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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창조적인 댄스의 난무
테디 루즈벨트는 윌리엄 매킨리의 도움으로 1901년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에너지는 요즘 레그타임 음악에 확실히 반영되었다. 대통령이 젊다보니 음악도 힘이 있고 음악은 삶의 전체였다. 대부분의 소사이어티에서는 왈츠와 폴카를 췄지만 댄스 열풍과 경향에 대한 영감이 나타났다. 댄스가 다른 창조물들(새, 원숭이, 파리, 말 등)을 비유하여 새로운 춤들이 세기가 바뀌면서 이름이 나왔다. Bunny Hop(토끼처럼 뛴다), 터키 트로트(칠면조 트롯트), 호스 트로트(말의 트로트), 캉가루 딥 같은 춤이었는데 이런 춤은 젊은이들이 췄다. 이런 춤들은 오로지 개인적인 강인함을 이용한 위험한 춤이었다. 물론 젊은 여성들은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남자의 팔에서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젊은이들은 댄스 플로어에서 바디의 수직적인 정렬은 필요치 않았다. 결국, 죠지 버나드 쇼같은 사람은 “댄스는 수평적 욕구의 수직적 표현이다(Dancing is a vertical expression! of a horizontal desire)”라고 말했다.
뉴올리언즈는 미국에서 트렌드 세팅 도시로 불리워진다. 뉴욕에 있는 브로드웨이 극장은 죠지 코헨의 “Give my regards to Broadway"(You're Grand Old Flag""Yankee Doodle Boy" 같은 힘있는 레그타임 음악을 반영했다.
터키 트롯트라는 춤은 커플들이 룸의 끝에서 여성을 밑으로 내리는 동작이라 바티칸에서 승인하지 않아 관심을 끌었다. Grizzly Bear라는 춤은 회색곰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Texas Tommy라는 춤으로 알려졌다. 텍사스 토미는 린디 홉의 공중 트릭의 전신이 되었다.
경고 수준이 나올 무렵, 젊은 여성들이 춤을 추다가 밸런스와 콘트롤을 잃기도 했다. 이것을 남성들만 전통적으로 즐기던 경험, 새로운 문화적 자유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는 동안 뺨을 가까이하는 춤이 파트너 댄스로 일반화 되었고 사회적 장벽을 허물며 새로운 벤치마킹을 주도 했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최초로 만들어 하늘을 날아보려는 노력을 하는 동안 여성들은 다른 면에서 자유를 추구했다. 댄스플로어가 사회적 동등성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소가 된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남성들은 댄스의 완성을 위해 여성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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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Castles 부처
모든 것은 균형을 깬다. 그것이 댄스와 함께였다. 사교계의 올드 멤버들은 그것이 너무 많이 빨리 변화하는 것을 봤다. 젊은 사람들의 예의 규범을 보호하기도 하고 이끌기도 하는 커미티가 결성되었다. 의무사항의 하나로 커미티는 레크리에이션센터나 댄스홀에서 비난받을 만한 일 등에 대해 리포트를 만들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소사이어티가 댄스이벤트를 취소시킬 권한도 가지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받아들일만한 스탠다드를 수립해 놓아야 했다.
쇼 댄스 커플의 시대에 들어가 보자. 베이브 루스가 시카고 블랙 삭스를 암흑에서 구해냈듯이 버논과 아이린 캐슬 부처는 볼룸댄스를 구해냈다. 이 사람들이 댄스의 우아함과, 차밍, 철학적이고 화려한 재주를 보여주었다. 버논은 안무의 천재였다. 그들이 불우하게 비행기 사고로 죽기 전까지 20년 동안 볼룸댄스의 세계를 지배했다.
