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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6부 7
같은 날이지만 이미 저녁 6시가 좀 지난 무럽, 라스콜니코프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거처하는 집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곳은 라주미힌이 주선해준 바칼레예프 집 셋방이었다. 층계 입구는 한길 쪽으로 나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아직도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듯 걸음을 늦추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되돌아설 수 없었다. 이미 결심은 서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마찬가지다, 그들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하고 그는 생각해ㅔㅆ다. ‘그리고 나에 대해선 그전부터 괴짜 취급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의 옷차림은 말이 아니었다. 어제 밤새도록 비를 맞았기 때문에 온통 진흙투성이고, 찢어지고 구겨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악천후와 육체의 쇠약과, 거의 하루 꼬박 계속된 자기 자신과의 투쟁 때문에 거의 추악해 보일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가 간밤에 어디서 혼자 밤을 새웠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결심ㅎ만은 서 있었다.
그가 문을 노크하자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두네치카는 집에 없었다. 하녀도 때마침 집에 없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너무 기쁘고 놀란 나머지 처음에는 말도 잘 못했다.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아, 드디어 와주었구나!” 그녀는 기쁨에 겨워 말을 더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로쟈, 이렇게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너를 맞는다고 화내진 말아다오. 우는 게 아니라 웃고 있는 거니까. 넌 내가 울고 있는 줄 아니? 아니다, 나는 기뻐서 그러는 거야. 나는 이런 바보같은 버릇이 있어서 걸핏하면 눈물이 나오는구나.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생긴 버릇인데 무슨 일이 있으면 이내 눈물부터 나온단다. 자, 앉아라, 피곤하지? 다 알고 있다. 저런, 옷이 말이 아니구나.”
“어제 비를 맞고 다녀서 그래요, 어머니.....”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다, 괜찮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말을 막으면서 소리쳤다.
너는 내가 옛날 늙은이의 습관대로 쓸데없는 걸 귀찮게 캐물으려는 줄 알겠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나는 알고 있어, 다 알고 있다니까. 나는 요즘 벌써 이곳 풍습에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과연 이곳 사람들이 더 영리하다는 걸 똑똑히 깨달았다. 나 같은 게 어떻게 네 생각을 이해하고, 너한테 무얼 물어볼 수 있겠니. 너에겐 아무도 생각지 못할 여러 가지 일과 계획이 있고, 사상이니 뭐니 하는 것도 머릿속에 떠올를 테니까. 그러니 네 손을 잡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괴롭힐 수야 있겠니? 나는 말이다.....아아, 내가 왜 이럴까! 어째서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이것저것 마구 뇌까릴까.....나는 말이다, 로쟈, 잡지에 실린 네 논문을 벌써 세 번이나 읽었다. 드미트리 프로코피치가 가져다주었단다. 난느 그걸 보고 감탄했다. 정말 나는 바보였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어. 그 애는 이런 것을 하고 있었구나, 이것으로 내 수수께끼는 풀렸다! 학자란 언제나 그런 거다. 그 애 머리에는 지금 이 시각에도 무슨 새로운 사상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 애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데 나는 그 애를 괴롭히며 귀찮게 굴고 있었구나....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얘야, 읽기는 읽었으나 물론 알지 못할 것이 많더구나.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일 테지. 어떻게 나 같은 게 알겠니?“
”좀 보여주세요, 어머니.“
라스콜니코프는 잡지를 집어 들고 자기 논문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의 입장이나 현재 상황에 무척 모순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기가 쓴 것이 인쇄된 것을 처음 본 필자가 경험하는 그 야릇한 찌르는 듯이 감미로운 기분을 그도 역시 느꼈다. 더욱이 스물셋이라는 나이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뿐이고, 두 서너 줄 읽다가 그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무서운 우수가 그의 심장을 죄는 듯했다. 최근 두 세 달 동안 있었던 자기의 투쟁이 일시에 전부 되살아났다. 그는 혐오를 느끼며 논문을 탁자 위에 던졌다.
