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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혈액질환에서 사이톡산과 전신 방사선 조사 전 처치를 이용한 동종 골수 이식 치료동의서',
'악성 혈액질환에서 부썰판과 사이톡산 전처치를 이용한 동종 골수 이식 치료동의서'.
골수 이식에 대한 의학적 배경, 치료 과정, 위험성과 부작용, 주치의 의견, 환자 및
가족의 동의 등이 여러 장에 걸쳐 빼곡이 적혀 있는 두 종류의 동의서였다.
이식에 앞서 본격적인 전 처지 과정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신 방사선 조사와 고용량의 항암제 투여로 악성 세포를 완전히 제거,
새로운 골수 세포가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
이식 거부반응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병행될 것이다.
그는 동의서의 추가적인 위험에 대한 경고를 읽고 또 읽었다.
이식된 골수가 기능을 못할 경우 때로는 치명적인 수 있음.
이식 후 거부반응인 이식편대 숙주질환은 경미한 경우에서 심각한 경우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
신장, 간, 폐, 뇌 등의 장기 기능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음.
정맥폐쇄성 질환의 경우 심각한 상태를 초래할 수 있음.
전신 방사선 치료가 불임을 유발할 수 있음.
보호자로서 치료의 결과와 치료 기간중 발생할 수 있는 여하한 합병증에 대해
주치의와 병원에 법률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마쳤다.
내일 오전중으로 아이는 소아병동에서 이식센터로 옮겨 전 처치과정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예치금 2천만 원을 완납해야 할 일이 남았다.
그는 한 시간째 원무과 송 계장의 책상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상전의 선처를 바라는 종놈 꼴로 예치금 연기를 애원했다.
그러나 송 계장은 한 시간의 대부분을 전화를 받거나 자리를 비우거나 동료들과 잡담으로 보내며,
이따금씩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다.
"참 답답하시네. 글쎄,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깐요."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출발부터 헛딛고 비틀거리고 헉헉대고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결국 홍 사장의 기획 의도에 맞춘 시를 썼다.
시상을 떠올리고 그걸 언어라는 도구로 토해낼 때마다,
발가벗고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모멸감으로 영혼은 진저리를 쳤다.
한 편을 완성키 위해 몇 달 동안 끙끙대며 씨름하던 옛날이었다.
그럼에도 열네 편의 시를 단 며칠 만에 쓴답시고 썼다.
아니, 써갈겼다. 게으름을 부릴 여유도 없었고,
스스로의 비참한 모습을 재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까닭이기도 했다.
홍 사장은 오전중으로 매절 인세 1천만 원을 지급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은행 마감 시간까지 입금되지 않았다. 삼십 분 간격으로 출판사에 전화를 했고,
홍 사장은 번번이 부재중이었다.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송 게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종놈이 상전의 처사를 두고 뭐랄 수는 없으므로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송 계장은 모임을 알리는 전화를 걸고 있었고, 군대 동기생들의 모임이었고,
그 군대가 바로 해병대였다.
그는 송 계장이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물었다.
"몇 기죠?"
눈치 빠른 송 계장이 재빨리 되물었다.
"선생님도 해병대 출신이신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송 계장은 사뭇 긴장된 목소리로 자신의 해병대 기수를 밝힌 뒤 그의 기수를 물었다.
시쳇말로 서울역에서 앞으로 나란히, 하면
포항 오천 앞바다에 가서 빠져 죽을 만큼 까마득한 아래의 송 계장이었다.
"어디에서 근무하셨죠?"
그가 백령도라고 대꾸하였고 송 계장의 입에서 어,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백령도 수색대에 있었습니다만..."
그 역시 그랬다. 해병, 그것도 가장 고되다는 수색대 출신이라는 인연에
송 계장은 놀랍고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송 계장이 동의를 구하지 않고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지체 없이 송 계장의 뒤를 좇았다.
로비 자판기 앞에 다다르자 송 계장이 동전을 투입해 커피 두 잔을 뽑았다.
그들은 커피를 나눠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창 밖 어스름이 갈리기 시작한 세상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침묵을 밀어낸 쪽은 송 계장이었다.
"선배님인지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천만에요. 선배로서 떳떳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선배님."
보호자를 주눅들게 만들던 원무과 직원이 졸지에 공손한 후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해병 수색대 출신이라는 이유가 서로의 아득한 거리를 훌쩍 줄여놓은 셈이었다.
타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들로선 당연한 친밀감의 표시며 감정의 교류였다.
한 기수만 높아도 곧바로 하나님과 동기동창으로 알아 모시는 해병대.
제대 후 수십 년이 지나도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임을 이마의 표적처럼 달고 사는 놀라운 결집력.
