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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가을이 열렸다 / FOOD ESSAY_들살림 편지
ysoo 추천 0 조회 253 17.09.25 15: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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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ESSAY_들살림 편지


밥상 위의 감초, 들깨


들깨는 뭐라 해도 독특한 향이 최고다. 그중 깻잎은 고기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쌈으로 많이 먹고 있어 상추와 함께 쌈 채소의 대명사로 불린다. 찐빵과 앙꼬, 바늘과 실처럼 돼지고기를 싸 먹을 때 깻잎이 빠진 쌈을 상상할 수 있겠나 싶다.


옛 어른들은 들깨를 들고 다니며 심심풀이로 두세 줌씩 집어 먹으면 절로 건강해진다고 했다. 또 잡곡밥에 뜸 들일 때 두세 방울씩 떨어뜨려 먹으면 밥맛과 건강을 동시에 잡아낼 수 있다. 깨알을 짜서 만드는 들기름은 옛날에는 등화용이나 칠 대용, 또는 그을음으로 먹을 만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식용으로 먹는 게 일반적이다.

들깨 향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 오메가 성분까지 함유되어 있다니 나의 들기름 사랑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나물을 무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겨울철 들기름에 재어 구운 김의 풍미는 밥이 어디로 사라졌나 싶게 이끈다.깨알은 갈아서 거른 뽀얀 국물을 탕에 넣어 먹기도 하는데, 추어탕이나 토란탕, 쑥국이나 시래깃국 어디나 이 들깨가루가 들어가면 마법 같은 맛으로 끌어올린다.


들깨가루나 들기름은 호불호가 갈린다. 아주 싫어하거나 나처럼 환장하게 좋아하거나. 아마도 들큼한 냄새와 미끄러운 질감이 기호를 좌우하는 것 같다. 생체 리듬을 잡아주는 비타민 C가 풍부해 식탁 위의 명약이기도 한 깻잎 특유의 향은 방향성 정유 성분이라고 해 방부제 역할을 한다. 내 몸이 먼저 들깨의 선 기능을 감지하고 좋아해서 다행이다.


명절이 다가오면 나의 모친은 오꼬시라고 불리던 강정을 미리 준비했는데, 이때 들깨강정이 빠지지 않았다.

긴 줄을 서는 당번은 내 차지였다. 바글바글 끓는 엿물에 튀기거나 볶은 재료를 설설 버무려 납작하게 밀어 긴 자를 대고 썰어내는 퍼포먼스를 보는 즐거움이 고소하고 달콤해 기다림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쌀강정, 땅콩강정과 함께 다락으로 모신 들깨강정은 봄 무렵까지 심심한 군입거리가 되었다.


깻잎 향이 그만이라 500여 장을 땄다. 한 장 한 장 잎을 따다 보니 땀이 줄줄 나고 지루해지기 시작해 일을 샀다며 자책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이렇게 타박 실어 딴 깻잎이 맛이 있겠니? 덕분에 깻잎 허브 테라피를 체험하게 됐잖아.’

그러자니 더위도 성가심도 먼지 내려앉듯 나직이 내려앉더라. 마음이란 백지장처럼 가볍고 얇아 마음 길을 어느 결로 뒤집느냐에 따라 고통도 분노도 기쁨도 좌우하고, 쓰기에 따라 종지만 해질라치면 우주만 해지기도 하구나.


장물을 끓여 부어 장아찌를 담그고 일부는 남겨 깻잎 사이에 편으로 썬 마늘을 한 톨씩 넣고 멸치육수에 집간장과 액젓으로 간을 맞추어 심심하게 쪄냈다. 수증기를 쬐어 강한 깻잎 향은 제 기운을 눅잦혀서 은은해졌고 뻣센 깻잎 또한 부드럽게 누그러져 바로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제격이라 손쉽게 해 먹는다.

가늘게 채 썬 깻잎을 재빨리 튀겨 양념에 버무린 깻잎 자반은 사각거리는 소리와 고소함이 입과 귀를 즐겁게 해 두고 먹거나 누군가에게 선물로 들려주어도 향기로운 선물이다.


들깻잎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주목했고, 참깨꽃과 달리 눈여겨보지 않으면 꽃의 시기를 놓치기 일쑤인 앙증맞은 들깨꽃도 그 무렵부터 집중했다. 보려는 만큼 보이는 것인지 누렇게 익어가는 나락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것이 들깨단풍이다. 한낮의 볕이 관통한 잎은 단풍이 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보약과 다름없는 가을볕이 들깨 송아리를 키우고 간들바람이 건드린 들깨 향기는 얼마나 아찔하게 코를 간질일지. 아무것도 보태지 않은 나는 그 볕이, 그 바람이 가담한 들깨잎 단풍의 황홀만 고대한다.




