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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으로 성공하기 위해… 15분 단위로 시간 쪼개 관리
(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의 내 인생의 '15분')
일과 가정 둘 다 잘 해내려고
자투리 시간도 빈틈없이 채워
아이들과의 시간은 짧더라도
최대한 집중해서 대화하고 교감
"실패는 해도 후회없는 삶을 위해
15분 시간 관리로 매 순간 최선"
"준비하고 빨리 나가자. 미리 도착해야 한다."
제지(製紙) 공장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항상 시간 엄수에 철저하셨고 준비성이 대단하셨다.
어릴 적, 기차가 유일한 장거리 여행 수단이었을 때
가족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항상 1시간 전에 기차역에 도착해야 했다.
하루 전날 준비는 당연했다. 이런 아버지를 보며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 시험공부 하다가 졸릴 때면 책상 위에
'아빠, ○시에 깨워줘'라고 쪽지를 남기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면 새벽 3시가 됐건, 4시가 됐건 아버지는
칼같이 쪽지에 적은 시간에 나를 깨워주셨다.
아버지가 철저한 시간 관리를 몸소 실천해 보이신 덕분일까.
나도 학창 시절부터 시간에 대한 개념이 투철했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지금은 약속이 있으면
꼭 20분 전에는 도착해야 맘이 편하고 주말 시간도 소중하게 쪼개어 쓴다.
'부전여전'인 것 같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하고 체이스맨해튼은행에 취직했다.
여성이 일한다는 것에 상당한 편견이 있는 데다가
전공(영문학)과는 다른 금융회사에 취직하다 보니 생소한 것이 너무 많았다.
상사들을 보니 대부분이 상과대학을 나온 남자였다.
남들보다 2~3배 더 노력하지 않으면 '그냥 그런 여직원'으로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15분' 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15분 단위로 쪼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미 결혼을 한 터라 가정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시간이 더 필요하다 보니 자투리 시간이 소중했다.
그래서 시간 조정이 어려운 일정을 먼저 넣고, 그다음 중요한 일정을 넣고,
그런 다음 남은 자투리 시간도 빈틈없이 채워서 관리했다.
그러다 보니 15분 단위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관리하기 좋았다.
1986년 크라커내셔널은행 근무 시 경영대학원(MBA)을
다니기 시작했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서였다.
직장인, 아내, 아이 둘의 엄마, 그리고 매년 7번의 제사를 치르는 종부(宗婦) 역할까지….
거기에 자의(自意)로 학생 신분도 더 얹었으니 1인 5역을 해야 했다.
직장 생활과 학교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던 그해 겨울
사고가 터졌다.
그날은 퇴근이 늦어졌다. 미리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했는데도
아주머니는 교회를 꼭 가야 한다며 덜커덕 아이를 관리실에 맡기고 가버렸다.
야근을 마치고 종종걸음 치며 아파트로 들어서는데 관리실에는
'순찰 중'이라는 팻말만 있고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네 살배기 둘째는 눈만 말똥거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로 옆 난로 위 주전자에선 물이 펄펄 끓었다.
'아이가 주전자에 손을 대기라도 했다면….' 억장이 무너졌다.
시간을 잘 관리하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
나였지만
가족에 관한 일만큼은 '시간 쪼개기'의 논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두 가지 다 계속해요. 대신 내가 도와줄게."
남편의 따뜻한 말에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포기다'라는 생각으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어떻게 잘 관리할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아이와의 시간은 짧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아이에게만 집중하는
'퀄리티 타임(quality time)'으로 보내보기로 했다.
우선 퇴근을 하면 아이들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물어보고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다.
주말여행을 다니며 추억을 가급적 많이 쌓으려고도 했다.
틈이 나는 대로 "엄마가 일은 하지만 언제나 너희가 가장 먼저다"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니 아이들의 만족감도 조금씩 높아지는 게 보였다.
2002년 초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또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남편은 내 인생의 멘토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2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에 하루하루 매 초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남편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더니 남편은 "나도 암에 절대 굴복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하던 일 계속해서 꿈을 놓치지 마라"며 만류했다.
그런 남편의 응원과 격려는 큰 용기가 되었다.
낮에는 어렵지만 일에만 신경 쓰려고 노력했고,
퇴근 후에는 남편에게 모든 시간을 쏟았다.
나는 남편 투병 5년 6개월 동안 매일 시간을 내어 남편과 함께
양재천(서울 강남구 소재 한강의 지천)을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고 위대했던 시간이었다.
