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0:35~43)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느니라.’ (42절)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준다.
선지자가 나타나서
친구에게 자신을 때리라는 부탁을 하고
부탁을 거절한 이에게는 처절한 처벌을,
자신을 때리는 이상한 순종을 한 이에게는 아무 일 없이 넘어간다.
아합을 향하여
어떠한 이상한 요구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메시지이다.
아합은 처절하게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교훈은 이렇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본문 해설처럼 ‘비상식적인 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다.’라는 말은
문구 자체는 옳지만 왠지 불안 요소가 있다.
당연히 비상식적인 일로 보이더라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말이 안전하다.
왜냐하면
1. 대부분의 상황은 상식적인 일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2. 비상식적인 일에 순종하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역기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상식에 따라 행동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하게 보이는 요구를
하실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 분명하다면), 비록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에 순종하라. 나중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적절한 때에 그 선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맹종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비상식적으로 여겨지는 요구를 받더라도 위와 같이 적절한 판단 기준,
선량한 균형 감각으로 진지하고 자발적인 선택을 바라신다.
아무 생각 없는 맹종이 미덕이라 여기시지 않는다. 맹종이 아니라 순종이어야 한다.
맹종은 타자에게 폭력이 되고
오히려 사탄에게 꾀임을 받는 빌미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기에
에덴동산의 사건의 빌미가 되었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대속죄로 희생하게 하는 일까지 겪으셨다.
그렇게 하기까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니 사람 안에 있는 전인격적인 수단과 통로를 통해서
결론을 하나님으로 맺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바라지,
아무런 생각 없이 맹종하기를 절대 바라지 않으신다.
그래서 막히면 ‘질문’하라고 하신다.
질문은 대표적으로 기도로 하고, 말씀으로 상황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소통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름길,
필수 코스가 되고
이를 통해서 내 선택권을 하나님께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맹종의 기운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
risk로 작용할 수 있다.
옳은 통로를 사용해야 목적지로 가게 되는 것이지
옳지 않은 통로는 원치 않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제 추론의 모든 기제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십니다.
내 감정과 지식, 의지를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감정이나 편협한 어떤 기운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내 온몸과 마음과 정성으로 다다른 곳이 하나님이기를 소원합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