”그렇지만 로쟈, 내가 아무리 바보라 해도 네가 머지않아 요즘의 학자들 중에서 비록 제일 훌륭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훌륭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글쎄 네가 미쳤다고들 생각했으니, 이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니. 하, 하! 너는 모르겠지만.....그 사람들은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단다! 아무렴, 그런 천한 벌레 같은 자들이 어떻게 훌륭한 사람의 머릿속을 알 수 있겠니! 그러나 두네치카까지도 하마터면 그걸 곧이들을 뻔했단다, 정말 기가 막혀서! 돌아가신 네 아버지도 두어 번 잡지사에 원고를 보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시(詩)였고 - 내가 그 원고를 잘 간직해두었으니까 언젠가 너에게 보여주마 - 두 번째는 훌륭한 소설이었는데, 나는 억지로 아버지께 청해서 정서를 해드렸단다. 그리고 우리는 둘이서 제발 실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지만, 끝내 실리지 않더구나! 나는 말이다, 로쟈,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네 옷차림이라든가, 네 방이라든가, 먹고 있는 것이라든가, 신고 다니는 신발 같은 걸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늕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이 역시 내가 바보였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에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곧 네 머리와 재주로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그런 건 원하지 않고 훨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겠지.......“
”두냐는 집에 없나요, 어머니?“
”없단다, 로쟈. 그 애는 요즘 곧잘 집을 비우고 나만 혼자 남겨두는구나. 그러나 고맙게도 드미트리 프로코피치가 들러서 내 말벗이 돼주곤 한단다. 언제나 네 이야길 하는데, 그는 너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더구나, 로쟈. 뭐 네 누이가 나를 호홀히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아무런 불편도 없다. 그 애에게는 그 애의 생각이 있고, 내게는 또 나대로의 생각이 있으니까. 그애한테 무슨 비밀이 생긴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너희들한테 감출 게 하나도 없다. 하기는 나도 두냐가 무척 영리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이 어미나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지만....그러나 결국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구나. 지금도 로쟈, 너는 이렇게 와서 나를 기쁘게 해주고 있는데, 그 애는 어디로 훌쩍 나가버리고 없잖니. 돌아오면 말해주겠다, 네가 없는 사이에 오빠가 왔었는데 대체 어디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느냐고. 그렇지만 로쟈, 너무 내 비위를 맞추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형편이 허락하면....가끔 들러다오. 그렇지 못하면.....할 수 없는 일이고, 나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는 걸 아니까 여러 사람한테서 네 소문을 듣기도 하고, 그러고 있노라면 또 네가 나를 찾아줄 게 아니냐.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 지금도 이렇게 이 어미를 위로하러 와주었는데....나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또 이럴까? 제발 이 바보 같은 어미 생각은 말아다오! 아니, 나 좀 봐, 어쩌자고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만 있을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는 외쳤다. ”커피가 있는데 너한테 대접할 생각도 하지 않고! 늙은이는 제 생각만 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내 얼른 가지고 오마, 얼른!“
”어머니, 그만두세요, 난 곧 가야 하니까요. 난 그런 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제발 내 이야길 좀 들어주세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에 관해서 무슨 소문을 들으시더라도, 또 내 일로 누가 어머니한테 무슨 소릴 하더라도 어머니는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자기 말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말투에 신경을 쓰지도 않으면서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얘, 로쟈, 너 왜 그러니? 아니, 새삼스레 그게 무슨 말이냐? 도대체 누가 네 이야길 나한테 한다는 거냐? 나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다. 누가 와도 상대하지 않고 이내 쫓아버리겠다.“
”저는 말입니다, 어머니, 제가 언제나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걸 어머니한테 똑똑히 알려드리려고 온 걱예요. 그래서 지금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게 저는 기쁩니다. 두네치카가 없어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될 정돕니다.“ 그는 여전히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직접 어머니한테 말씀드리려고 온 거예요....설령 어머니가 앞으로 불행해지시더라도, 어머니의 아들은 자기 자신보다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는 걸 믿어주세요. 제가 냉혹한 인간이되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신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언제든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때라곤 없을 겁니다. 자, 이젠 됐어요. 저는 우선 이것부터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말없이 아들을 가슴에 꼭 품으면서 소리 없이 흐느꼈다.
