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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모신 한울님께 심고를 하라
박옥례 당호(一如堂, 일여당) 남해교구
경남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출생
1934년 10월 15일생
중앙위원, 남해 지부회장
‘성경신만 지극정성으로 하면 다 된다’고 하시면서
성·경·신 세 글자가 내 눈앞에 떠오르는 거예요.
나는 성경신 세 글자를 몰라서 가만있으니
"먼저 꽉 믿고 섬기고 실행하면 다 이루어집니다. 한울님이 뜻을 두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열여덟 살에 불교 집안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아이 둘을 낳고 25세 때 아이들 아버지가 돌아 가셨습니다. 남편은 운동을 참 잘했어요. 마라톤도 잘하고 축구도 잘했습니다. 축구하다가 상대방의 발에 옆구리가 차여 내장이 터져서 오래 고생하다가 환원하시더라고요. 남편이 29세 때입니다.
우리 친정 오라버니가 천도교에 다녔습니다. 교구장도 역임하고 서울교당에도 일보러 다녀오고 하시더라고요. 남편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병문안 왔다가 남편에게 집에만 있으면 몸이 더 약해지니 교당에 나오라고 권하시더라고요. 남편이 환원하고 내가 방안에서 기운을 못 차리고 있으니 오라버니가 오셔서 천도교 열심히 해서 아이들 잘 키우라며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하셨어요. 그렇게 남해교구에 나오게 됐지요.
남해 천도교인들은 도시락 싸와서 함께 기념식을 하고 그랬어요. 시일 날이면 각자 잘하는 분야에 대해 강좌 말씀도 많이 했어요. 선구 우암 선생님께서 교리 말씀을 해주시고 시사적인 분분에 대해서는 고정훈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고 김봉구 선생님은 농사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김봉구 선생님은 김의원 병원장 아버지신데 진주농업대학교를 나오셨어요. 농사에 대해 학문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니 농사지을 때 도움이 참 많이 됐어요. 내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김명진 우암 선생님께 성미에 대해 여쭈었어요. “성미는 매 끼니 때마다 쌀을 뜰 때 가족 수대로 한 술씩 떠서 ‘우리 아무개 명과 복을 한울님과 스승님께 전탁 합니다’라고 심고하고 성미를 뜬 후에 밥을 지으면 그 밥 먹은 식구들은 그날 아무 사고도 탈이 없다” 하시며 경전에 ‘한울님께 복록 정해 수명을랑 내게 비네’라고 하셨으니 “수명은 대신사님께 빕니다”라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고성 묵암 선생님께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순회를 하십니다. 그러면 하준천 회암장님, 차갑관 재암장님, 청암장님 등등 모두가 다 함께 다니십니다. 한번은 회암장님이 묵암 선생님 모시고 우리 집에 오셨어요. 묵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 등을 툭툭 두드리며 “복 받으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 아이들 잘 키워야지요. 이 아이들 잘 키워줘야죠.” 묵암장님이 목 메인 소리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무리 안 울려고 해도 바로 고개가 툭 떨어지고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고 성미를 떠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잊지 않고 끼니때마다 한 술씩 뜨면 한 달에 작은 되로 딱 한 되박이 돼요. ‘우리 명과 복을 한울님과 스승님께 전탁합니다’하고 떴지요. 그리고 월말이 되면 내가 동네 성미를 모아 장부를 만들고 명단을 기록해 교구에 바치는 심부름을 했습니다.
남들이 말하기를 천도교 믿으면 감기를 안 한다고 해요. 나는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어쩌다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시어머니는 “천도교를 믿으면 감기를 안 한다는데 왜 하노?”라고 말씀하세요. 어머님은 불교를 믿으셨기에 내가 천도교 하는 게 그다지 탐탁하지 않으셨나 봐요. 나는 “나중에는 감기 안 하겠지요” 했죠. 또 한 번은 산이 무너져서 논이 묻혔어요. 그러니 시어머님께서 또 어디에서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천도교 믿어서 그렇다고 해요. 시아버님은 부처님 같으신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항상 “누가 뭐라고 하든지 너는 나를 믿고 나는 너를 믿고 우리 애들을 잘 키워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나를 다독여 주셨습니다.
