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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5주)
믿음: 저절로 그리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욥38:1~11; 고후6:1~10; 막4:35~41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소위 “저절로 열매 맺는 씨앗의 비유”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아주 짤막한 비유지만, 우리의 근본적 현실(Reality)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은 이 저절로 열매 맺는, 저절로 그리되는 놀라운 현실 때문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현실로 인해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우리의 마음이 좁아있어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가 거의 태반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의 현실은 “저절로 그리되는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번 한 주간, 숨을 쉬어야지 해서 억지로 숨을 쉬지 않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소화시켜야지 해서 음식물을 소화시킨 적도 없고, 세포분열을 한 적도 없습니다. 저절로 그리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우리 스스로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공전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아침을 맞았고 저녁을 맞았습니다.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맞았습니다. 철저하게 저절로 그리되는 기반 위에 우리의 삶이 의존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우리의 애씀과 수고는 바로 이 근본에서만 의미를 띨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땀과 눈물, 어떤 때는 통제와 조종은 바로 이 기반에서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애씀과 수고, 통제와 조종은 철저하게 “저절로 그리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관상이라고, 혹은 관상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관상기도 중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을 내려놓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가게 놓아둡니다. 우리는 그냥 존재합니다. 아~! 내 삶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고 이리로 돌아가는구나! “돌아가는 세상 속의 고요한 지점”을 아는 것입니다.
이 “저절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입니다. “저절로”는 우리의 무지가 드러나는 자리이며, 그래서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저절로”는 우리의 애씀과 수고가 끝나는 자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안심하고 쉬는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저절로”가 핑계 대거나 책임을 방기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온전히 승복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저절로 열매 맺는, 이 저절로 그리되는 그 자리를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진정 알아차린다면, 우리 삶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엄청 쉬워질 것이고, 단순해질 것이고, 우리는 많은 집착과 상처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많은 경쟁과 비교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감사와 경탄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은 욥기서입니다. 욥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의 대명사이지요. 그런데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에다 열 자녀를 둔 다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급전직하를 맞습니다. 어느 날 강풍이 불어 집이 무너져 열 명의 자녀들이 압사하고, 가축들은 인근의 스바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이 들이닥쳐 모두 빼앗아 가버리고 종들은 모두 살해당합니다. 거기에다 욥의 온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성 종기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불행으로 인해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는데, 욥의 아내는 그에게 온갖 독설을 퍼붓습니다.
욥기는 이런 이야기 형식의 서두에다가,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과 논쟁을 벌이는 본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갑작스런 불행한 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욥에게 멀리서 친구 셋이 찾아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찾아온 세 친구는 욥을 잠시 위로한 후에 아주 길게 욥에게 조언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니 까닭 없이 너를 그렇게 고통 속에 몰아넣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네가 모르는 너의 죄악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빨리 찾아내어 하나님께 회개하여라.” 이들은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법이다. 하나님은 의인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죄인들은 멸하신다는 인과응보에 의지해서, 네가 받는 고통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보라고 욥을 추궁합니다. 사실 이 세 친구들이 말하는 인과응보의 지혜가 바로 잠언의 지혜이기도 하지요. 전통적인 지혜입니다.
여러분, 사실 여러분도 이런 일을 겪었던 적이 없나요? 남이 내게 뭐라고 한 것은 둘째 치고, 내 스스로가 불행이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원인을 막 찾지요. 내가 뭐를 잘못했나? 내가 놓친 것이 뭔가? 이럴 때 남이 뭐라고 한 마디 하면 엄청 화가 나지요? 왜 그럽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남이 확인사살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이 루저고 실패했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인과응보에 길들여 있어서, 편안하게 “저절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행복도 그렇지만, 불행도 그렇습니다. 매사에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 행복과 불행을 자신이 통제하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알아야 행복과 불행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할 때, 통제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매우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삶이 바로 이 “저절로”에 의존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세 친구들의 진부한 진단에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과응보라는 잠언 식의 지혜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따지지요? 그래서 욥기는 2천 3,4백 년 전의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책입니다. 의인은 잘되고 악인은 망한다는 당시의 보편적인 믿음에 전적으로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기32~37장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엘리후라는 젊은 친구인데, 이 친구는 또 다른 고도의 세련된 진단을 내놓습니다. 즉, 욥의 고난은 하나님이 경건한 자를 경고하고 정련시키려고 내리는 고난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징벌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교육적인 고난”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이 더 나쁜 일을 겪지 않도록 지켜 주시려고 고난을 주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람을 정련시키려고 고난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겸손하게 그 고난 속에서 어떤 교훈을, 의미를 찾아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도 종종 써먹는 진단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 고통의 원인을 밝히려고 하고, 그 결과를 우리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의 결론은 놀랍게도 여기에 나온 친구들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우리가 읽은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때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그러면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그때 네가 거기 있기라도 하였느냐?) 바닷물이 터져 나올 때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우리 본문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그 다음 41장까지 계속해서 세상의 신비에 대해서 나열합니다.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바닷 속 근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네가 아느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둠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느냐? 눈을 쌓아둔 창고를 들여다 본적이 있느냐? 동풍의 시발점을 네가 아느냐? 비를 내려 풀을 돋게 하신 이가 누구냐? 물을 돌같이 얼리는 이가 누구냐? 하늘의 별자리를,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러면서 사자, 들염소, 들소, 타조, 말, 독수리 등등을 들어 이 동물들의 행동과 행태들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욥기의 이 부분을 읽다 보면, 마치 요즘 우주 다큐멘타리나 네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타리를 보는 듯합니다. 실제로 당시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세상의 신비를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너의 지식과 너의 통제 밖에서 “저절로” 이루어졌다. 이게 이천 삼,사백년전의 글이라서 이렇지, 요즘 같았으면, 양자과학이나 첨단 우주의 신비를 가지고 이야기 했겠지요? 네가 관측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아느냐? 네가 양자 얽힘을 아느냐? 네가 빛과 공간이 휘어지는 것을 보았느냐? 네가 블랙홀을 보았느냐? 137억 년 전 빅뱅이 시작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때부터 팽창하고 있는 이 우주의 넓이를 네가 아느냐? 그 안에 있는 수천 억개의 별들이 모인 수천 억개의 은하계를 네가 본 적이 있느냐?