”왜 그러니, 로쟈, 나는 도무지 영문을 무르겠구나.“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네가 우리한테 싫증을 느꼈는가 보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모든 걸 다 알았다. 너한테는 커다란 슬픔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더구나. 실은 벌써부터 나는 그걸 느꼈다, 로쟈. 이런 말을 하는 걸 용서해다오. 언제나 이런 생각만 하느라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잔단다. 간밤엔 두냐도 밤새도록 잠꼬대를 하며 자꾸 네 말을 하더라. 나도 몇 마디 듣기는 들었다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사형이라도 받으러 가는 것처럼 자꾸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얘, 로쟈, 넌 어디로? 너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니?“
”떠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럴 필요가 있다면, 나도 너하고 같이 떠날 수 있다. 두냐도 마찬가지지. 그 애는 너를 사랑한단다. 한없이 널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필요하다면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우리하고 같이 떠나도 좋다. 나는 기꺼이 그 여자를 딸로 맞을 용의까지 있다. 드미트리 프로코피치가 떠날 채비를 해주시겠지....그런데 ....대체 넌 어디로 ....가는 거냐?“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니.“
”아니, 오늘 당장 떠나는 거냐!“
영원히 아들을 잃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는 외쳤다.
”이러고 있을 순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반드시 꼭 가야 해요. .....“
”나도 따라가면 안 되겠니?“
”그럴 순 없어요. 그보다 어머니, 무릎을 꿇고 저를 위해 기도를 올려주세요. 어머니의 기도는 꼭 이루어질 테니까요.“
”그럼 너한테 성호를 긋게 해다오, 너를 축복해줄 테니. 자, 됐다, 됐어. 아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 그는 기뻤다. 아무도 없는 데서 어머니와 단둘이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몸서리치게 괴로웠던 그의 마음은 일시에 누그러진 듯했다. 그는 어머니 앞에 몸을 던져 그 발에 키스했다. 그들 모자는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어머니도 이제는 별로 놀라지 ㅇ낳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녀는 벌써부터 자기 아들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고, 이제 그에게 무서운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로쟈, 귀여운 내 아들, 로쟈“하고 그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는 너를 보니 어렸을 적의 너와 똑같구나. 너는 언제나 이렇게 내 곁에 와서 나를 껴안고 키스해주었지. 아직 아버지도 살아 계서서 가난에 시달릴 때 오직 너만이, 네가 같이 있어주는 것만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단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엔 몇 번이나 이렇게 서로 껴안고 산소 옆에서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아까부터 이렇게 울고만 있는 건 어미의 육감으로 너한테 불행이 다가오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저녁에,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네 눈초리만으로 모든 걸 알아차렸다. 나는 그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더라. 그런데 오늘도 너한테 문을 열어주고 네 얼굴을 보는 순간 드디어 운명적인 시각이 왔구나 생각했단다. 조랴, 로쟈, 너는 지금 곧 가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럼 또 와주겠니?“
”네, ....오고말고요..“
”로쟈, 화내진 말아다오. 꼬치꼬치 캐묻진 않겠다. 그런 걸 물을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나만 한두 마디만이라도 말해주렴, 어디 먼 데로 가니?“
”아주 먼 뎁니다.“
”그럼 거기에서 무슨 직장이라든가, 어떤 출세의 길 같은 게 있는 거냐?“
”모든 것은 하느님 뜻에 달렸습니다.....그러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라스콜니코프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부둥켜안고 절망 어린 눈길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자, 이젠 됐어요, 어머니.“ 여기 올 생각을 했던 것을 깊이 후회하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이게 마지막은 아니겠지? 설마 영원한 이별은 아니겠지? 또 와주겠지? 내일이라도?“
”오겠습니다, 오겠어요.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가까스로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하고 맑은, 따스한 저녁이었다. 날씨는 이미 아침부터 맑게 개어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서둘렀다. 모든 일을 해 질 무렵까지 매듭짓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스타시야가 사모바르에서 몸을 둘려 뚫어질 듯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누가 내 방에 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혐오감과 함께 포르피리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자 두네치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퍽 오래전부터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는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놀란 듯이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우뚝 섰다. 골똘히 오빠의 얼굴에 쏟고 있던 그녀의 눈길엔 공포와 한없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 눈초리만으로 그는 누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네 옆에 가도 좋겠니? 아니면 도로 나갈까?“ 하고 그는 자신 없는 어조로 물었다.