성미 보따리를 이고 다니니 포덕이 많이 됐습니다. 덕석(멍석)포덕이 됐어요. 우리 아버님이 훌륭하셔서 그렇다 싶었어요. 입교를 많이 하니 참 재미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입교를 했어요.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처음으로 입교를 했거든요. 그래서 이래저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 집에서 입교식을 했죠. 교당을 지었어요. 우리 집안에 시아버님 육촌 되는 아저씨가 당신 아버지께 교당 터를 받아서 교당을 크게 지었습니다. 5개 부락(봉우, 남양 용강, 왕지, 노량 )이 모여서 교당을 짓는데 서로 협조해 산에 나무를 해오고 교당을 봄 내내 지었습니다. 내가 27살인가 28살 때 지었지요. 내가 밥을 해서 봄 내내 이고 날랐습니다. 50명이 넘으면 교당이 되고 못되면 전교실인데 50명이 넘어서 교당으로 세웠습니다. 문의교당입니다.
우리 집에서 교당을 보면 잘 보였어요. 그런데 교당 세우고 5년 지난 어느 날, 교당이 안 보이는 겁니다. 놀라서 가보았더니 누가 교당을 허물어 버렸어요. 우리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알리니까 노발대발을 해요. 땅주인이 자기 땅이라고 마음대로 무너뜨린 거예요. 그 이후 자연히 교당 사람들이 떨어졌어요. 회암 선생님께서 교당 지을 때 교인들이 각 산에서 나무를 찍어서 가져 왔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배신하고 고발을 했어요. 회암장님께서 경찰서 고발도 당했어요. 그런 우여곡절로 지었는데 헐어 버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파요.
우리아이들은 어릴 적에는 참 잘했어요. 「소년의 서사」도 잘 외우고 집례도 경전 봉독도 잘해서 우리 아버님이 등을 쓰다듬으면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칭찬을 하니 더 잘 하더라고요. 친구들도 데리고 오고 했는데 교당이 없어지니 아이들도 그만 시들해졌습니다.
아이들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공부 잘하면 나라에서도 공부 시켜주고 엄마가 식당일을 하고 콩나물을 팔더라고 공부를 시켜 준다고 하니 아이들이 그걸 믿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서울대에 갔습니다. 형이 책도 다 사주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잘해줘서 서울대에 갔습니다. 큰 아이는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중위로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마음에 병이 들었죠. 큰아이 죽고 나서 마음에 멍울이 잘 안 풀려요.
문의교당이 없으니, 이웃 교당까지 6킬로미터 길을 걸어갔다가 걸어왔어요. 오라버니가 돈을 주며 갈 때는 버스로 가라고 할 때가 많았죠. 우이(문의) 교당이 없으니까 마음이 너무 허전했어요. 그래서 집에서 부회를 보면서 시일식을 했죠. 우리 오라버니가 교구장을 5년 했습니다. 오라버니 도호는 ‘예암’입니다.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105일 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아서 예절예자 예(禮)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답니다. 오라버니가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라버니가 특별기도 때 사람을 보내서 기별을 해요. 특별기도는 주문을 천 독에서 천오백 독을 외우라고 해요. 향불에다 불을 피우면 한개 다 타는데 40분이 걸려요. 시계가 없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해보니 향불 한개 태울 때 천 독을 외워요.
작은아들은 부산에 있을 때도 시교구에 다녔어요. 좋은 학교를 나오고 형제 많고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처자와 결혼해 아이들 낳고 잘 삽니다. 아직 오관 실행은 잘 못하지만 서울 도경교구에 성미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도 후회스러운 것은 며느리 될 사람이 첫 인사 왔을 때 천도교 입교하는 조건으로 결혼 승낙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것이에요. 며느리가 아직까지 입교식을 못했거든요.
밤낮으로 비는 게 우리 아들, 손주, 며느리를 진실교인 만드는 것입니다. 한번은 우리 작은 손자가 가고 싶은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되는데 성적이 모자라 집안에 큰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아들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특별기도를 했어요. 며칠 있다가 손자 졸업식에 갔더니. 우리 아들이 펄쩍 뛰면서 좋아라하면서 뛰어오는 거예요. 작은 손자가 바라던 고등학교에 추첨이 된 거예요. 그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이것은 다 어머님이 기도를 해서 된 거예요”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 며느리가 마음으로는 믿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젠가 도가완성을 이룰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수련 가면 소감발표를 합니다. 나는 소감발표를 할 때면 꼭 한 가지 말을 합니다. 옛날 묵암 선생님께서 늘 “천도교 욕 듣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그 말씀대로 “천도교 욕 안 듣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수도하자. 그래야 옳은 지도자가 되어 사람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소감을 발표합니다.