남편은 의사가 말한 2년보다 3년 6개월을 더 견디어 주었다.
영원하지 않은 인생이기에 중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곳에 무게를 두는
시간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지금도 나는 자투리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영어 공부다.
영문과를 나왔고, 미국에서도 생활하고,
외국계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원어민이 아닌지라 늘 한계에 부딪힌다.
꾸준히 쓰지 않으면 표가 금방 나는 것이 영어다.
그래서 요즘도 15분 단위로 나눈 자투리 시간에 CNN을 보고
주말에는 두 시간씩 원어민 교사를 만나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주말 시간도 6등분해서 사는 나를 보며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요?"라고 주변 사람들이 묻기도 한다.
대답은 '아니요'다. 내 신조가 '실패는 해도 후회하는 삶을 살지는 말자'인데
이런 시간 관리는 내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원동력이다.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은
푸르덴셜생명 손병옥(63) 사장은 보험 업계 최초의 여성 CEO이다.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체이스맨해튼은행 서울 지점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미들랜드은행·HSBC은행 등 외국계 은행에서 20여년을 일하다가
남편(고〈故〉 이석영 전 중소기업청장)의 미국 발령으로 3년 동안 일터를 떠났다.
1996년 푸르덴셜생명 인사 담당 부장으로 돌아오면서
단절된 경력을 잇는 데 성공했고, 2003년 부사장에 이어 2011년 CEO가 됐다.
"배우니까(學而時習) 청춘이다"
사회란 숲 읽으려면 독서는 필수
취업위한 단계적 학습보단
삶의 방향 맞춘 실사구시형으로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알아야
"요즘처럼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지식과 정보의 수명은 3년밖에 안 된다.
직업인으로 살아남으려면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100권이 넘는 저서를 낸 '자기 계발 전도사'
공병호(54·공병호경영연구소장)씨가 20대 직장인에게 주는 충고다.
초등학교 때부터 16년간 공부에 매달려 살다가 갓 대학 문을 나선 새내기 직장인에게 "
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가혹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명 100세 시대'를 살아갈 20대들에게 공부는
여기(餘技)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공부의 고수(高手) 7명이 20대 직장인에게 들려주는 공부론(工夫論)은 어떤 것일까.
◇"평생 학습 시대가 왔다"
진화생물학자 최재천(60)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이젠 90세 넘게 살게 되면서 노동 인생도 60~70년으로 늘어나게 됐다.
평생 직장을 대여섯 군데 옮겨다니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고전문학 연구자 정민(53) 한양대 교수는
"공부는 평생 함께 가는 동행이다. 세상 공부는 더 살벌한 진검 승부다.
제대로 하고 똑바로 하지 않으면 뒷감당이 안 된다"고 했다.
베스트셀러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을 쓴 신정근(49)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는
"대학 전공은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체를 읽어내려면 공부해야 한다.
사회에서 만나는 건, 나무가 아니라 숲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을 펴낸
황병기(78)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공부 예찬론자'다.
"자기 계발을 통해 창의력을 키우고 교양을 쌓기 위한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기쁨이다.
공자의 말씀이 딱 맞다. '논어' 첫 구절이 배움의 기쁨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강상중(64) 일본 세이가쿠인(聖學院) 대학
교수는
"세계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평생 배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공부의 방향은
공병호 소장은 가치 창출에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실사구시형 학습법을 내건다.
"범용형(汎用型) 공부는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자기 경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단기·중기·장기 지식을 조준해서 공부해야 한다."
정민 교수는 "방향을 잡아야 목표가 나온다.
방향을 못 잡으면 열심히 할수록 목표에서 멀어질 수 있다.
방향을 제대로 잡으려면 문제를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덕환(60)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스스로 반론을 제기하는,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생각을 갖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취업을 위해 빡세게 공부하고 일단 목표를 달성하면 책을 덮는 건 낡은 공부법이다.
'공부는 나의 삶'이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즐기면서 공부하는 방법이 필요하다"(최재천 교수)거나
"씹어먹는 공부를 하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공부를 해야 한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공부해야 한다"(신정근 교수)는 의견도 나왔다.
◇"공부 비결, 이 책 안에
있다"
최재천 교수는 "독서를 통한 자기 학습의 방법론이 다양하게 소개돼 있다"며
정민 한양대 교수가 쓴 '오직 독서뿐'을,
황병기 교수는 "공부는 자기 완성을 위해 한다는 방법론을 정확히 짚었다"며 '논어'를 추천했다.
