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갠지스 강까지 가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우선 갠지스 강을 향하여 선 다음에 땅바닥에 엎드려서 자기 이마와 지면이 닿은 지점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그 지점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거기서 다시 엎드립니다.
역시 이마와 지면이 닿은 지점을 확인하여 일어선 다음에 다시 또 엎드립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여 갠지스 강에 도달한 다음에 목욕을 하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고생을 마다않고 신을 만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그들에 비해서 우리는 참 편합니다.
신을 만나려고 기를 쓰고 노력할 것 없이 신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신을 만나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압니다.
성경에 구세주라는 단어는 37밖에 안 나오는데 주님이라는 단어는 7,800번 나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났으면 그다음에는 예수님이 주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오신 것은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해결해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는 채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선발대 1만 8,000명이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혀 방비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개전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었습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싸우면서 한양까지 온 것이 아니라 그냥 행군했다는 뜻입니다.
서둘러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개성, 평양을 거쳐 명나라로 망명할 궁리를 했습니다.
백성들을 규합하여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유성룡이 그런 선조를 만류합니다.
“어가(御駕, 왕이 타는 수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이 얘기를 우리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잠시라도 우리를 떠나있으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 아닙니다.
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선조는 자기 발로 국토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통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어령 교수와 이재철 목사의 대담 형식으로 된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봤습니다.
주인 주(主)가 있으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 주(主)에 말 마(馬)자가 붙으면 주차장(駐車場)이라고 하는 ‘머무를 주(駐)’가 됩니다.
주인 주(主)에 나무 목(木)이 붙으면 ‘기둥 주(柱)’가 됩니다.
전신주(電信柱)라고 하는 주(柱)입니다.
사람 인(人)자가 붙으면 ‘살 주(住)’입니다.
주거(住居), 주택(住宅)이라고 할 때 쓰입니다.
주인이 있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셨으면 마땅히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목자, 왕, 신랑, 주인 등으로 나옵니다.
전부 의사결정권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는 ‘주인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