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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에 대하여
1.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에 영원히 살게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적 사망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죄가 들어와 육체적 사망이 왔다고 하는 말이 없다. 성경적 의미의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라는 의미지 사람의 육체적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또한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였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던 자로 말씀하시지 않는다.(창3:22)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창3:22)
만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죄가 들어와 사망이 왔다면 현재의 우리의 구원도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창조될 때부터 영생을 가졌다면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먹을 것을 주었겠는가?(창1;29)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죽지 않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면 천사처럼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아야 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다. 이것은 육적이건 영적이건 다 같은 말이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말도 ‘먹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믿으라’는 말을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6:54)
계시가 점차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도 먹으라고 하셨지 믿으라는 말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유월절 어린양도 유대인들이 잡아서 먹었고 레위기에서 나오는 제물들도 잡아서 먹었다. 내가 예수 생명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 것이고 사탄의 사망을 먹으면 사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하듯이 믿는 것도 믿을 만한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먹지 못할 것, 즉 믿지 못할 것을 믿으면 신천지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②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③ 거룩한 생명이며 ④ 하나님 자신으로 곧 하나님의 영, 성령이다. 그러면 의문점이 든다. 영원한 생명은 피조되지 않은 생명인데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연결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연결, 곧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래서 ⑤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간 연결자(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선에 전기가 들어오면 살았다 하고 안들어오면 죽었다 라고 하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성경은 접붙여 졌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도 여전히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여지리니 하나님은 능히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느니라. 네가 본래 야생 올리브나무에서 잘려 본성에 역행하며 좋은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졌을진대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자신의 올리브나무에 접붙여지겠느냐?'(롬11:23-24)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했다면 이는 이치에도 맞지 않지만 하나님이 두 분이 계신다는 의미로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도 자기 아들은 자기가 낳아야 하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위 세상이 말하는 모든 종교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사람의 행위와 관계없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또한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 아들이 아닌 종의 운명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생을 가졌다라고 하지 않으며 거듭남이 없고 1회 창조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죄가 없으면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적 사망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죽었는가? 죄 없으신 예수님 마저도 죽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않되면 무조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다된다 이런식으로 답변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이성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합리적 믿음을 가지길 원하신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씨)를 받아 들여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고전 15:44. 46)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4)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우리는 창조될 때부터 본성에 속한 몸으로 창조되었다. 본성에 속한 몸은 근원적으로 영생이 없었다. 바울은 고린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말하면서 사람의 운명에 대해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몸, 곧 부활의 몸으로 일으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적 사망을 인간의 죄와 연결시켜 죄가 있으면 사망이고 죄가 없으면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죄가 없는 것은 영생을 위한 조건이지만 무죄가 영생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은 처음에 죄가 없었지만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육체로 오셔 죽었다.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만 예수님 처럼 육체가 죽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위 말씀을 보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고 살과 피, 곧 본성에 속한 몸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물속에 살려면 물고기의 생명을 가져야하고 공중에 살려면 새의 생명을 가져야 하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죄와 관계없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다. 아담은 처음부터 살과 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아담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구원받은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을 죄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지 육체는 죄 가운데 있고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흙으로 창조된 다음 한번은 죽고 죽지 않을 운명으로 바뀌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으리로다.(고전15:53)
여기서 죽을 것으로 번역된 mortal은 ‘죽을 운명’이라는 의미고, 죽지 않을 것으로 번역된 immortality는 ‘죽지 않을 운명’이라는 의미다. 운명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창조했으면 사람이고 천사로 창조했으면 천사지 천사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위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죄와 상관없이 ‘죽을 운명’에서 ‘죽지 않을 운명’으로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모든 사람은 부활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그러므로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들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하나님의 목표는 부활생명에 있다. 부활생명은 곧 성령으로 씨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여자의 씨를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을 하는 지휘관이 장애물이 나타났다고 해서 목표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장애물을 제거하고 목표로 나가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에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의 의미를 살펴보면 여자에게 씨는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땅에 없는 씨고 하늘에 속한 씨다. 이 씨는 아브라함에게 한 씨를 약속하신 그 씨로 곧 그리스도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3:16)
사실 성경의 주제는 이 씨(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이 씨를 사람에게 주기 위해 이 씨의 계보를 보호하는 것이고 사탄은 어찌하든지 이 씨의 계보를 타락시켜 이 씨가 지상에 태어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이 씨의 계보가 보존되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기록한 말씀이 마태복음 1장의 계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씨를 이식 받는다는 의미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결정적 차이라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씨를 주시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데는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는 대부분 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데는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가 씨가 되느냐 것인데 씨라 말은 영이라 의미이므로 그리스도가 씨가 되려면 그리스도가 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곧 육체를 가진 자가 씨, 곧 영이 된다는 말은 죽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계시면 우리에게 씨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면 죽으심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영(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책이냐 하면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합리적으로 죽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기록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어 예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으로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한다.(행24:15) 그 씨가 그 열매를 낳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은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3자, 곧 하나님께로 부터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은 아무리 무엇을 해도 육이고 영이 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부활생명을 상징한다. 포도즙을 짜서 놓아두면 자기 의지에 상관없이 공기 중으로부터 효소가 들어와 발효되어 물이 술이라는 새로운 물질로 변화되듯이 우리의 거듭남도 이렇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3:8)