캐슬은 어떻게 하면 댄스를 그 사회에 넓게 어필하게 할 것인가에 인식했다. 캐슬은 대중적 소비를 자극하는 보수층으로부터 정열을 일으키는 탱고 같은 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볼룸탱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각 종목의 춤은 캐슬의 입맛에 맞게 우아함의 표준을 만들었다. 댄스를 소사이어티의 벽장에서 꺼내어 존경받을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캐슬은 탱고와 Hesitation Waltz로 멋진 공연을 했으며 대환영을 받게 되어 모두들 이를 따라했다. 댄스의 대가 Fred Astaire와 Ginger Rogers는 나중에 1939년 “The Story of Vernon and Irene Castle" 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1913년 해리 폭스와 Yanszieka Deusch는 시범 팀을 만들고 래그타임 음악을 슬로 페이스로 만들었다. 이 커플이 20세기 가장 대중적인 볼룸댄스를 발전시켰고 행진곡 풍의 운율을 스부드하게 만들었다. 해리 폭스는 Mr. Foxtrot으로 알려진 이 춤에 그의 이름을 빌려줬다. 물론 우리는 지금 이 춤을 폭스트로트라고 한다. 음악의 작곡자와 출판사가 바로 이에 호응했다. 옛날 3/4 튠이 4/4로 바뀌었고 새로운 튠은 가벼운 스피드로 작곡되었다. 여성 드레스의 밑 단은 1인치 올라갔고 발목이 보이게 하는 것은 지금 대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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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의 영향
파리는 아르헨티나 탱고의 세계의 관문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당시 독일과 경제적인 이유로 연대를 맺고 있었다. 독일은 아르헨티나 肉고기의 최대 고객이었다. 아르헨티나의 고립은 세계 1차 대전의 직접적인 결과가 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다른 춤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10년간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이 표현력 많고 괴팍스러우며 드라마틱하기도 한 이 춤은 여러 영화에서 루돌프 발렌티노에서부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까지 스타를 만들어냈다.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에서 알파치노를 어찌 잊을 것인가? 그 결과로 요즘은 점차적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처음에는 탱고 아르젠티노(스페인 풍)는 미국에서는 액티브한 소셜 댄스였다. 알젠틴 탱고는 여러 스튜디오에서 강습반을 열었고 볼룸댄스 대회에서도 인기 있는 종목이었다.
* 쿠바의 영향
식민지 시대 이후 초기에는 미국이 쿠바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전쟁의 폐해로 인한 경제적 상황이 미국회사들에게 맞았던 것이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의 4년 점령 후에 쿠바가 1902년 독립했다. 미국 회사들은 설탕 산업의 75%를 소유했으며 땅의 60%를 차지했다. 부유한 쿠바 엘리트들은 더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1920년 미국에서 Volstead Act라는 금주법이 발효되면서 미국은 드라이했고 쿠바의 관광산업은 붐을 이루었다. 하바나 같은 멋진 해변과 열대 기후는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목적지가 되었다. 이때 쿠바의 음악과 댄스가 거꾸로 미국과 유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13년경에 보인 룸바가 첫 번째였으며 볼레로, 맘보, 차차차가 뒤를 이었다. 이런 춤들은 나이트클럽이나, 호텔, 휴양지에서의 댄스 플로어에 잘 어울리는 춤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라틴댄스가 에너지 넘치는 스윙 댄스나 빠른 왈츠보다 배우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맘보가 뜨면서 관중을 위한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치열한 경합으로 맘보 대회가 열렸다. 이 오케스트라들이 계속해서 음악을 더 크고 낫게 작곡했다. 댄서들도 더 능숙해졌고 댄스플로어에서 도전할 것을 찾으려고 했다. 그 결과로 대중적인 맘보의 템포는 점점 더 빨라졌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좋았으나 나이든 사람들은 반발이 생겼다. 그 요구에 대답으로 쿠바와 멕시코의 오케스트라들은 그들이 “Polite Mambo"라고 부르는 음악의 4번째 비트를 나누거나 싱코페이트 한 것이다. 라틴 악기에서는 이렇게 비트를 나누거나 싱코페이트 할 때 어떤 소리를 낸다. 그것이 차차차로 들려서 차차차가 태어난 것이다. 이 춤은 맘보의 감각과 기본적인 다이아몬드 모양의 형태를 유지하며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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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Radio와 축음기
미국은 금주령 때문에 드라이해졌지만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는데 노력했다. 찰스턴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춤과 Black Bottom, Shimmy, Varsity Drag 라는 춤이 다시 한번 성직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무릎을 붙이거나 벌리고 흔드는 모양이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춤은 개별적인 해석과 자유스러움으로 여러 곳에서 성행했다.
