黃族)과 대항하면서 부족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들이 바로 형초(荊楚)라고 불리는 초(楚) 민족이다. 초 민족은 한수(漢水) 유역과 장강 중류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중원 지방의 주(周)나라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주(周) 초기의 청동기 명문(銘文)을 보면, 주(周)가 초(楚)를 자주 정벌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초(楚)는 춘추(春秋)시대에 이르러 45개국을 병합하여, 대 제후국이 되었으며, 장왕(莊王) 때에는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하나가 됐다.
초(楚)는, 중원 지방의 국가들과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중원의 여러 제후국을 병합했다. 이때 그들은 자신의 무(巫)문화 속에 중원의 화하(華夏) 문화를 결합하여 고유한 초 문화를 형성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월(越)나라의 서쪽 지역, 남쪽으로는 운남성의 전지(滇池)와 호남성의 창오(蒼梧)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중원 땅, 서쪽으로는 호남성 검중(黔中)과 사천성의 무군(巫郡)까지 세력을 떨쳤다. 이후 초나라는 기원전 223년에 진(秦)나라에게 망했지만, 오월 문화와 함께 강남의 중심 문화를 이루었다.
형초 문화의 핵심은 무(巫)에 있다. 민간에서는 무속(巫俗)이 성행했고 귀신을 모셨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무가(巫歌)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적 기초를 바탕으로 초나라 방언과 초사(楚辭)가 나왔다. 굴원(屈原)과 같은 위대한 시인도 이 같은 문화 속에서 탄생했다. 굴원의 대표작인 「이소(離騷)」·「천문(天問)」·「구가(九歌)」 등에 천지산천, 신령, 괴물 등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짙게 나타나 있는 것 역시 무속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형초 지역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다. 꿈속에서나 본 듯한 산수풍광이 유람객의 발길을 잡는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산수자연에 있지 않다. 그 속에는 오랜 역사를 두고 배어든 인간의 숨결이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 이곳은 문화 경관의 극치를 이룬다.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피맺힌 통곡이 느껴지는 동정호(洞庭湖)의 군산(君山), 굴원의 애국적 영혼이 떠있는 멱라강(汨羅江), 지식인은 세상 사람보다 앞서 번민해야 한다고 술회했던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岳陽樓), 개혁의 실패로 좌천되어 그 우울했던 심정을 달래주었던 유종원(柳宗元)의 영주(永州)와 소수(瀟水), 동아시아 팔경(八景) 문화의 시원을 열었던 소상팔경(瀟湘八景), 욕계(欲界)에서 선경(仙境)을 찾으려고 했던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桃花源), 심산유곡의 원시적 비경을 간직한 무릉원(武陵源), 그리고 구운몽(九雲夢)의 무대 남악(南岳) 형산(衡山) 등등이 모두 초 문화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곳들이다.
형초 지역은 명인(名人)이 많기로 유명하다. 전설상의 황제 염제(炎帝)와 우순(虞舜), 애국시인 굴원과 중국 최초의 산문가 가의(賈誼), 종이를 발명한 채륜(蔡綸), 이학(理學)의 개산조(開山祖) 주돈이(周敦頣), 중국 근대 사상가 왕선산(王船山)·증국번(曾國藩)·담사동(譚嗣同)·좌종당(左宗棠) 등이 그들이다. 특이한 점은, 초 문화 지역은 근대 혁명가의 고장이라는 점이다.
모택동(毛澤東)·유소기(劉少奇) 같은 근대 혁명가들이 이런 문화 속에서 등장했는데 어쩌면 그들의 낭만적 혁명주의는 초 지방의 꿈같이 환상적인 문화경관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또한 이 지역은 군대 지도자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남(湖南)사람이 없으면 군대가 이뤄지지 않는다(無湘無成軍)"고 했을 정도로 군인(軍人)이 많았다. 이러한 '상무' 정신도 이 지역 문화경관과 무관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형초(荊楚) 사람들이 붉은 고추와 매운 음식을 즐기는 것, 그리고 성격이 급한 것, 열정적이며 친절한 성품 역시 깊은 연관성을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형초(荊楚) 문화지역 (중국문화답사기 2 : 형초지역의 도원지몽을 찾아서, 2004. 7. 7.다락원)
ⓑ 반도(半島) 호남(湖南)지방, 전라도(全羅道) 땅과 대륙(大陸)의 장강(長江) 남북(南北)안(岸)의 형초(荊楚)지방과 무엇이 같을 수 있겠는가? 우리 한 번 따져보자. 위의 ⓐ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引用)한 것이다. 남방의 나라(南方之國)로써, 풍기(風氣)와 습속(習俗)이 대략 같다는 말은 : 풍기(風氣)는 풍토(風土)와 유사한 말로, 기후(氣候)와 땅(地)의 상태(狀態)를 말하는 것이다. 형초(荊楚)와 같은 땅은, 오직 형초(荊楚) 땅 뿐이다.