해병대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첫 대면에서부터 상하가 명확히 구분되는 기이한 추억의 집단.
그들은 한동안 수색대 이야기에 열중했다. 신물나도록 바다를 노려보며 보낸 백령도에서의 3년.
얻어터지지 않고는 불안해서 도저히 잠들 수 없던 쫄따구의 심정,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받았던 혹독한 IBS훈련,
만고강산 할랑할랑 지냈을수록 자랑거리가 되는 고참 시절,
진촌리 쌍과부집에서 군화에 따라 마시던 말술의 기억...
그러다 문득 현실과 돌아왔고, 그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런 말하기가 더 힘들어. 내일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될 모양이야.
이번 치료가 아이로선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 송 계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어. 날 좀 도와줘."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내일 계획대로 이식센터에 입원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마워, 진심으로 당장 예치금 전부를 마련할 수는 없어.
절반쯤은 내일이나 모레까지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원무과 직원으로 선배님을 만나왔습니다만, 내심 참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무과에 있다 보니 별별 사람을 다 만납니다. 몇 차례씩이나 정산 기일을 넘기고도
오히려 당당하게 큰소리 치는 사람, 무조건 봐달라며 울고불고 하소연하는 사람,
우리에게 방법을 마련해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이 부지기수죠...
어쨌든 선배님을 믿고 보증을 서는 겁니다."
그는 예치금을 마련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솔직히 밝혔다.
그의 이야기를 끝가지 묵묵히 듣고 난 후 송 계장이 물었다.
"아이가 병원에 드나든 지 얼마나 됐죠?"
"이 년이 넘었어."
"백혈병으로 이 년 넘게 투병했다...
돈을 다발로 싸놓고 사는 부자가 아닌 이상 경제적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이죠."
송 계장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덧붙여 물었다.
"이식 날짜가 얼마나 남았습니까?"
"치료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삼주 뒤가 될 거라고 하더군."
"삼주라, 삼주라... 젠장, 예치금도 예치금이지만 앞으로도 더 걱정이군요.
방법은 마련해두셨나요?"
그는 빙그레 웃고 말했다. 즉시로 송 계장이 그의 웃음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저를 원무과 직원이 아니라 후배를 생각하고, 있는 대로만 말씀 해주세요."
"아직은 없어. 하지만 걱정 마. 이 년을 버텨왔는데 설마 삼주 정도 못 견디겠어?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는 송 계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퇴근해야지. 만나서 반가웠어. 여러 모로 마음써줘서 고맙구."
이식센터 입원 첫날, 아내는 떠났다.
이식센터 입원을 예치금 완납으로 이해한 탓일까. 아침까지도 출국의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홀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터전인 프랑스로 날아갔다.
놀기에 정신 팔렸던 아이가 밤이 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허겁지겁 집으로 줄달음을 치듯.
예치금 마련으로 진종일 헤매다 돌아온 그에게 아이가 쪽지를 건넸다.
전화번호와 마음이 변하면 연락하라는 메모였다.
아내는 작별의 인사조차 생략하고픈 모양이었다.
아이 문제로 언성을 높인 이후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던 아내였다.
그는 담담한 심정으로 아내의 떠남을 받아들였다.
아내와 세월이 그를 단련시킨 결과였다.
문제는 아이였다. 아이가 엄마로 인해 또다시 상처받았다며,
그래서 행여 투병 의지가 꺾었다면 그건 큰일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떠나서 많이 섭섭하겠구나?"
"아뇨, 엄마는 원래 그렇잖아요."
"엄마 없어도 힘낼 수 있겠어?"
"당연하죠. 아빠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아이는 태연하게 대꾸하면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의 태연함을 마냥 다행으로 여길 수 없었다. 어쨌든 아내는 아이의 엄마였고,
삶의 고단한 순간 눈감고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위로가 되는 것이 어머니의 존재였다.
그는 잠든 아이를 뒤로 하고 병신을 빠져나와 원무과로 향했다.
이식센터에서의 치료가 시작된 지 사흘이 흘러갔다. 내일부터 방사선 치료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예치금을 문제 삼아 치료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그랬다.
결국 송 계장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홍 사장은 차일피일 인세 지급을 미루고 있었다.
맥놓고 처분만을 기다릴 수 없기에 이곳저곳 기웃거렸지만 결과는 매번 허망했고,
자신의 무능함을 거듭 확인할 뿐이었다.
문득문득 예치금을 끝내 마련하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마음이 변하면 연락하라던 아내의 메모를 떠올리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아이에 대한 사랑을 앞세워 자신이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차라리 아이의 양육을 아내에게 맡기는 편이 옳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영영 잃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아내의 의도 자체가 불순하다.