'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를 고른 공병호 소장은
"드러커는 1년에 3개월씩 새로운 주제를 정해 공부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하고,
지적 호기심을 유지하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정민 교수는 "생각을 간추리는 데 효과적"이라며
일본 언어학자 도야마 시게히코의 '사고정리학'을 추천했다.
강상중 교수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이덕환 교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신정근 교수는 '김영민의 공부론'을 들었다.
[공부에 소질없다 자책마라, 다산은 꾸준함을 응원했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중국 송나라 학자 주희(朱熹)가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권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당부한 글이다.
동아시아에서 '권학문(勸學文)'의 전통은 유구하다.
당나라 학자 한유(韓愈)는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는 애초에 같았으나
배움의 힘에 따라 마침내 길을 달리한다"고 했고,
시인 백낙천(白樂天)은 "밭이 있어도 갈지 않으면 창고가 비고,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어진다"고 배움을 권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공부에 소질이 없다고 자책하는
제자에게
"외우기를 빨리하면 소홀하게 되고, 글짓기를 빨리하면 부실하게 되고,
이해를 빨리하면 거칠게 되는데 너는 그런 단점이 없구나"라며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일본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저서 '학문을 권함'은 일본의 근대를 이끈 책으로 유명하다.
"서울대학교 합격자 생활수기 공모작"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지퍼가 고장난 검은 가방 그리고 색바랜 옷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좌판에 돌아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 날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엾은 나의
엄마를 위해서......
과일 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 들렀는데
여학생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날따라
절룩거리며 그들 앞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구석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측은해
보일까봐,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까봐
주머니 속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흰 연습장 위에 이렇게 적었다.
어둠은 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에서 다시 밝아질 것이다.
이제 내게 남은건 굽이굽이 고개 넘어
풀꽃과 함께 누워계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꽃등처럼 환히 나를 깨어 준
엄마와 형에게 사랑을 되갚는 일이다.
지금 형은 집안 일을 도우면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한시간씩 큰소리로 더듬더듬 책을 읽어 가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채.
오늘도 나는
온종일 형을 도와 과일 상자를 나르고 밤이 되서야
일을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문득 앙드레 말로의 말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는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생선회 이야기"
회(膾)는,물고기나 고기를 날것으로 먹기위해
살을 얇게 뜨거나 잘게 썰어놓은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생선회와 육회다.
일본어 ‘사시미-刺身’ 가
순화된것이 생선회 이며,
생선회는 싱싱한 물고기, 즉 생선(生鮮)을 살만 저며
간장이나 고추장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생선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로서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지 않은 싱싱한 상태의 식용어류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생선회‘ 의 맛은 물고기의 선도(鮮度;
신선한정도) 에 크게 좌우된다고 할수 있다.
때문에 선도가 떨어진 생선은 그게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 해도 회는 칠수 없으며 쳐서도
안된다.
비위생적이기 때문이다.
생선이란 글자는 날생(生)자와 생선선(鮮)자의 합성어로서 싱싱한,
신선도가 높은 바다물고기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막 잡아올려 배의 갑판에 있는 물고기와 생선가게의
얼음위에 누워있는
물고기는 같은 종류라 해도 그 선도와 맛에서 비교자체가 안된다.
초밥으로 순화된 ‘스시’ 는,
식초,
설탕, 소금을 친 흰밥을 김이나 생선, 또는 유부등에 싸서만든 일본요리다.
생선초밥은 주먹으로 쥐었다 놓은 초밥위에 저며낸 생선살을
얹은것이다.
생선회와 생선초밥은 우리들이 즐겨먹는 음식으로서
그 형태와 요리방법으로 볼때 사시미와 스시가 뿌리라고 할수있다.
나는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과 일식집에 가는
경우 스끼야끼나 모리소바,
또는 돈부리 등을 시켜먹고 생선으로 만드는 요리는 먹지않는다.
오해가 없기위해 미리 밝혀두고 싶은것은
그 선택이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기준 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일식집에서 생선요리를 시켜먹는 사람들과의
차별화의 의도는 전혀없다.
그게 누구든 자기가 먹고싶은 음식을 주문해 먹는것은 개인의 고유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생선, 즉
바닷물고기에 대한 나의 체험을 기준할 때 아무리 최고급 일식집 이라해도
그들이 쓰는 재료-물고기는 이미 그 맛이 한참 간
것들이다.
나는 생선회와 그 맛에 대해서는 체험적인 전문가다.