”나는 온종일 소피야 세묘노브나한테 가 있었어요. 둘이서 오빠를 기다렸어요. 오빠가 반드시 그리고 오실 것 같아서........“
라스콜니코프는 방 안으로 들어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나는 좀 쇠약해진 것 같아, 두냐. 피로해 죽겠어. 실은 이 순간만이라도 좀 냉정하게 감정을 억제하고 싶지만.“ 그는 의심쩍은 눈으로 여동생을 보았다.
”오빤 밤새 어디 계셨어요?“
”분명히 기억할 수가 없구나. 얘, 두냐, 나는 단호한 결심을 하려고 네바 강 근처를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그것만은 기억하고 있어. 거기서 모든 것을 해결해버리려 했는데....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다시금 의혹의 눈으로 두냐를 보면서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참 다행이에요! 우리도 역시 그걸 걱정했어요. 나도, 소피야 세묘노브나도! 그러니까 오빤 아직 삶을 믿고 계시는 거예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라스콜니코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믿고 있었던 건 아니야. 그렇지만 방금 나는 어머니와 껴안고 함께 울었어. 나는 믿지는 않지만 어머니한텐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드렸거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알 수가 없구나. 두네치카, 나도 여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머니한테 다녀오셨군요? 그럼 어머니한테 얘기하셨나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두냐는 외쳤다. ”그래, 결심을 하고 그걸 말하셨나요?“
”아니, 말하지는 않았다....입으로는. 그러나 어머니는 대강 아셨을 거야. 어머니는 밤중에 네가 잠꼬대 하는 소릴 들으셨어. 아마 어머니도 절반쯤은 알고 계시리라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내가 갔던 게 오히려 나빴는지도 모르지. 무엇 때문에 갔었는지 그것조차 모르겠어. 나는 비열한 인간이다. 두냐.“
”비열한 인간이라고요? 하지만 고난을 받으러 갈 각오는 돼 있겠죠? 오빠는 가시겠죠?“
”가겠다, 지금 곧. 나는 이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신자살을 하려고 했어, 두냐. 그러나 물 위에 몸을 굽히고 서서 이렇게 생각했지. 만약에 내가 여태까지 자기를 강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지금 이 정도의 치욕을 두려워할 건 없다고 말이야.“ 그는 생각을 앞지르며 말했다. ”그러나 이건 오만일까, 두냐?“
”오만이에요, 오빠.“
그의 흐릿한 눈 속에 불꽃이 번쩍 일어난 것 같았다. 자기가 아직도 오만할 수 있는 것이 유쾌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두냐, 너는 내가 물을 보고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고는 생각지 않니?“ 그는 보기 흉한 미소를 짓고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이렇게 물었다.
”아아, 로쟈, 그만두세요!“ 하고 두냐는 외쳤다.