ⓒ 위 본문(本文)에서 말하는 『담주(潭州 : Tánzhōu)』는 : 호남성(湖南省) 동부 상강(湘江) 하류(下流) 지역에 위치(位置)한 상담(湘潭)의 고칭(古称)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담주 [潭州, Tánzhōu]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 2. 20. 도서출판 인포차이나)】
➋《西 海 燕, 齊 諸 島. 其 南 琉 球, 日 本 諸 蠻 夷. : 서해에는 연(燕)과 제(齊)의 여러 섬이 있고, 그 남쪽에 유구(琉球)와 일본의 여러 만이(蠻夷)가 있다.》
ⓓ <전라도(全羅道)의 서해(西海)에, 연(燕)과 제(齊)의 여러 섬(島)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理解)를 할 수 있을까? 반도(半島)에는 반도(半島)에 속한 섬(島)이 있고, 연(燕)이나 제(齊)에는 그곳에 속한 섬(島)이 있을 것인데, 전라도(全羅道) 서해(西海)에 있는 섬(島)들은 모두 연(燕)과 제(齊)의 것이란 말인가?
ⓔ <그 남쪽에 유구(琉球)와 일본(日本)의 여러 만이(蠻夷)가 있다.>는 것은 어이없는 말이다. 열도(列島)에 우리가 말하는 왜(倭)나 일본(日本)은 없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이야기다. 열도(列島)와 유구(琉球)는 그렇다 치고, 여러 만이(蠻夷)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방위(方位)를 따라가 보자. 전라도(全羅道)와 그리고 그 남(南)쪽에, 유구(琉球)와 일본(日本), 여러 만이(蠻夷)가 있을 수 있는 곳은, 바로 대륙(大陸)의 남방(南方)지대, 그곳뿐이다.
2016년 04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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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왜구와 열강들에 의한 조선사 역사의 해체는, 우리 역사의 뿌리와 근간을 뒤흔들어, 고려와 조선의 한 주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도의 조그마한 땅에, 왜곡과 거짓의 역사를 심어 역사의 줄기를 잘라 버리고, 역사의 혼과 맥을 철저히 끊어 버렸습니다.
오늘도 반도사관의 사학자들은 이러한 자들의 충실한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주인 이었던 후학들과 국민들에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가관의 행태를, 한 줌 부끄러움도 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반도에 장엄한 대륙의 역사를 심어놓고, 역사를 설명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 천하에 부끄러움이 가득할 뿐입니다.
호남과 호서의 후손들이 대륙에 수 없이 많이 살고 있으며, 탐라의 모습과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 이건만, 반도만은 우물안의 개구리와 같은 일들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역사의 본원으로 돌아오는 그 날에 그들은 무슨 꾀변을 늘어 놓을지 참으로 안타까은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환절기에 항상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지금 살고 있는 '호남과 호서' 사람들 만 해도 그 인구가 '수 억'명은 되리라 생각됩니다. 광활한 땅과 수많은 백성들이 살았던 조선의 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곳은 중국 땅이요, 조선은 반도 땅이라는 이분법이 생겼고, 조선 강역은 옛 조선의 한개 주(州) 정도에 지나지 않는 모습으로 축소되어 동쪽의 바닷가 모퉁이 반도 땅에 처박혀 버렸습니다. 이러한 조선역사의 조작에 많은 신진 조선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에 일제의 치밀한 작전이 성공한 것이고, 조선의 입장으로 보면, 큰 배신을 당한 것이죠. 민족의 혼을 팔아넘긴 그 자들이 지금도 큰소리 탕탕치는 것을 것을 보면, 온 몸이 떨립니다.
조선의 역사가 제 자리를 찾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언젠가 그 날이 틀림없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죠. 경제적으로 조금 번영했다는 것 빼고 말입니다. 정치판도 그렇고, 친일이니 친미니 하는 자들이나, 통치권력들이 제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국민들을 억압하는 것도 똑같고, 매국노들이 활개치는 것도 똑같고........변한 것이 없습니다. 변화를 주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자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태되는 수순을 밟습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은 망할 수밖에 없죠. 사학계도 마찬가지로 변해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환국고려"님!
댁내 늘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관산을 혹 장흥에 있는 천관산으로 부르지 않을까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도서편님! 안녕하세요.
장흥에 있는 천관산! 알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백과사전이나 향토사전등 많은 류의 우리나라 자연환경을 설명하는 곳에서는 위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관산이안 이름은 반도 땅에서 배우 흔하게 부르는 산의 이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위 본문에서 말하는 관산은 바닷가에 있는 세 산이 유명했다는 것이니 만큼 반도에 있었던 산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더구나 그 세개의 산에는 부처와 관련된 유적이 많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도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도서편님의 성원과 관심에, 늘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한반도 금강 이남 분들이 자신들이 호남인인냥 착각을 하고 있죠? 황산벌에서 백제의 마지막 전쟁을 겨우 5,000 명의 군사로 했다는 엉뚱한 얘기도...중국은 그보다 400년 전에 오나라 촉나라 위나라가 수십만씩 서로 동원하여 전쟁을 했다고 뻥뻥뻥을 치는데...호남지역인 촉에서 오나라를 밤을 새워 달려 다니며 싸웠다는 전쟁역사라는 중국 삼국지는 귀신들의 전쟁? 이제는 누군가 어떤 자료가 있다카더라가 아니라 하나하나 퍼즐 맞추기를 하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작업들을 해야 할때가 아닌가 싶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