아이의 재능에 따라 어머니의 사랑이 부풀어오르거나 축소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어머니로서의 준비가 덜 돼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모정은 잠시일 뿐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터였다.
아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있는 냉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아이가 머나먼 이국 땅에서 기댈 곳 없이 홀로 울게 되리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설혹 그 지경에 도달한대도 아직은 맞서 싸워야 할 현실이었다.
그는 원무과 주위를 서성이다 마침 문을 밀고 나오는 송 계장을 불러세웠다.
"바쁘지 않다면 우리 차 한잔 할까?"
송 계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왕이면 좋은 데 가서 마시자며 병원 밖으로 그를 이끌었다.
전망 좋은 창가에 앉아 신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약속한 날이 어제인데 아직 돈을 구하지 못했어. 나 때문에 많이 곤란하지?"
"조금은요."
"받기로 약속한 돈이 자꾸만 미뤄지네. 어쨌든 면목이 없어. 며칠만 시간을 더 줄 수 없을까?"
"할 수 없죠. 하지만 제가 보기엔 선배님은 남한테 절대로 아쉬운 소리 할 사람이 못됩니다. 틀렸나요?"
"이제까지 송 계장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왔잖아."
"받기로 한 돈이 천만 원이라고 하셨는데, 나머지 천만 원은 어쩔 셈인가요?"
"이리저리 융통해봐야지."
주문한 커피가 도달하자 송 계장은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커피를 마셨다.
진종일 추적추적 내린 어제의 비로 하늘은 말갛게 씻겨 있었고, 가을은 부쩍 깊어졌다.
선배님, 불러놓고 머뭇대던 송 계장이 말했다.
"며칠 정도야 그럭저럭 넘어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서둘러 완납하지 않으면 저도 더 이상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고액의 치료비가 드는 환자는 저 말고도 예의주시하는 사람이 많아요.
병원도 따지고 보면 장사 아닙니까.
치료비를 건질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결국 치료를 중단할 겁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요? 없는 돈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나요? "
"제가 원무과 직원이라서, 선배님 편의를 봐줘 문책이라도 당할까봐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걱정되고 답답해서 그래요. 차라리 저한테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솔직히 물으시든지요."
송 계장이 깍지를 껴 턱을 올려놓고 그를 오 초쯤 응시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왜 다시 이런 일에 끼어드는지 모르겠어. 송 계장은 혼잣말을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선배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오해 말고 들으세요.
사촌형님 한 분이 있어요. 공작기계 다루는 일을 했는데 그만 손가락이 뭉텅 잘리는 바람에
지금은 상가 경비원으로 겨우겨우 먹고 살아요.
그런데 딸애가 지난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우리 병원에 입원했어요.
당장 수술을 받아야겠는데 수술비 마련할 길이 막막한 겁니다."
"하루는 형님이 몸뚱이를 팔기로 했다고 말하더군요.
병원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장기 알선 스티커를 보고 연락을 했더니
신장을 사겠다고 했다나요. 사기라고 말렸죠.
한데 이 형님이 도대체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아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니 오죽했겠어요. 도리없이 제가 나섰습니다.
여기저기 병원일 보는 친구들한테 연락을 취했어요.
장기 매매가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들을 통하면 적어도 사기당할 염려는 없으니까요."
장황한 이야기 속에 담긴 송 계장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생면부지의 아이에게 자신의 골수를 나눠주겠다는 일본인 처녀의 결심을,
그는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여왔다.
자신의 몸의 일부로 타인의 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것만큼 숭고한 희생이 있을까.
그러나 돈이 개입되는 순간 숭고한 희생이 아닌, 비도덕적이며 반인류적인 행위가 되고 마는 셈이었다.
비난받아 마땅한 줄 알면서도 그는 차마 외면키 어려웠다. 아이를 구할 수 있다면,
몸뚱이를 내다 파는 것보다 백번 천번 더 심한 짓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물었다.
"그 신장 매매라는 게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사촌 형님은 삼천을 받았습니다."
3천만 원. 그리고 홍 사장에게서 받기로 한 1천만 원.송 계장이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마치 브로커가 된 기분입니다. 선배님과의 인연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치료비 마련할 것이 정히 없다면, 최후의 방법으로 고려해보시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돈벼락을 맞지 않는다면, 은행을 털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면, 현재로선 최후이자 최선의 방법이었다.
단순히 생각하자며 그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또 격려했다.
콩팥. 하나를 떼어낸대도 정상적인 삶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창조주의 인간의 몸뚱이에 허락한 유일한 여유분. 그 여유분으로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고민하고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었고,
재빨리 손을 내밀어 붙잡아야 할 기회였다.
첫댓글 아이를 살리기위해 아빠의 신장을 팔아야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