그러니까 거듭남, 곧 영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자, 하나님께로 부터 와야하는데 이것은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는 거와 같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외부로 받는 것이기에 새로운 생명이다. 그래서 영생을 얻은 자를 ‘술에 취한 자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행2:13)
2. 사람이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한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용하셨을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태어 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연결지점이 어디서 연결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연결되려면 중화제가 있어야 하고 원자도 음전자와 양전자 사이에 중성자가 있어 서로를 연결한다. 우리의 육체도 영과 몸 사이에 혼이 있듯이 만물의 구성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듯이 이렇게 삼위일체로 구성되어 있다. 저절로 연결되는 것은 없다. 두 존재가 연결되려면 어떤 중간 매개체, 즉 공통지점에서 만나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도 서로 연결이 되려면 공통지점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기 때문에 이 차이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간격이 큰 것이다. 그래서 그 공통지점은 상호 죽음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죽어야 하고 사람도 죽으면 공통지점이 생긴다. 사람과 나무의자가 있다면 서로 죽어서 불로 태워 재가 되면 연합이 된다. 이 죽음이란 말은 없어지는 것이니까 영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은 모두 영(불)안에서 연합된다. 불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만물은 연합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지성소에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사람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이며 십자가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다. 그래서 영이라는 말은 불이라는 의미며 여기서 번제단이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번제단은 용광로와 같은 곳이다. 불로 태워 새로운 물질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좋은 쇠든 나쁜 쇠든, 죄인이든 선인이든 모두 불에 탄다. 우리 인생은 내가 죄가 없건 있건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광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재창조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해 번제단으로 가야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우리가 죄가 없더라도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내가 내 생명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셔서 죽으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죄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근원적인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 안에서 보면 이 말씀은 이해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가 없더라도 우리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는 근원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부터, 곧 창세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게 사실일까? 사실이다. 그 예가 창세기 2장에 계시되어 있다. 창세기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계시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아담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을 예표하는 이브를 산출하기 위해 피흘림이 필요없는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듯이 그리스도는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사람에게 부활생명을 주기 위해 죽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죽었다라고 하지 않고 아담이 이브를 산출했을 때의 용어인 ‘잠 잔다((마 9:24, 막5:39)’ 라고 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왜 죄를 허용하셨는지 감이 왔을 것이다. 사람은 어차피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죄가 없으면 사람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한다. 어찌 보면 죄와 율법은 동일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율법이 구원자를 찾게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죄, 즉 율법이 없다면 구원자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죄가 없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근원적으로 죽으셔야 한다는 진리를 어떻게 깨닫겠는가?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락해서 이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자연스럽게 찾게하고, 또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게 한 것이다. 율법(죄)는 낚시군이 낚시를 한다면 떡 밥과 같은 것이다. 떡 밥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으나 낚시 바늘 앞으로 고기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이 사람 낚는 어부라면 율법은 사람을 낚는 어부인 예수님 앞으로 모이게 하는 떡 밥의 역할을 한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두 가지 위치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위치는 두 가지 위치를 가지고 죽으셨다. 레위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물의 종류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드려진다. 그런데 공통점은 모두 죽음을 통해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보면 5가지 제물의 종류가 나오는데 그중 음식헌물(소제)를 제외한 4가지 헌물은 모두 죄와 관련된 제물이다. 이중 죄와 관계없는 음식헌물(소제)도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불로 태워진다. 이 음식헌물이 사람의 근원적 위치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다면 피 흘림이 필요없는 제물의 위치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여기에 죄를 대속하기 위한 피흘림이 추가된 것이다. 그래서 음식헌물을 제외한 나머지 4가지 헌물(화평헌물, 범범헌물, 죄헌물, 번제헌물)에는 모두 동물의 피 흘림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위치. 곧 대속을 위한 법리적 위치와 거듭남을 위한 헌물의 유기적 위치로 죽으셨다. 희생물은 피를 제단 주위에 뿌렸지만 헌물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불에 태워졌다. 사람을 예표하는 헌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지는 것이 실제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속과 구속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위치적으로 다르다. 내가 교통위반을 해서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쳤다고 하자. 그러면 교통위반을 한 것은 법리적인 면이고 몸을 다친 것은 유기적 면이 있듯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도 말씀을 어긴 것은 법리적 위치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유기적 위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을 통해 우리는 대속을 받았고, 헌물 되심을 통해 구속을 받은 것이다. 대속과 구속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죄 용서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대속은 법리적 위치고 구속은 유기적 위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인 면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유기적인 면도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러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 위치고, 헌물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위한 유기적 위치다. 그러므로 사람의 근원적 위치는 하나님께 대하여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번제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물로 창조된 우리에게 죄가 들어왔기에 헌물로서의 자격 상실되었지만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와서 희생물이 됨으로서 우리의 죄를 제거하여 우리의 헌물로서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첫 번째 헌물로 드려짐으로 죽은 자가 운데서 일어나신 첫 열매로서 첫 씨가 되심으로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물의 위치는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 가능한 것이고, 죄를 대속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본래의 영생을 얻기 위한 헌물로서의 유기적 위치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죽는 희생물이 아닌 ‘살아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는 것이고(롬12:1),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헌물로 드려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위치를 가지고 죽으셨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죽음을 예표하는 침례가 두 번으로서, 홍해의 침례가 있었고 요단강의 침례가 있었다. 홍해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가 있고 요단강의 침례는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이 헌물로서 죽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이 갈라지는 사건도 두 번 있었다. 마태복음 3장에서도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요르단 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받았다. 예수님은 만류하는 침례요한에게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마3:15) 예수님은 죄가 없어도 침례를 받는 것이 의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죄가 없어도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침례(죽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서도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하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로서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의 위치고,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23:46)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근원적 관계로서 유기적 헌물의 위치로 드려진 것이다.
