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인 로마서 3:2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말은 헬라어 “피스티스 크리스투(pistis Christou)”로서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뜻입니다. 이 표현이 성경에서 7번 쓰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할 때 이 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신학자 간에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둘째, 예수 자신의 믿음, 즉 그분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볼 것인가? 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견해는 첫째입니다. 하지만 첫째를 할 것인가? 둘째를 할 것인가? 문법적, 언어학적으로 해결 불가능합니다. 어떤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즉, 기독론적으로 쓰였는가? 아니면 구원론적으로 쓰였는가? 입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목적격, 소격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와 부활)를 믿음으로”의 의미입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주격, 소격으로 이해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가지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먼저 로마서 3:22절을 원문대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원문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디카이오쉬네 쎄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우스 예수 크리스투) 모든 믿는 자들에게(에이스 판타스 투스 피스튜온타스)”입니다.
이 중 한글 번역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곳은 두 번째 구문인 “디아 피스테우스 예수 크리스투”입니다.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가 되는 원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로 번역하였습니다.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이 주격적 소유격 구조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번역은 무엇이 문제인가? 원문을 자세히 보면 첫 줄에는 하나님, 둘째 줄에는 예수 그리스도, 셋째 줄에는 우리의 역할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구원(복음)의 사건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세 주체와 각각의 역할이 명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줄의 주체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번역하면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가 됩니다. 복음의 구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제거해 버리는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구문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믿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둘째, 이때 피스티스를 "믿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최선의 번역은 아닙니다. "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실함" 곧 그의 십자가 순종을 통하여(마태복음 26:39)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헬라어 원문은 이렇게 번역할 때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실함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셋째, 당시 사회에서 피스티스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당시에 피스티스는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끊어준 어음에 대해 부도내지 않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친구가 곤란에 처했을 때 모른 체 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군인이나 노예 혹은 누구라도 맡겨진 임무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항복한 나라의 국민을 죽이지 않는 것이 피스티스이고, 종주국 관계에서는 그 관계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이렇게 인간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사용된 단어가 피스티스인데, 중요한 것은 어떤 진술을 내가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뜻으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피스티스는 기본적으로 생각이 아니라, 행동과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피스티스에 대한 적절한 번역인 신실, 신의, 신뢰, 충성은 생각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입니다.
누군가가 피스티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맡겨진 일, 맺은 약속이나 관계에 충실한 모습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십니다"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는 진술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 의롭게 됨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입니다. 우리가 구원,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와 구원의 근거가 아닙니다. 분명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그러나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능력으로 죄의 지배를 무너뜨렸지만, 우리가 그것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죄의 지배가 좋다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게 되지 않는가? 우리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그 사건이 비로소 나를 위한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에 관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우리 삶에 주님이 되시게 하시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의 용어로 다시 설명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지배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미 구원의 사건이 거기에서 이루어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제안하십니다. 나는 너의 주가 되기를 원한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 언약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주 사이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 관계가 시작됨에 불과합니다. 언약이 시작되면 이제는 계속해서 그 언약에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중사랑 계명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영접)과, 둘째 예수님의 주되심이 우리 삶에 계속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삶을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편에서 우리의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구원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 주되심을 더욱더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단지 지적인 고백이나 동의가 아닙니다. 실천이며 순종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와 이유가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으로서 아버지 노릇해 주심, 즉 십자가에서 죽으심, 그의 신실함에 우리의 구원의 이유와 근거가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 그 십자가의 사건을 믿을 때, 그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됩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구원의 시작입니다. 우리 편에서 우리가 우리 노릇, 즉 신실함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이 우리 삶 속에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중사랑 계명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