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OOD ESSAY_들살림 편지 밥상 위의 감초, 들깨
들깨 향을 워낙 좋아하는 데다 오메가 성분까지 함유되어 있다니 나의 들기름 사랑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나물을 무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겨울철 들기름에 재어 구운 김의 풍미는 밥이 어디로 사라졌나 싶게 이끈다.깨알은 갈아서 거른 뽀얀 국물을 탕에 넣어 먹기도 하는데, 추어탕이나 토란탕, 쑥국이나 시래깃국 어디나 이 들깨가루가 들어가면 마법 같은 맛으로 끌어올린다.
긴 줄을 서는 당번은 내 차지였다. 바글바글 끓는 엿물에 튀기거나 볶은 재료를 설설 버무려 납작하게 밀어 긴 자를 대고 썰어내는 퍼포먼스를 보는 즐거움이 고소하고 달콤해 기다림이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쌀강정, 땅콩강정과 함께 다락으로 모신 들깨강정은 봄 무렵까지 심심한 군입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타박 실어 딴 깻잎이 맛이 있겠니? 덕분에 깻잎 허브 테라피를 체험하게 됐잖아.’ 그러자니 더위도 성가심도 먼지 내려앉듯 나직이 내려앉더라. 마음이란 백지장처럼 가볍고 얇아 마음 길을 어느 결로 뒤집느냐에 따라 고통도 분노도 기쁨도 좌우하고, 쓰기에 따라 종지만 해질라치면 우주만 해지기도 하구나.
가늘게 채 썬 깻잎을 재빨리 튀겨 양념에 버무린 깻잎 자반은 사각거리는 소리와 고소함이 입과 귀를 즐겁게 해 두고 먹거나 누군가에게 선물로 들려주어도 향기로운 선물이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보약과 다름없는 가을볕이 들깨 송아리를 키우고 간들바람이 건드린 들깨 향기는 얼마나 아찔하게 코를 간질일지. 아무것도 보태지 않은 나는 그 볕이, 그 바람이 가담한 들깨잎 단풍의 황홀만 고대한다. 보물을 찾아라, 밤
그냥 두고 기다리면 ‘자연 분만’한 열매를 허리만 굽혀 주우면 그만이다. 줍고 돌아서면 또 떨어져 있고, 이쪽에선 안 보이던 밤이 저쪽에서는 보이는 흥미로운 보물찾기다. 밤 줍기는 유년의 할머니 댁에서의 소임이었다. 이른 아침녘에 뒷마당 비탈을 가보면 어김없이 밤알이 떨어져 있었다. 실하고 윤기 나는 열매였다. 보물찾기의 묘미를 그때 배웠다. 열흘에서 보름 남짓 이어지는 밤 줍기는 유년을 줍고 추억을 줍는 회상이다. 한자리에서 돌아 주웠는데, 금세 바구니 한 가득이다. 야생하는 토종 쥐밤이라 씨알이 가늘어 볼품은 없지만 고소함은 비할 바 아니다. 밤 역시 버릴 게 없는 식품이다. 겉껍질은 소갈이나 설사, 코피가 멈추지 않는 것을 치료하기도 하고, 밤송이를 끓인 즙을 발라 타박상을 치료하기도 한다. 밤 속껍질은 꿀에 섞어 얼굴에 바르면 피부를 급격하게 수축시켜 주름살을 펴게 한다니 게으른 나도 호기심이 생긴다. 하루에 밤 세 톨만 먹으면 보약이 필요 없다는 말처럼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어 허약한 몸을 보강하는 반면 많이 먹으면 살이 찔 수밖에 없다. 한번 붙들면 끝장을 보아야 자리를 터는 식성이니 올가을에도 허리가 1인치는 늘겠다. 그렇지만 역시 가을에는 밤 한 됫박은 내 몫으로 먹어주는 게 밤과 가을에 대한 예의이고 의식이다.
쪄 먹는 걸 기본으로 삼고 껍질을 벗겨 밥솥 위에 얹어 밤밥을 짓기도 하고 밤죽을 끓여 내기도 한다. 작년 구례 출장길에 들른 재래 장터에서 하얗게 말린 밤 채를 본 이채로움이 생각나 썰어 말려도 두었다. 음식의 고명으로 쓸 예정이다. 따끈한 죽이나 국물 음식을 가까이 하기 좋은 계절이다. 양파를 버터에 충분히 볶다가 삶은 밤과 우유를 넣어 무르게 끓인다. 블렌더에 갈아 다시 한 소끔 끓이고 소금으로 간하면 끝이다. 간단한 조리 과정이지만 맛이나 영양 면에선 가볍지 않다. 가을이 입안에 고소하고 부드럽게 가득 고인다. 밤 모양을 그대로 빚어내는 율란도 빠뜨리면 서운해서 삶아 긁어낸 밤을 체에 내렸다. 꿀을 섞어 뭉친 다음 동글동글하게 떼어 손끝으로 살짝 집어주고 궁둥이 부분에 계피 가루를 묻혀 내면 그 감쪽같은 결과에 조형예술가가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약간의 손공을 요구하지만 막상 빚어놓으면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그렇게 호로록 먹어치우는 게 좀 허무하기도 해서 일부러 천천히 오물거리기도 한다. 밥을 더러 약식으로 해치운 날에 후식은 이렇듯 우아하게 즐겨보면 괜한 자책도 면할 수 있다. 부러 누가 마당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며칠간 떨어지는 밤톨은 청설모와 고라니, 날짐승 그리고 내 차지다. 이른 아침 가스 배달 온 기사님 손에 한 움큼 올려주었다. 오며가며 맞닥뜨리는 인연에게도 한 움큼씩 건넬 것이다. 절로 자상한 가을이다.
도화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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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