2분쯤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아서 방바닥을 응시하고, 두네치카는 탁자 건너편에서 서서 괴로운 듯이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간 늦겠다. 가야 할 때가 왔어. 나는 이제부터 자수하러 ㅓ간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자수하러 가는지 나도 모르겠어.“
구슬 같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두냐, 넌 울고 있구나. 그런데 넌 나한테 손을 내줄 수 있겠니?“
”오빤 그런 것까지 의심하세요?“ 그녀는 오빠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는 이제부터 고난을 받으러 가시는 거니까, 벌써 죄의 절반은 씻어버린 거나 다름 없잖을까요?“ 오빠를 꼭 껴안고 키스하면서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죄라니? 무슨 죄?“ 그는 갑자기 광적인 흥분에 사로잡히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그 백해무익하고 더러운 이를,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돈놀이 노파를 죽인 걸 말하는거냐? 가난뱅이의 피를 빨아먹는 그따위 노파를 죽인 것만으로도 오히려 마흔 가지 죄를 용서받아야 마땅할 거다. 그게 죄란 말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그걸 씻어버리려고도 하지 않은 거야. 그런데 왜 모두 사방에서 ‘죄다, 죄다!’하고 떠들어대느냐 말이야. 이제야, 이런 쓸데없는 치욕을 받으러 가기로 결심한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 소심함과 어리석음을 똑똑히 깨달은 거다! 내가 이렇게 결심한 것은 오로지온 로마느이치 나의 비굴과 무능 때문이야. 그리고 또 어쩌면 그....포르피리가 권한 이익을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오빠, 오빠, 오빠는 무슨 말을 하세요! 오빤 남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셨느냐 말이에요!“ 두냐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누구나가 다 흘리는 피 말이냐!“ 그는 거의 정신없이 말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폭포처럼 흘리고 있고, 또 지금까지 끊임없이 흘러왔던 피 말이냐? 모든 사람이 샴페인처럼 흘리고 있고, 또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해서 신전에서 왕관을 받고, 그 후엔 인류의 은인으로 칭송되는 그 피 말이냐? 너도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보아라! 나는 인류를 위해서 선을 원했던 거야. 그리고 또 실제로 몇백 몇천의 선을 행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결국은 이런 우열한 짓 하나밖에 못했어. 아니, 우열하다기보다는 졸렬한 짓이 되고 말았다. 이 사상 자체는, 실패로 끝난 지금에 와서 생각하듯이 그토록, 그토록 우열한 것은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무슨 일이든 실패하면 반드시 우열해 보이는 거니까! 이 우열한 행위로 나는 나 자신을 독립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생활에 첫걸음을 내디딜 자금을 얻으려 했던 거야. 그렇게만 되면 그다음은 모든 것이 비교도 될 수 없는 커다란 이익으로 보상되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나는, 나는 첫걸음조차 제대로 지탱해내지 못했어. 그것은 내가 비열한 인간이기 때문이야!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 있어! 그러나 어쨌든 너희들의 견해를 따를 생각은 없다. 만약에 내가 성공했다면 모든 사람한테서 칭송을 받았을 테지. 그러나 난 지금 함정에 빠지고 만거야.“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에요. 절대로 그렇지가 않아요! 오빠, 오빠는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 형식이 틀렸단 말이냐, 심미적인 아름다운 형식이 아니란 말이냐?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수많은 인간을 폭탄이나 정규적인 포위 공격으로 살육하는 것이 어째서 더 존경할 만한 형식이라는 말이냐? 심미적인 공포는 무력(無力)의 첫 번째 징후야!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뚜렷이 이걸 의식한 적이 없었어.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내 행위가 범죄라는 걸 납득할 수가 없다! 나는 한 번도, 지금까지 한 번도 지금처럼 강하게, 지금보다 강한 확신을 가진 적이 없었어!”
피로에 지친 그의 파리한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말을 외쳤을 때 그는 문득 두냐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눈길 속에서 자기에 대한 깊고 깊은 고뇌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자기는 가엾은 두 여인을 불행하게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어쨌든 자기가 원인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두냐, 귀여운 두냐! 만약 내게 죄가 있다면 제발 용서해다오....하지만 내게 정말 죄가 있다면 용서할 수도 없겠지. 그럼 잘 있어라! 논쟁은 이제 그만두자! 갈 때가 됐다. 이젠 정말 갈 때가 됐어. 제발 부탁이니 내 뒤는 따라오지 말아다오. 나는 또 들를 데가 있으니까. 너는 지금 곧 돌아가서 어머니 곁에 붙어 있어다오. 이건 너한테 거듭 부탁한다! 내가 너한테 간청하는 가장 큰 마지막 부탁이다. 한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말아다오. 나는 어머니를 불안 속에 남겨두고 왔지만, 어머니가 극복해낼지 어떨지는 의문이야. 어머니는 돌아가시든가, 아니면 미쳐버릴지도 모르지. 꼭 옆에 있어다오. 라주미힌도 옆에서 도와줄 게다. 내가 말해두었으니까, 나 때문에 울 건 없다. 나는 설령 살인자라도 평생토록 남자답게 성실한 인간이 되도록 힘껏 노력할 테니까. 혹시 언젠가 내 이름을 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너희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은 하지 않겠다. 두고 보렴, 앞으로 그 증거를 보여줄 테니. 그러나 지금은 이것으로 이별이다.” 그의 마지막 말과 약속을 들었을 때 다시금 두냐의 눈에 일종의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는 급히 이렇게 말을 맺었다.