무엇보다 가장 선도가 높은 싱싱한 생선회를 수도없이 먹어본
사람이다.
생선을 좋아하고, 생선회도 전문가 수준으로 칠수있다.
우럭은, 연체동물 부족류(斧足類) 진판새목의 한 과(科)에
속하는 어종으로
중부서해바다 대륙붕에서 많이 잡히는 대표적인 생선이다.
내가 배낚시로 잡았던 우럭중 가장 컸던것이 무게
3kg 짜리였다.
5호목줄에 손톱만한 가마가쯔의 찌누10호 흑침에 이놈을 걸었을때,
초보였다면 100% 놓치는 고기다.
50미터 깊이에서 물위로 끌어올려 눕히기까지 15분정도 걸렸지만
내겐 1시간30분으로 느껴졌었다.
이렇게 큰 물고기를 끌어올리려면 낚시대의 탄력을 이용해야 하는것은
물론,
낚시줄이 감겨있는 릴의 드랙을 조금씩 풀어가며
적절히 역회전시키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상당한 낚시경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큰 고기가 순간적으로 당기는 저항력은 정말 무서울
정도다.
수면에 올라와 옆으로 누운 고기를 선장이 뜰채로 떠서 갑판에 눕혀놨을때,
우리팀 모두는 벌린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30년 경력의 베테랑 바다낚시꾼들이다.
그중에는 1미터에 가까운 광어를 올린 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우럭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우럭은 버릴게 하나도 없는 맛있는 생선이다.
회로먹고, 지리나 매운탕은 물론, 내장을 꺼낸후
몸통을 쪼개 굵은 소금으로 절인후
바닷물에 씻어 배에서 말리는 ‘뱃자반’ 은 천하일미다.
내장으로는
젖까지 담그니 정말 버리는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기름이 많기 때문에 무엇을 해 먹어도 맛이그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미보다도
우럭을 더 친다.
우럭은 그렇게 맛있는 생선이다.
이제 우럭을 생선회로 먹는 얘기를 해 보자.
우럭은 그 크기가 30센티
정도의 중치가 가장 맛이좋다.
바다낚시를 하면서 그 크기를 나누어 회로 먹을것을 선별한후
양쪽귀를 찔러 그늘쪽 뱃전에 4시간정도 그대로 둔다.
그때쯤이면 피가 다 빠지고 물기도 적당히 빠져 충분히
숙성된 상태가 된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일제칼주머니의 헝겊두루마리에는
튼튼한 손잡이 하나와 서로다른 칼날이 네 개있다.
생선의 억센 비늘을 긁어내는 톱니바퀴의 날,
생선의
몸통을 쪼개는 두껍고 날카로운 칼,
껍질과 뼈로부터 살점을 갈라내 포로뜰때 쓰는 얇고 날이서있는 칼,
그리고 포로뜬 살점을 먹기좋게
썰수있는 날렵하게 생긴 칼이 그것이다.
일단 포로뜬 살점들은 깨끗한 흰색타올로 눌러 물기를 더 뺀다.
그래야 씹기가 좋고 양념을 잘
흡수하는 상태가 된다.
생선회는 그것을 씹어보면 그 회를 친 사람의 실력을 가늠해 볼수있다.
같은 살점이라 해도 맛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잡은생선의 피를 빼고 적당히 숙성시킨 다음 회를 뜨는일은 결코 쉬운게 아니다.
상당한 기간과 월사금을 바쳐야 비로서
터득할수 있는 하나의 기술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생선회를 먹을때 쓰는 양념은 두가지다.
초고추장이 그 한가지다.
분명히
말할수 있는것은, 생선회를 초고추장에 찍어먹는것은
초고추장을 먹는것이지 생선회를 먹는것은 아니다.
그건 생선으로 초고추장을 먹는것이다.
정말 제대로된
생선회를 먹으려면 기꼬망에
와사비를 풀어서 살짝 찍어먹어야 한다.
기꼬망과 와사비의 양과 비율은 개인적으로 서로 다르다.
생선회는
거기에 살짝찍어 씹어야 제맛을 알수있다.
바다내음과 함께 향내까지 느낄수 있다.
우럭, 광어, 농어, 놀래미, 망둥어의 맛을 구별해
낼수있을 정도로
예민한 맛을 즐길수 있다.
생선회를 먹는 경우 술도 그 마시는 방법이 다르다.
소주의 경우 아주 조금
입에 머금은채 잇몸과 혀를 적신다.
그리고 회 한점을 기꼬망과 와사비에 살짝찍어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다.