나는 손자에게 줄 단주 장주 하나 경전하나를 준비하고 편지도 썼어요. ‘할머니가 너희들한테 부탁하자’ ‘한울님 믿자’하고 편지를 써 놓았어요. 내 소원이 그래요. 우리 아이들 도가 이루고 우리 천도교인 모두가 진실로 실행해 천도교 욕 안 듣게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우이동에 처음 수련을 갔습니다. 두 시간을 앉으니 다리가 너무 아팠어요. 잘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수련을 하던 중에 다리 아픈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고요. 한태원 선생님께서 울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내 생각에 진작 수련을 하고 한울님께 어떻게든지 매달렸으면 나쁜 일을 피해 갔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인천에서 온 사모님이 있었어요. 위에 딸 둘인가 셋을 낳고 아들 낳으려고 한울님께 기도드리니까 한울님께서 아들을 주셨다고 데리고 왔어요. 수련 오니 또 그 아들을 봐주는 아가씨 동덕이 생겼대요. 한울님 믿으면 이렇게 착착 알아서 잘된다고 좋아했어요.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더욱 아쉬운 맘이 들고 서러웠어요. 진작 한울님께 기도하는 수련방법을 알았다면 우리 아버님이랑 남편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에 너무 억울하고 아쉬웠어요.
또 수련이 가고 싶어서 오라버니한테 경주 가는 길을 물어 용담수도원에 갔어요. 경주 기사 분한테 가정리 용담에 내려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올라가니 김경렬 포덕사님께서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일주일을 하는데 월산 선생님이 지도 하셨습니다. 그때 중간에 앉아 있으니 저보고 앞으로 오라고 하셔요. 그래서 앞으로 가니 다리가 아파 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3일 동안 울었습니다. 뼈골에서 나오는 눈물은 막지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 월산선생님께서 “사모님, 울고 싶으면 울고 뛰고 싶으면 뛰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곳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5일 만에 울음이 그치고 강령이 되더라고요. 앉았는지 섰는지 모르겠고 들판이 온통 금잔디 밭인 거예요. 그래서 김경렬 포덕사님께 물었어요. “나는 눈을 뜨나 감으나 온통 금잔디 밭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니 수련하면 그런 단계가 온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때 월산 선생님께서 그 다리 한울님께서 주신 다리이니까 아프다고 움직이지 말고 꼼짝도 말고 수련하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공중에 떠서 날아가는 기분이었어요. 이제 일주일 수련을 마치던 마지막 새벽수련 때, 계곡에서 괴나리봇짐을 든 할아버지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해월신사님이셨어요. 그때부터 수련이 자꾸 가고 싶은 거예요.
경주 다녀와서 이제는 가리산에 물어물어 찾아갔어요. 3주 마음을 먹고 올라갔습니다. 25년 전쯤이에요. 울음이 자꾸 나왔어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말이 내 귀에 들려요. 바깥에 나가면 큰 바위가 하나 있어 거기 앉아서 수련을 했어요. 모레면 3주가 되는데 박경화 사모님께서 자지 말고 함께 수련 하자고 해서 가만 앉아서 수련을 했죠. 새벽 3시쯤에 내가 공중에 뜨는 느낌이 들었어요. ‘성경신(정성·공경·믿음)만 지극정성으로 하면 다 된다’고 하시면서 성.경.신 세 글자가 내 눈앞에 떠오르는 거예요. 나는 성경신 세 글자를 몰라서 가만있으니 ‘먼저 꽉 믿고 섬기고 실행하면 다 이루어집니다. 한울님이 뜻을 두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소리가 옆에서 하는 소리처럼 들려요. 어디 공중에서 들리는 듯이 들려요. 눈을 뜨니 아무도 없고 사모님만 계셔요. 그래서 수련 끝나고 박경화 사모님께 새벽 수련에 성경신 세 글자를 만났다고 말씀드리니 잘했다고 열심히 하면 잘되고 감응을 주신다며 격려해 주셨어요.
가리산 수련을 마치고 송탄 아들한테 갔어요.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을 했는데 송탄에 도착을 하니 아들이 딱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나왔더라고요. 몇 시 간다는 말도 안 했거든요. ‘참 살다보니 이런 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대요. 한울님이 시켜서 아들이 마중 나온 것 같았어요. 어떻게 왔느냐고 하니 어머니가 오늘 오신다고 하셨는데 꼭 이차로 올 것 같아서 나왔다고 해요. 그 이후에도 많은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한울님은 언제나 우리를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지요.