보물을 찾아라, 밤


밤 아람이 떡 벌어졌다. 방 창을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서 자라는 나무여서 수없이 눈 맞춤한 나무다. 잎인지 꽃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은 밤꽃이 필 무렵부터 구슬만 해지고 탁구공만 해지다 이렇게 떡 벌어질 때까지 성장을 낱낱이 지킨 열매이니 몇 년째 마주하는 연례행사여도 그때마다 새롭고 반갑다. 무어라 하여도 가을의 전령 같아서다. 부러 장대를 휘두르는 유도 분만은 시행하지 않는다.

그냥 두고 기다리면 ‘자연 분만’한 열매를 허리만 굽혀 주우면 그만이다. 줍고 돌아서면 또 떨어져 있고, 이쪽에선 안 보이던 밤이 저쪽에서는 보이는 흥미로운 보물찾기다.


밤 줍기는 유년의 할머니 댁에서의 소임이었다. 이른 아침녘에 뒷마당 비탈을 가보면 어김없이 밤알이 떨어져 있었다. 실하고 윤기 나는 열매였다. 보물찾기의 묘미를 그때 배웠다. 열흘에서 보름 남짓 이어지는 밤 줍기는 유년을 줍고 추억을 줍는 회상이다. 한자리에서 돌아 주웠는데, 금세 바구니 한 가득이다. 야생하는 토종 쥐밤이라 씨알이 가늘어 볼품은 없지만 고소함은 비할 바 아니다. 밤 역시 버릴 게 없는 식품이다. 겉껍질은 소갈이나 설사, 코피가 멈추지 않는 것을 치료하기도 하고, 밤송이를 끓인 즙을 발라 타박상을 치료하기도 한다.

밤 속껍질은 꿀에 섞어 얼굴에 바르면 피부를 급격하게 수축시켜 주름살을 펴게 한다니 게으른 나도 호기심이 생긴다. 하루에 밤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필요 없다는 말처럼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어 허약한 몸을 보강하는 반면 많이 먹으면 살이 찔 수밖에 없다. 한번 붙들면 끝장을 보아야 자리를 터는 식성이니 올가을에도 허리가 1인치는 늘겠다. 그렇지만 역시 가을에는 밤 한 됫박은 내 몫으로 먹어주는 게 밤과 가을에 대한 예의이고 의식이다.


보름 남짓 기도처럼 밤을 줍다 보면 양이 제법이다. 밤은 벌레가 쉬이 들어 저장이나 보관이 까다로워 그때그때 소비하는 것이 손실이 없으니 다양한 조리법을 시도해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쪄 먹는 걸 기본으로 삼고 껍질을 벗겨 밥솥 위에 얹어 밤밥을 짓기도 하고 밤죽을 끓여 내기도 한다. 작년 구례 출장길에 들른 재래 장터에서 하얗게 말린 밤 채를 본 이채로움이 생각나 썰어 말려도 두었다. 음식의 고명으로 쓸 예정이다.



따끈한 죽이나 국물 음식을 가까이 하기 좋은 계절이다. 양파를 버터에 충분히 볶다가 삶은 밤과 우유를 넣어 무르게 끓인다. 블렌더에 갈아 다시 한 소끔 끓이고 소금으로 간하면 끝이다.

간단한 조리 과정이지만 맛이나 영양 면에선 가볍지 않다. 가을이 입안에 고소하고 부드럽게 가득 고인다.


밤 모양을 그대로 빚어내는 율란도 빠뜨리면 서운해서 삶아 긁어낸 밤을 체에 내렸다. 꿀을 섞어 뭉친 다음 동글동글하게 떼어 손끝으로 살짝 집어주고 궁둥이 부분에 계피 가루를 묻혀 내면 그 감쪽같은 결과에 조형예술가가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약간의 손공을 요구하지만 막상 빚어놓으면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그렇게 호로록 먹어치우는 게 좀 허무하기도 해서 일부러 천천히 오물거리기도 한다.


밥을 더러 약식으로 해치운 날에 후식은 이렇듯 우아하게 즐겨보면 괜한 자책도 면할 수 있다. 부러 누가 마당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며칠간 떨어지는 밤톨은 청설모와 고라니, 날짐승 그리고 내 차지다. 이른 아침 가스 배달 온 기사님 손에 한 움큼 올려주었다. 오며가며 맞닥뜨리는 인연에게도 한 움큼씩 건넬 것이다. 절로 자상한 가을이다.


글·사진 양은숙(자연주의 생활 스타일리스트, <들살림 월령가> 저자)





도화지 밭


해산한 산모의 더운 숨이 잦아들자
참빗으로 곱게 빗어 넘긴 정갈한 밭고랑이
자유화를 그리기 위해 도화지를 펼쳤다.


알록달록 머릿수건을 쓴 화공들의 도열은 이미 회화다.


배추씨를 그리면 초록 잎이 켜켜로 포개진 장미 같은 배추가 피고
무씨를 그리면 롱 다리 숏 다리 각선미를 겨룰 무가 착지하고
쪽파씨를 그리면 매운 향내 탱탱하게 품은
푸른 파가 도도히 하늘과 대면할 것이다.


채색은 가을볕이 맡기로 내정되었다.
붉은 도화지 밭에선 무엇이라도 다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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