자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사람을 창조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와서 사람을 위해 근원적으로 죽으셔야 했다. 어차피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죄가 없다면 이 섭리를 받아드릴수 있을까?
바울의 해석은 이 오묘한 섭리를 인간은 처음부터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또한 예수님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을 명분이 필요했고 인간 또한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였고 율법을 통해 초등학생처럼 가리켰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율법을 주신을 목적을 여기서 죄로 인해 율법을 주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어리기 때문에 가정교사와 감독자의 역할로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율법이 초등원리라는 말이 이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속박 당하였느니라.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갈4:3-4)
그러므로 율법이 초등원리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경륜은 고등원리다.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바란다. 고린도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라고 한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고전 1:24)_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죄만을 대속했다면 그것은 지혜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이 심겨져 있다.
온 우주보다 크신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원래 사람은 죽지 않도록 창조했는데 죄가 들어와 육체의 사망을 주는 그렇게 단순한 분이 아니다.
아무튼 사탄은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아담을 유혹해서 타락시켰다. 이 결과 죄가 들어오고 율법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역이용하여 율법을 통해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사탄이 방해하였지만 율법을 줘서 이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더 강화된 대책을 내세우신 것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 달성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4. 구약성도의 거듭남에 대하여
우선 결론을 말하면 구약시대에는 거듭남이 없었다. 거듭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오순절 사건이 후 성령의 강림 후부터의 일이다. 거듭남이란 말 그대 부활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영(씨)를 통해 거듭난다. 구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거듭남에 대한 단어가 없다. 왜냐하면 그 씨가 그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씨, 곧 이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씨도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람농사의 첫 열매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첫 열매라는 의미는 첫 번째 씨라는 의미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조상인 것이다. 겉 모습은 똑 같지만 생명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자 새 사람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엡4:2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씨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첫 열매 종류가 된 자 들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그러면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동물의 제사를 통해 구원받았다. 그러니까 실재가 아니고 모형을 통해 받은 것이다. 돈으로 치면 현금을 받은 것이 아니고 어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없었다. 구약성경에는 거듭남이란 단어가 아예 없으며, 이치 상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도 분명히 율법아래서는 구속이 없기에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4:5)
그래서 구약성도들은 현금(예수그리스도)이 지불 될 때까지 하늘로 가지 못하고 땅속의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십자가를 통해 현금을 지불함으로 그들을 이끄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엡4:8)
물론 위 말씀은 각자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본인은 이러한 의미로 해석한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은 있었다. 그러나 그 영은 사람들 외부에서 역사하는 영이었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처럼 우리 안에 내주하는 영은 아니었다. 즉 십자가가 없었기에 사람과 연합할 수 있는 영이 아니었다. 음식으로 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피와 살을 먹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키는 것이다.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가지고 오셨고 우리와 똑 같은 죽음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그 죽음을 먹을 수 있는 곧 받아 드릴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 내주하는 영을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Holy Ghost(요7:39) 단어를 별도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영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려주시는 영(고전15:45)이 되심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는 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가진 몸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영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것이다. 내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 곧 인격을 믿는다 것이다. 부부가 오래 같이 살면 서로 닯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의 인격, 곧 영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이란 어떤 종교적인 신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으시고 살아나신 인격을 믿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 않는 신이된다고 속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하였다. 이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육체가 죽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을 해도 흙이지 결코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씨 하나님은 흙 사람이 필요한데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의 운명을 피하여 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같은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야야 한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신과 같은 아담을 대신하여 심판 받으심과 동시에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번제헌물로서의 정상적 인간의 운명을 걸어가 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사람 농사의 과정을 처음 걸어가신 그분의 인격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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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 !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알기 쉽게 물흐르듯이 설명해 주시다니 ...
감사 합니다
성경말씀을 근거로 잘 설명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5시라는 사람은 왜 다르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썼다고 무조건 그가 맞다는 식은 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