1926년 3월26일, 사보이 볼룸이 개업했고 댄스계에 공중 돌리기가 다시 돌아왔다. 스윙댄스는 다른 춤보다 훨씬 운동에 가까웠다. 미국인들은 이 새로운 춤에 이름을 붙여보려고 했다 마침 1927년에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 이미지를 쓰기로 했다. 린디 홉은 이 새로운 스윙댄스의 리드미컬한 플라잉 스타일에 완벽하게 맞는 이름이었다.
시카고에서는 죠 올리버가 “King of Jazz"로 떠 올랐다. ”Baby"로 기록된 그의 그룹은 드럼을 Dodds가 맡고 트럼펫은 루이 암스트롱이 맡았다. 이들은 흑백 관중 모두를 즐겁게 했다. Xavier Cugat가 라틴아메리카 오케스트라를 조직했으며 Wayne King은 왈츠의 킹으로 등극했다. Guy Rombardo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음악으로 호평을 받으며 뉴욕의 호텔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오케스트라의 모든 것을 라디오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새로 발명된 축음기와 78 RPM의 납작한 디스크는 청취자와 댄서들에게 언제든지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인기 있는 곡들은 인기 있는 춤을 만들었다. 춤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더 이상 성직자들이나 귀족, 상류계급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미국은 경제, 엔터테인먼트, 스포츠의 모든 면에서 번창했다. 그러나 이 1920년대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고 1929년 10월 30일 주식시장이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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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America Cuts a Rug
1933년 금주법의 폐지는 다시 술이 넘치게 했다. 그러나 댄스 대회는 미국 전역을 통 털어 여전히 문이 닫혀 있었다. 미국인들은 레크리에이션과 엔조이를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들이 참고 지냈던 쓰라린 시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라디오는 싼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사람들은 집에서 응접실이나 거실에서 춤을 췄다. 미국 사전에 “Cutting a rug(카펫을 잘라라)라는 말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재즈 리듬을 집에서 즐겼다. 스윙이 번창했고 젊은 유대인 음악가 Benny Goodman은 왕으로 등극했다.
영화에 나왔다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이 댄스플로어에서 남성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져서 돌려지는 동작들은 위험하다. 이런 동작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연습을 해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트릭이 오늘날 린디홉 대회에서 많이 쓰지만 사교춤이나 나이트클럽에서는 쓰면 안 된다. 술을 마셨을 경우에는 특히 위험하다. 이런 동작을 연습할 때는 부상을 방지하게 위해서 감독자가 있어야하며 바닥은 푹신해야 한다. 대회에서도 그런 트릭을 쓰기 전에 부상이나 심지어 죽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제한된 의무사항으로 허락을 받도록 해야 한다.
대공황 시절 영화는 값도 쌌고 환영을 받았다. 스크린에 나온 Fred Astaire와 Ginger Roger만한 댄서들은 아무도 없었다. 댄스플로어에서는 그들의 아이돌들이 우열을 가리도록 떠들썩했다. Fred Astaire는 악명 높은 완벽주의자였다. 전형적으로 그는 안무를 찍기 전 스탠다드에 맞게 연습을 계속했으며 6개월을 보냈다. 다른 말 할 것도 없이 보기 좋은 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Fred와 Ginger의 마력에서부터 대공황의 암흑기까지 댄스에서 꼴사나운 면도 있었다. 댄스마라톤이라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끝까지 견디는 것이 댄스마라톤의 최종 목표였다. 글자그대로 댄서들은 돈이나 상에 죽다시피 했다. 1969년에 시드니 폴랙 감독이 Horace McCay라는 사람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에 댄스 마라톤이 나온다.