술을 많이 마시면서 회를
먹는것은 그 맛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생선회는 배의 갑판에서만 맛볼수 있는 희귀한 요리이기도 하다.
우럭은 기름이
많은 생선이기 때문에 지리를 만들면 기름이 많이뜬다.
그 국물의 맛은 다른것과는 비교도 할수없다.
그리고 우럭매운탕,지리와 함께 이건
전적으로 선장의 솜씨에 달렸다.
우리팀이 10여년을 타고다닌 배의 최선장은 ‘만능인’이다.
배도 잘 부리고, 낚시터를 잘 찾아냈으며,
특히 음식을 잘 만들었다.
매운탕을 끓일때는 국물을 넉넉히 잡고,나중에 따로뒀던국물로
우리들이 출출해 하는시간 거기에 라면을 넣고 끓인다.
면만 넣고 매운탕국물에 끓인 라면은 뱃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인데
정말 그 맛은 놀라울 정도다.
최선장은 우리들이 낚시하는 동안 자기도 우럭을 잡아
굵은소금으로 자반을 만들어살짝 말린다.
낚시가 끝난 저녁시간, 기름을 두른 팬에 지져낸 그 우럭자반 때문에
나는 늘 과식을 했을 정도다.
회로먹든, 탕으로 먹든, 지져먹든 그게 모두 배 위에서
바로만든 요리이기 때문에 최고의 생선맛을 볼수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식집의 생선요리를 안 먹는게 아니라
먹을수가 없는것이다.
그건 서로다른 음식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꽃게회를 먹어본 사람은 많지않을 것이다.
나도
최선장에게서 배워 알게됐다.
꽃게철이 되면 가끔 낚시에 꽃게큰놈들이 걸려서 올라온다.
조심해서 왼손으로 몸통을 뒤집어 잡은후
오른손으로 힘껏 다리를 잡아빼면
살점이 붙어있는 다리가 빠진다.
이것을 바닷물에 척하니 적셔서 입에넣고 빨면 천하일미다.
게장이나
꽃게탕은 저리가라다.
그래서 꽃게회는 오직 바다낚시꾼만이 먹을수 있는 특식이기도 하다.
다리를 다 빼먹은 몸통은 배의 엔진에 연결된
굴뚝옆에 놔둔다.
한참 낚시를 하다 가 보면 적당히 익어있다.
그 따끈따끈한 몸통을 쪼갠후 바닷물을 살살 뿌리며
파먹어보라.
기가막히다는 말은 이럴때 쓰는것이다.
꽃게는 그 신선도가 가장 빨리 떨어지는 갑각류다.
따라서 막잡은 꽃게를 배에서
먹는다는것은 최고의 맛을 즐긴다는 의미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베테랑바다낚시꾼인 내게있어
일식집의 생선요리들은 이미 그 맛이 한참 간 것들이다.
그래서 못먹는것이다.
어항속에서 영양실조에
걸린것이나, 사료와 항생제로 양식된 것들은 더 맛이없다.
그건 생선-싱싱한 바닷고기가 아니다.
우리팀은 거의 10여년을 함께
같은배를 타고 낚시를 했다.
한번 출조(出釣)하면 배에서 내리지 않고 2박3일을 버틴다.
대체적으로 한번출조에서 1인당 평균
중치이상의 우럭으로
100마리정도 집으로 가지고 간다.
잘 잡힐때는 120마리 정도까지도 가지고 간다.
하루의 낚시가 끝난
저녁시간,
우럭 반찬으로 배불리 저녁을 먹은후 한참을 쉰다.
그후 각자는 자기가 잡은 우럭을 손질한다.
중치크기의 우럭
수십마리를 칼로 몸통을 쪼갠다.
나는 이때 미제의 사냥칼을 썼다.
그리고 일단 벌려놓은 몸통에는 굵은소금을 충분히 뿌려서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 작업은 아주 힘들고 정교하기까지 하다.
비닐봉지로 싼후 무거운 물건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뜰채에 몇 마리씩 넣고 바닷물에 씻어낸다.
그후, 준비해간 커텐고리에 코를 꿰어 길게 매 놓은 줄에 걸어놓는다.
한바다에는 파리가
없고 바람이 잘 통하기 때문에 절인생선도 깨끗하게 잘 마른다.
이게 그 유명한 ‘우럭뱃자반’ 이다.
나는 일항차에 평균 백마리정도의
자반을 만들어 가지고 오곤했다.
아내는 그것을 같은통로의 여러집에 나누어주곤 했다.