욥의 고난에 대해 열심히 원인을 찾고, 그로써 인과응보와 교육적인 의미를 찾은 친구들의 논쟁은, 이 모든 일들을 자신들의 지식과 논리로 통제하려는 욕구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오늘 욥기 속에서 하나님은, 그 모든 지식과 논리로 너희들은 너희들을 삶을,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상은 너희가 통제하는 세상이 아니다. 너희가 통제하는 것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저절로” 이루어진 세계에 근거하는, 아주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니 고통의 이유를 따지기 전에 먼저 “저절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만나보거라. 그 세계에 놀라고 그 신비를 경탄하여라. 너희의 모든 삶은, 모든 행복과 불행은, 바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러분, 우리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되려면, 이유가 없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내가 왜 행복한지 모를 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 이유와 조건이 사라지면, 아니 그 이유와 조건이 지속되더라도, 거기에 근거한 행복은 점점 힘을 잃습니다. 저절로 존재하는 행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을 우리가 가장 잘 만나는 길은, 너무 그것의 원인과 이유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그 원인을 찾고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분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고통과 불행을 통제하고 있다는 잠시의 위안은 줄 수 있습니다. 통제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고통과 불행을 가장 잘 만나는 길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냥 만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제하려는 욕구(인과를 분석하고 의미를 찾는 것)를 내려놓고 그냥 만나는 것입니다.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 본성을 알고, 덜 강박적이고 덜 흥분해서 거기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고통으로만 만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짐은 훨씬 덜어집니다. 거기에 원인과 이유를 분석하고 결론까지 내리면서 비난과 판단이 섞이게 되면 고통을 고통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고통과 불행의 가장 큰 적은 흥분해서 강박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오늘 욥은 저절로 이루어진 신비의 세계를 보고는 그대로 승복하고 맙니다. 도저히 자신의 고통을, 아니 그보다 고통의 인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욥은, 저절로 이루어진 세계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승복한 것입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고백하지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것이 의인이 왜 고통을 받는가에 대한 욥기의 결론입니다. 욥기가 이에 대한 답이라면, 욥기는 아주 담담하고 조용하게 이렇게 되묻는 것 같습니다. 왜 의인은 고통을 받으면 안 되는가?
여러분, 오늘 마가복음에는 씨앗 비유 다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안으로 덮쳐와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오랫동안 거기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까지 혼비백산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명령하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고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은 좀 꾸짖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갑작스런 위기에 무서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이 “믿음”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 자신들을 살려주실꺼라는 믿음일까요? 그렇다면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운 것은 제 때, 제대로 한 일이지요.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저절로 그리되는 세계”,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은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 다스리시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예수님만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 믿음은, 계속 말씀드리지만, 우리에게 손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반응하고 제대로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큰 변화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몇 번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우리의 뇌구조가 바뀌어야 될 일입니다. 의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은 본디 이렇게 의식이 바뀌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먼저 여러분 안에서 저절로 그리되는 세계를 만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든지, 여러분의 일상의 깨어나는 경험이든지, 여러분의 삶은 저절로 그리되는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못 알아차렸다고 자책하거나 또 실수했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들을 수없이 많이 거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점에서, 조건 있는 희망을 보지 말고, 아무 조건 없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바다 저쪽으로, 저절로 그리되는 세계로 건너가야 합니다. 반야심경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지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가자 건너가지 모두 건너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그 사이에 풍랑이 이는 바다도 있고 사막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저절로 그리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키웁니다. 연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