아들네랑 같이 살다가 손자들이 학교에 들어가니 제 손이 많이 필요가 없는 것 같아 남해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나는 아들이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에게 말했어요. “고향이라는 두 글자는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고향 가면 산도 있고 조상님 산소도 있고 논밭도 있고 하니 너도 가고 싶으면 갈 수 있고 나도 가고 싶으면 갈 수가 있는 집을 하나 사자”고 했죠. 그래서 다시 집을 장만해 놓았습니다.
아이들 키울 때 내가 안 해 본 장사가 없어요. 우리 시누님이 쌀을 한가마니 갖다달라고 해서 쌀 한 가마니하고 장 한 통을 갖다 주는데, 부전시장 야채시장에 서 있다가 차가 내 발등 위로 지나갔어요. 이제 나는 다리를 못 쓰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기사님이 벌벌 떨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심고를 했어요. ‘내가 걸어가야 하는데 죄 없는 기사님 벌주지 말고 나 안 아프게 해주라’고 두 번 세 번 심고를 했어요. 다른 차로 불러서 시누 집에 가서 쌀을 풀어 놓고 차가 내 발등을 지나갔다고 보여주니, 버선발위에 타이어 자국이 나있어요, 그런데 멍은 들었는데 그 뒤로 안 아프고 나았어요. ‘한울님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주시는구나’ 생각하니 너무 고맙고 한울님 조화가 겁이 났어요. 내가 요새 일요일이면 시일 나와서 젊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잘하면 도와줘요”라고 말 한마디 해요.
특히 우리 아들 짝 지은 걸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처남 5명 중 교사가 두 분이고 한분은 서울대 법대 나와서 검사장하고 또 은행장도 하시고 다 잘 돼 있으니 좋더라고요. 이리 한울님이 감응하시고 도와주시니 감사하지요. 다만 내가 뛰어나게 잘나지 못해서 포덕을 잘 못해서 아쉬워요. 예전에 마당포덕이 났는데 교당 넘어 가는 바람에 그만 그 사람들을 다 잃었으니까요.
여성회 활동은 여성회장 3년, 중앙위원 3년을 했습니다. 회장을 하면 마음에 책임이 무거워요. 일찍 와서 경전봉독을 했죠. 아들며느리가 용돈을 많이 줍니다. 10일조는 못내도 특성금은 많이 냅니다. 마지막으로 소원이라면 우리 며느님과 손자들이 입교식 하는 것입니다. 수련하면 다 잘 될 거라고 믿습니다. 내 정성껏 하면 따라 올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한번은 너무 아팠습니다. 몸이 불같고 사경을 헤매는 거예요. 내가 한울님께 산사람에게 달라붙듯 애원하면서 아들을 주물렸습니다. 아들 살라달라고 하니 새벽쯤에 열이 내려가더라고요. 그래서 부엌에 가서 쌀죽을 써서 따뜻한 죽물을 주니 고개를 들면서 “하, 시원하다. 속이 쑥 풀리면서 내려간다” 하더니 괜찮아 지더라고요. 수련 때 선생님 말씀이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도 급하면 한울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우리 천도교인은 하늘 보고 애원하지 말고 ‘내 마음에 모신 한울님께 심고를 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월산 선생님도 한태원 선생님도 묵암 선생님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묵암 선생님을 참 존경했습니다. 내가 그때 올여름에 내 손으로 베로 한복을 지어 보낼 거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해 돌아 가셨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던 지요. 나는 천도교하고 결혼을 했어요. 어려울 때마다 한울님께 많이 의지했어요. 잠을 자다 꿈을 꾸면 시커먼 굴에 시커먼 사람들이 나를 가둬요. 그러면 우리 아버님이 딱 막아 주세요. 우리 아버님이 한울님이 아니고 누구겠어요. 우리 아버님 덕에 내가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갑니다.
묵암 선생님께서는 항상 “천도교 욕 듣게 하는 천도교인이 되지 말고 시간 약속을 반드시 잘 지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천도교 믿는 놈이 저 따위로 한다고 욕을 합니다. 그런 소리는 듣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는 동네에 큰일이 있을 때는 교당에 안 나옵니다. 왜냐면 천도교 욕 듣게 할까봐서요. 천도교 하면 참 이래저래 어렵습니다. 바르게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한울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종자사람이니 세상에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울님이 좋아하시고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고 우리 천도교 욕 안 듣게 하고, 이것을 교인마다 잘 지켜 때가 되면 포덕은 저절로 잘 될 겁니다.
(구술일: 포덕 150(2009)년 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