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정태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태도불량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선수와 학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1953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으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각각 독립된 여러 국가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경제적 실체로 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전대륙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3년 그는 과테말라로 갔다. 그곳에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이때 게바라에게 '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말할 때 흔히 붙이는 감탄사의 하나임).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미국이 진보적인 좌익정부에 반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고, 그곳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났다. 카스트로 형제는 그때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11월말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州)에
상륙했다. 그 군대는 상륙 즉시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그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 산맥에
이르렀는데, 그후 그곳이 게릴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신병을 모집해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카스트로가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이 되었고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싸움에 2년이나 참여했는데,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Pasajes de la guerra revolucionaria〉(1963)에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959년 1월 2일, 승리한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후,
쿠바 시민이 되었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서도 유능한 인사였으며 쿠바를 대표하는 산업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에도
나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의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는데, 그때의 저술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쿠바식의 공산주의를 혁명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El socialismo y el hombre en
Cuba〉(1965)와 게릴라전의 교본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rillas〉(1960)이다. 1965년
4월 이후 공적인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후 2년간 그의 활동과 거처는 비밀에 붙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1966년 가을,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했다. 1967년 10월
8일 이 부대는 볼리비아 육군 특별파견대에 의하여 전멸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했다.
ㆍ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지금 이 시간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오른다네, 자네를 마리아 안토니아 집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자네가 나에게 자네 그룹에 합류하기를 청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우리가 자기의 죽음을 대비해 누구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지를 미리
말했을 때, 이 가능성은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나타났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로 현실임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혁명을 할 때-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면-우리가 승리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 말일세. 실제로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에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가.
내가 기쁨과 고통이 교직하는 가운데 떠난다는 걸 이해해 주게. 나는 여기에 건설자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희망을, 내가
사랑하는 자들의 가장 사랑하는 부분을 남겨두고 가네. 나를 아들로 받아준 인민의 곁을 떠나네. 내 정신의 한쪽을 남겨두겠네. 새로운 전장에서
자네가 나에게 심어준 믿음을 간직하겠네. 우리 인민의 혁명의식과 내 의무의 가장 고결한 부분을 완수한다는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간직하겠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그곳에 이들이 모두 함께할 것이네. 내 아픔을 쉽게 치유하고 위로하는 바는 이것뿐일세.
자네에게, 인민에게 할말이 많았는데, 그것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어찌 말로써 다하겠는가. 종이만
더럽힐 뿐이겠지.
짧은 쿠바 혁명적인 역사 - Fidel Castro의 연설을 포함하여 -
Che의 연설"제국주의의 beastiality - 아무 한계도." 알지 않으며는 beastiality
돼지의 만"모든 압박된 사람들을 위한 상징"
Fidel Castro 이른 영상아주 Fidel 이른 혁명적인 Castro 연설의 영상을 pixelated
쿠바 혁명
쿠바에 있는 노동절
(MUSICA) Nathalie Cardone - Hasta Siempre
(MUSICA) Nathalie Cardone - Hasta Siempre 가사 번역
우리는 당신의 용기가 죽음을 멈칫하게 만든 그 역사적 순간부터 당신을 흠모한다는것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리의 지도자 체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성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강하고 역사속에서 승리를 장담하는손은 산타클라라 계곡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깨어난 그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우리의 지도자 체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심오한 투명성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빛나는 깃발을 꽂기 위하여 당신은 봄날의 햇살로 산들바람을 태우며 옵니다. 우리의 지도자 체게바라여! 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투명함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혁명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의 너무나도 단단한 해방의 가슴은 당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세계로 향합니다. 우리의 지도자 체게바라여!여기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인듯 우리는 여기서 전진합니다. 피델과 함께 당신에게 선언합니다: 당신은 우리의영원한 지도자라고 우리의 지도자 체게바라여! 당신의 존재가 갖는 선명하고 깊은 투명함이 남아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