1940년대: 라틴 비트와 2차 세계대전
1929년에 일어난 대공황은 1939년에 가라앉았다. 온 나라는 경제적 번영과 회복의 길에 들어섰다. 공황의 막바지에 뉴욕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여기에 브라질 삼바가 선을 보인 것이다.
1930년대초에는 Fred Astaire와 Ginger는 Flying Down to Rio라는 활동 사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 삼바와 탱고가 나온다. Carmen Miranda라는 사람과 몇 몇 댄서들이 미국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Latin Lover, Heartthrob라는 라틴 뮤직이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39년에 대서양을 건넌 전쟁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확전되었다. 미국은 “I want you" 라는 문구로 2차 대전이 시작되었으며 수많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에 모였다. 또 한번 스커트의 밑단이 올라갔다.
미군 병사들은 자이브, 지터벅, 스윙을 대서양 건너 유럽에 전파했다. 미국 폭스트로트의 뉴앙스와 초기 라틴댄스도 대서양을 건넜다. 유럽의 댄스 교사들은 다시 한 번 미국 댄서들의 공세를 방어해야 했다.
영국의 댄스교사들은 이 춤들에 대해 연구했다. 스탠다드와 인터내셔널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 1950년대: Rock & Roll의 공습
1950년대는 춤보다 음악이 더 두드러진 시대였다. 락엔롤이라는 음악이 나온 것이다. 스윙댄스의 여러 가지가 지터벅 카테고리로 들어갔고 락엔롤 음악은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없애는 하이라이트였다. 흑백의 아티스트들이 같이 노래했다.
예외적으로 맘보와 차차차였다. 1950년대에서 60년대로 들어서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댄스 리듬이었다. 1957년에 Jerome Robbins의 West Side Story는 브로드웨이에서 대 히트를 기록했고 1961년 영화로 나왔다. 20세기 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는데 미국 서부의 이민자들간의 투쟁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맘보의 극장식 버전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미국에 라틴댄스를 더 보급시킨 계기가 되었다.
* 1960년대: 솔로 댄싱
1960년대는 개인적인 표현으로 솔로 댄싱이 성행했던 시대였다. 트위스트라는 춤이었는데 세계를 강타했다. 1940년대의 댄서들은 이것을 터치 댄스의 종말로 자문해봤다. 또 한번 댄스 역사에서 새로운 유행이 나타난 것이다.
가수이자 작곡자였던 Wilson Pickett는 “The Land of a Thousand Dances"를 레코드로 냈다. 매주 새로운 댄스가 나타났는데 새, 곤충, 짐승, 부족의 용사, 음식의 종류, 등 여러 가지였다. 60년대에 미국은 존 F 케네디와 마티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 어려운 시기였다. 60년대의 후반 절반은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때까지 Woodstock이 있었고 볼룸댄스는 할아버지 세대에서나 하는 춤으로 잊혀져 갔다.
60년대 초반을 뜨겁게 만든 트위스트는 서로 터치하지 않은 최초의 파트너 춤이었다. 처음에는 장갑을 낀 터치댄스였다. 그러나 60년대의 거친 열풍은 자신의 것을 보여주는 개인적인 표현에 초점이 맞춰졌다. 댄스는 유행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날뛰게되었다. 다행히 터치 댄스의 제안자로서 개념은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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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디스코와 허슬
70년대를 통해 뉴욕의 히스패닉 공동체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그들 문화에 뭔가 신나는 일이 벌어졌다. 1940년대~60년대의 라틴댄스는 클래식 라틴댄스로 치부되었다. 젊은이들은 뉴욕의 나이트 클럽 춤을 추고 싶었고 할아버지들의 춤은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재즈음악의 큰 영향과 컴퓨터로 때려주는 새로운 뮤직이 수면 위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디스코였다. 맘보와 차차차는 안 맞았다.