우럭자반은 기름에 튀긴게 가장
맛이있다.
특히 우럭의 머리는 정말 어두일미다.
쪄먹기도 하고, 구워먹어도 맛이 그만이다.
한번은 같은통로의 젊은주부가 우리집에
왔다.
자기 어머니가 몸이 약하고 식욕도 없어 늘 고생했는데
아내가 나눠준 자반우럭을 튀겨 드렸더니 밥 한그릇을 다 비웠다는 것이다.
아껴서 조금씩 드렸지만 이미 다
잡수셨고,
그래서 할수없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말하자면 우럭자반을 자기에게 팔았으면 좋겠다는 요지였다.
나는
부드럽지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어부는 고기를 잡아 팔지만, 낚시꾼은 고기를 팔지않는다.’
아내와 나는 대형냉동고를 뒤져 열
마리정도를 그 주부에게 건넸다.
사실 이런일은 그동안에도 여러번 있었던 일이다.
나중에 그분은 우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선물을
가지고 왔었다.
우리집에 와서 자반우럭을 즐겨먹는 내 친구들은 늘 같은말을 한다.
‘야, 이거 명동 한복판에서 해도 장사가 되겠다.’
는 것이다.
그렇게 맛이있는 우럭뱃자반이 보편화 되지않는것은
우선 아는 사람이 많지않고 가격 형성이 안돼서이다.
자반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제값을 받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선에 비해 가격이 크게 높아지는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치회’ 얘길 해보자.
동해안의 잘 알려져 있지않은
작은어촌,
그러나 그곳엔 철이되면 우리팀이 타는 단골배가 있다.
새벽3시에 일어나 배를타고 한시간정도 나간후 새벽4시부터 방어낚시를
시작한다.
루어낚시 10개가 달린줄에 추를 달아 내린다.
바닥과 배의 중간깊이에서 고패질을 하다보면
사람이 낚시줄을 당기는것 같은 충격이온다.
적게는 세 마리에서 다섯 마리, 많게는 일곱 마리까지 걸리기도
한다.
한 마리의 크기가 어른 팔뚝만 하다.
성질급한 이 회유어종은 처음의 당기는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한쪽발을 뱃전에 대고 온몸으로 버티어야 한다.
낚시대를 놓지않아 바다에 빠진 낚시꾼도 있다.
놀라운것은
낮11시가 되면 거짓말처럼 입질이 딱 끊어진다.
평균 1인당 한가마니씩 잡는다.
뭍에 닿으면 돈을 받고 그것을 째서 손질한 다음
소금에 절여 포장해 주는 아낙들이 있다.
우리팀은 일년에 한번은 동해에서 방어낚시를 즐기고 겨울철엔 열기와
볼락을 친다.
겨울김장에 쓰기위해서다.
열기와 볼락도 루어낚시 10개를 달아서 낚아올린다.
열기와 볼락은 그 크기는 작지만 맛은
우럭과 아주 비슷하다.
같은 과(科)에 속한 어종이기 때문이다.
방어낚시를 끝내고 돌아올때,
선장은 육지 가까운곳에 배를
세운다.
그게 어딘지는 서로가 잘 알고있다.
거기가 ‘한치밭’ 이다.
한사람이 열 마리정도 잡으면 선장은 사정없이 배를
돌린다.
그곳이 자기들의 삶의터전이기 때문이다.
선장집에 도착하면 이미 선장부인은 초고추장을 준비하고 우리들을 기다린다.
한치를
잘라 내장을 뺀후 흡사 가는 국수가락처럼 가늘게 썬다.
정말 노련한 솜씨다.
그리고 큰 양푼에 한치썬것과 초고추장을 넣고 정성껏
버무른다.
입안에 침이 가득고인 우리들은 선장부인이 큰 사발에 가득담아
각자에게 한그릇씩주는 한치회를 받아들곤 얘기 한마디 하지못하고 그걸 먹는다.
막 잡아온 한치회,
그
맛은 필설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후 나는 서울에서 상당수의 횟집에서 물오징어를 한치로 속여 판다는것을 알았다.
세발낙지가
발이세개가 아니라 가늘어서 그런 이름이 생긴것처럼
한치도 못되는 짧은 발 때문에 ‘한치’ 가 되었다고 한다.
한치앞을 못보는 사람들이 물오징어를 한치로 알고
사 먹고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하는 혼잣말이 있다.
‘모르는게 약이지’
--박천복--
"호떡 파는 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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