“아니, 넌 왜 자꾸 우는 거냐? 울지 마라, 울지 마. 이것으로 아주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아, 참! 잠깐만, 내가 잊었었군!”
그는 탁자로 다가가서 먼지투성이의 두툼한 책 한 권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펼치고 상아에다 수채화로 그린 조그마한 초상화를 책갈피에서 빼냈다. 그것은 전에 열병으로 죽은 하숙집 안주인의 딸이며 그의 약혼녀이기도 했던, 늘 수도원에 가고 싶어 하던 그 이상한 처녀의 초상화였다. 그는 잠시 동안 표정이 풍부한 그 병적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초상화에 키스하고 두네치카에게 그것을 내주었다.
“바로 이 여자하고 난 그 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길 주고 받았어, 오직 이 여자하고만.” 그는 생각에 잠기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 여자의 가슴에 많은 것을 들려주었어. 그게 나중에 그런 추악한 꼴로 실현된 거지. 하지만 근심할 건 없어.” 그는 두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여자도 너와 마찬가지로 동의했던 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여자가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지금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면서 두 토막으로 갈라져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별안간 자기의 우수 속으로 되돌아가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지만 나는 그걸 다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걸까! 나 스스로가 그걸 원하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나를 위해 그런 시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무의미한 시련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20년 유형 생활 끝에 갖은 고초에 시달려 백치와 다름없는 무력한 노인이 되어서 자각하는 편이, 어째서 지금 자각하는 것보다 낫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간다는 거지?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삶에 동의할 수 있겠느냐 말이야? 아아, 나는 내가 비열한 사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 오늘 새벽녘 네바 강가에 섰을 때 말이야!”
마침내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두냐는 괴로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오빠를 사랑했다! 그녀는 걷기 시작했으나, 50보쯤 걸어가자 다시 한 번 오빠를 보려고 뒤돌아보았다. 아직도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모퉁이까지 이르자 그도 뒤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마지막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누이동생이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닫자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화까지 내면서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고는 홱 모퉁이를 돌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심보가 나쁜 놈이야, 나도 알고 있다.’ 잠시 후 그는 두냐에게 화를 내며 손짓해 보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쩨서 그들은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는 걸까. 내게 그럴 만한 가치라곤 하나도 없는데! 아아, 만약에 내가 혼자뿐이며 누구 하나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고, 또 나 자신도 결코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 모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난 어떻게 될까. 앞으로 15년이나 20년 동안 내 마음이 완전히 꺾어져서 말끝마다 스스로를 살인강도라고 부르며 모든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고 훌쩍이게 될 거란 말인가? 그렇다,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다! 바로 그것을 위해 놈들은 지금 나를 유형 보내려는 거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거야. 지금도 놈들은 거리를 이리저리 싸다니고 있지만, 놈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비열한 아니면 도둑놈이다. 아니, 그보다 못한 천치야! 그렇지만 만약에 내가 유형을 면제받으면, 놈들은 일제히 의분을 느끼며 미쳐날뛸 테지! 아아, 저 모든 놈들이 왜 이다지도 미울까!“
그는 깊이 한 가지 생각에 골몰했다. ’대체 어떤 과정을 밟으면 내가 마침내 그들 앞에 무조건 굴복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확신을 가지고 굴복하는 일이? 하지만 또 어째서 그런 일이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으랴? 물론 그렇게 되게 마련인 것이다. 20년 동안의 끊임없는 압박이 철저하게 나를 때려누이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낙숫물도 돌에 구멍을 뚫는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갈 필요가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걷고 있느냐 말이야. 모든 것은 책에도 쓰여 있듯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고, 그렇게 말고는 어떻게도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는 어젯밤부터 아마 골백번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