아메리칸 허슬은 디스코 춤의 첫 번째 형태였다. 그런데 이 버전은 지루해서 나이트클럽에 가는 사람들은 디스코 사운드에 양념을 쳤다. 감각적인 힙 액션이 토착의 룸바와 보사노바에 더해졌고 메렝게의 8박자 무브먼트도 곧 추가되었다.
라틴 허슬이라는 이 춤은 대단한 인기였다. 히스패닉 사람들은 뉴욕스타일 디스코에서 제한된 플로어 공간에 도전을 경험했다. 푸에르토리코 사운드는 히스패닉 사회에서 여전히 인기였다. 멕시칸과 콜롬비아인들도 히스패닉 문화를 가미하면서 코스모포리탄 분위기의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멕시코, 콜롬비아, 쿠바, 푸에르트 리코의 각각의 문화적 영향이 새로운 소스로서 가미되었다. 살사라고 불리는 음악과 춤이 새로운 향으로 섞였다. 살산은 공간적 제한에서 원래의 맘보 같은 춤이다. 콜롬비아에서 온 쿰비야의 요소와 쿠카라차, 멕시칸 사이드 브레이킹 액션은 살사의 소스에 가미되었다. (쿠카라차는 Cockroach라는 뜻으로 바퀴벌레를 말한다)
허슬의 최종적인 발전은 ‘뉴욕 허슬’ 또는 ‘3 카운트 허슬’이었다. 라틴 허슬은 웨스트코스트스윙의 요소를 포함시켰다. 이런 특성이 언더 암 턴을 많이 하게하고 자국을 따라 밟게 하였다. 디스코 음악은 템포를 늘리고 춤은 싱코페이션을 가미했다.
1980년대: 레이건 시대
로날드 레이건은 미국의 40대 대통령이었다. 그와 영부인 낸시는 백악관에 우아함과 보수주의를 가져 왔다. 대통령은 볼룸댄스의 스폰서, 친구이자 변호인이었다. 레이건은 9월 셋째 주를 볼룸댄스의 주간(National Ballroom Dance Week)으로 선포했다.
1980년대는 1970년의 난잡함이 난무하면서 고통을 겪은 시기였다. 두가지 위험한 사회적 질병인 HIV-AIDS가 사회 문제화 되었다. 70년대와 비교하여 볼 때 인간관계가 달팽이처럼 느려졌다. 사람들은 그전에 섹스할 때 보다 미리 조심하게 되었다. 섹스를 하기 전에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치 사회적 분위기도 그전의 스탠다드로 보수화되었다. 육체적인 관계에서의 슬로다운은 커플간의 육체적인 컨택트와 즐김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했다. 볼룸댄스가 늘 그렇게 하는 수단이 되었었다. 같이 춤춘다는 것은 두 사람 간에 화학작용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1990년대에서 현재까지
볼룸댄스, 스윙댄스, 탱고, 라틴댄스의 확산은 20세기 끝과 21세기 초를 장식했다. 실제로 미국ㄱ의 모든 대학에서는 볼룸댄스클럽을 구성하고 있으며 대회에 나가는 팀도 있다.
알아둬야 할 중요한 것으로서:
- 파트너 댄싱은 사회적 성적 동등성을 끌어올렸다.
- 미국의 관광객들이 라틴음악과 리듬을 다시 미국으로 들여 왔다.
- 공황기 때 집에서 즐기고 난 이후로 미국인들은 볼룸댄스로 돌아왔다.
- 1960년대에는 춤이 댄스 플로어를 둘로 나뉘게 했다.
- 1970년대의 실험은 1980년대의 보수화를 가져왔다. 파트너 댄스는 “어떤 사람을 알게 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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