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6 주일설교
본문: 시편 1:1-4
제목: 성경과 복
1.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성경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한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절)
‘율법’은 구약에서 원래 모세오경을 가리켰지만,
성경의 경전이 완성된 다음에는 전체 성경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성경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성경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벌써부터 복 없는 사람이다.
교회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교회의 직분이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오직 성경을 즐거워하지 않고 다른 것을 즐거워한다면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성경을 즐거워한다고 했지, 율법조문 교리조문 신조 신학지식을 즐거워한다고 하지 않았다.
즐거워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성경이고 말씀이어야 한다.
그 말씀을 순수한 그대로 단순한 그대로 즐거워하여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 그들이 세운 초대교회들, 이 전통을 이어받은 발도인들,
그들은 정말로 성경을 단순하고 순수한 그대로 즐거워하여 순종하고 실천하였다.
성경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괴로워하게 만드는 자들이 항상 있어 왔다.
교회를 망치는 것은 항상 성경을 괴롭게 만드는 율법쟁이들, 교리쟁이들, 철학쟁이들이다.
그들은 그 율법 지식으로 교리 지식으로 신조들로 신학지식으로 성경을 괴로워하게 만든다.
그 대신 그들은 그 지식으로 교회 권력 쥐고 부와 명예를 차지한다.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생활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여 어둠과 혼란에 빠지게 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사랑한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자들이요, 뱀들이요 독사의 새끼들이다.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이다.
성경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괴로워하게 하는 뱀의 후손들이다.
교회는 교리나 율법 조문을 가르치는 곳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시대마다 속아 왔다.
개혁교회처럼 교리나 읊어대고 현대교회처럼 철학조문이나 읊어대는 곳이 아니예요.
그것은 바라새인이 율법조문을 읊어대고 사두개인이 철학조문을 읊어댄 것의 변형일 뿐이다.
교회는 삶을 가르치는 곳이다. 사랑과 믿음의 삶이다. 가르쳐 지키게 하는 곳이다.
이웃 사랑의 실천들이 넘쳐나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게 헤서 온 율법을 곧 온 성경을 완성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온 율법을 완성하는 곳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으로 실천한다.
율법조문 교리조문 신학지식들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도 사람의 지혜와 학문으로 할 수 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멀리 떠나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할 뿐이다.
율법 조문 교리조문으로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지옥 자식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이웃 사랑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초대교회의 실상은 하나님 사랑으로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이웃 사랑의 모범이었다.
발도인들의 긴 역사는, 로마교회보다 더 긴 역사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으로 실천하는 모범의 역사였다.
그 매력에 이끌리어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급속한 교회 성장과 르네상스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교회라면서 온 율법의 완성인 이웃 사랑의 실천은 없고,
사람의 지혜로 하는 설교, 교리의 가르침으로, 종교적인 의식과 행사로만 가득하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고 바리새인의 집이요, 장사하는 집이요,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
‘묵상’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국어의 뜻)과는 다르다.
히브리어 ‘묵상’(하가)은 ‘중얼거리다’, ‘신음소리를 내다’의 의미이다.
또 ‘하가’는 ‘먹이를 움켜 잡고 으르렁대며 씹듯이 중얼거리는 사자와 같이
말씀을 씹고 읊조리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영이요 생명이다.
딱딱한 말씀을 씹듯이 읊조리며 계속 중얼거릴 때, 주야로 묵상할 때,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리가 영과 생명으로 새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영과 생명이 새어 나올 때 계시가 풀린다. 그 계시가 곧 영의 생각이다.
조용히 사색하듯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아’만 더 강화시킬 뿐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아가 강한 이유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이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하여 나의 ‘영’을 강화시켜야 한다.
같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노라면, 전에 몰랐던 새로운 의미를 주시고,
자료를 찾아보게 하시고 자료를 통해 알게 하시기도 한다.
설교는 본문을 받아 씹고 읊조리는 가운데 영과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초대교회는 올곧은 신앙과 변화된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발도인교회는 올곧은 신앙과 변화된 삶으로 전 유럽을 변화시켰다.
새언약교회도 올곧은 신앙과 이웃 사랑이 넘치는 삶으로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2.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모든 일이 다 형통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복 있는 사람이 받을 복이 어느 정도인지 말씀해 주고 있다.
자기의 손때 묻은 성경과 찬송가를 사랑하시라.
경건서적들도 참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한 사람들이 쓴 것만을 엄선하기 바란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한다는 것은 약속이고 보장이다.
광야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경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가운데 변화와 성숙이 있어야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광야 훈련과 연단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넜어도, 변화가 없으면 광야에서 멸망한다.
요단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넜어도, 변화가 없으면 가나안에서 멸망한다.
믿기만 하면,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는 급탕주의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신다.
그렇지만,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신다.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게 하시지만,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게 하시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
박해를 받게도 하시지만,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게도 하시지만, 망하지 아니함을 경험하게 하신다.
이렇게 항상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도 자족하기를 배우기 원하신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기 원하신다.
그런 연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신다.
모세 광야 40년이 없었다면, 능력과 기적의 40년도 없다.
다윗의 아둘람 굴 고난, 시글락 고난이 없었다면, 헤브론 왕권의 복도 없다.
요셉의 노예, 감옥살이 없었다면, 애굽 총리의 복도 없다.
아브라함의 25년의 기다림과 이삭을 재물로 드림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복도 없다.
긴 광야생활과 연단을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다.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시대는 말씀을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여 살게 하는 시대이다.
마침내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모든 일이 형통하게 하시는 그 날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며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아야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 보아 알고,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3. 악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꾀를 따르며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성경을 즐거워하지 못하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지 못하니까
자기들의 꾀를 따라 살게 마련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자기 의를 내세우며 그것을 따라 산다.
무엇을 따라 사느냐가 갈 길과 앉을 자리를 결정하게 된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면 사망과 멸망을 맞게 된다. 심판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영의 생각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을 맞게 된다. 하는 모든 일이 형통을 이루게 된다.
오직 성경을 즐거워하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기록한 대로 지켜 행하는 것 말고는
달리 소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온 성경은 이웃 사랑으로만 완성할 수 있다.
믿음은 곧 행함이요 곧 삶이라는 등식을 우리의 행동강령으로 삼아야 한다.
오직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 그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오직 강하고 담대하여 이 성경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자.
말씀을 씹고 읊조리며 중얼거리며 그 말씀이 생명과 영이 되어
우리 이성과 감정을 지배하게 하자.
그리하여 마침내는 복을 받고,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는 우리가 되자.
그것이 바로 헤브론에 오르는 것이고, 보배롭고 위대한 성경도 사명을 감당하고, 이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