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가장 뜨거운 얼굴.
그는 주름 하나, 숨소리 하나에도 인생을 담아낸다. 아무리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 속의 인물이라도 최민식이 연기하면 마치 어딘가에 꼭 그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현실성이 느껴진다.
조폭 같은 검사, 북한 특수요원, 아내의 불륜에 괴로워하는 소시민, 사랑에 빠진 삼류 깡패, 천재 예술가, 15년동안 오직 군만두를 먹은 사내, 짐승 같은 연쇄살인마, 그리고 역사적 영웅이 최민식의 얼굴을 나눠가졌지만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그릇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크고 깊은 배우다.
CGV 피카디리 1958 - 2010년대 명예의 전당 배우 선정
대한민국의 배우.
한국의 상징적인 대배우이자 설경구, 송강호와 함께 2000년대 충무로를 대표하는 연기파 트로이카 중 한 사람으로 특히 2003년 주연작으로 출연했던 영화 올드보이가 전 세계적으로 초대박이 나면서 글로벌 톱스타 반열에 올랐고 트로이카 중 한 명인 2000년의 설경구처럼 2004년에 단독으로 10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이력이 존재한다.
상세
주연작으로는 넘버 3, 쉬리, 해피 엔드, 파이란, 취화선,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 친절한 금자씨, 악마를 보았다,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루시, 명량, 천문: 하늘에 묻는다, 파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등이 있다.
2022년에는 사랑과 이별 이후 무려 25년 만에 디즈니+ 드라마인 카지노로 성공적으로 안착, 드라마에서도 대중적 성과를 동시에 거둔 배우이다.
설경구, 송강호와 함께 2000년대, 2010년대까지 충무로를 대표하는 연기파 트로이카 중 한 사람으로 송강호와 함께 2020년대에 와서도 엄청난 티켓파워와 에너지를 가진 배우로서 대한민국 최정상의 위치에서있는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배우이다.
1980년대 초반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이후 1990년대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단역으로 데뷔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그 이후로 MBC 드라마 서울의 달로 이미지 변신을 선보였고, 영화 넘버 3에 출연하면서 충무로에 자신의 연기력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던 작품이 영화 쉬리이다. 조선인민군 간첩 박무영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이 작품을 계기로 최민식은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고, 그동안 한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한석규를 넘어서는 상당한 관심을 받게 되어 슬럼프를 완전히 씻어낼 수 있었다. 한석규가 쉬리 이후로 공백기를 가지고 있는 동안 송강호, 설경구와 함께 충무로를 이끌어갔다.
한국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3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2회, 영화부문 대상 1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2회와 남우조연상 1회를 수상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옥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평가 및 위상
2020년대 현재 칸의 남자라고 불리는 배우 송강호 이전에는 최민식이 칸의 남자였다. 1999년 영화 해피 엔드로 칸 국제 영화제에 처음으로 초청받았고, 2000년대에 넘어와서 2000년대 초반 취화선, 올드보이로 무려 2년 연속 칸 국제 영화제에 초청받는 경사를 누리기도 하였고, 2년 후에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 또한 칸 국제 영화제 초청되면서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만 무려 4편이나 되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사실상 송강호가 칸에 처음으로 진출하기 이전에는 최민식이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칸의 남자라고 불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은 영화쪽에서만 비중을 두고 큰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예전엔 연극, 드라마에서 수많은 주인공과 조연을 했던 배우이다. 드라마로는 야망의 세월의 꾸숑, 서울의 달의 박춘섭, 제4공화국의 김대중, 다시 만날 때까지의 한석진, 아빠는 시장님의 한진국, 사랑과 이별의 김창기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99년 쉬리를 통해 슬럼프를 완전히 씻어내고, 1999년 후반 영화 해피 엔드를 시작으로 2001년 영화 파이란, 2002년 영화 취화선, 2003년 영화 올드보이, 2004년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 2005년 주먹이 운다까지 영화에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력, 연기력까지 3마리 토끼를 연타석으로 성공시키면서 송강호와 함께 확실하게 주연자리를 잡았으며 1999년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충무로 르네상스 시대를 연 배우 중 하나로 압도적인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999년 해피 엔드에서는 전도연과 애정에 목마르면서 집착에 빠지는 캐릭터 서민기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파이란 에서는 건달 깡패 이강재역을 연기하면서 위장결혼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스토리의 이야기로서 영화의 흐름과 극을 잘 이끌어갔다는 평가를 받았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시키면서 그해 2001년, 2002년에 연이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점점 충무로 트로이카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다음해인 2002년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 역할을 맡으면서 또 한번의 좋은 연기를 보여준것과 동시에 비공식 짤로 유명한 아햏햏을 탄생시켰다.
다음해인 2003년 영화 올드보이는 전국 33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한국 3대 영화상인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등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옥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해외에서도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해피 엔드, 취화선,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에 3번 초청된 배우이기도 하다. 다음해인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에 출연하면서 류승범의 상대역인 강태식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게 되었고, 또 한번의 칸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칸에 진출한 것만 무려 4번째인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주먹이 운다를 끝으로 2000년대 후반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면서 관객들에게 점점 잊혀져가는 배우가 되었으나 2010년 영화 악마를 보았다로 악마 역할의 연쇄살인마 장경철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2012년에는 충무로의 풍운아로 등장한 하정우와 함께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로 첫 호흡을 맞추면서 찰떡같은 케미를 이루었고 흥행도 472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성공하였다. 이 작품으로 최민식은 올드보이이후 9년만에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3년 영화 신세계에서 골드문을 장악하기위해 조직폭력집단 내에서 신세계 프로젝트 임무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는 캐릭터 강형철역을 맡으면서 이정재, 황정민과같이 영화 속 내에서 밀리지 않는 존재감과 연기를 보여주었다. 2014년에는 영화 명량이 1761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그동안 연이 없었던 천만 배우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2000년대 충무로 르네상스를 시대를 연 트로이카 3인방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모두가 천만 배우가 되었다.
연기 활동
"...이번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 참석하면서, 부산에서 어제 새벽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20대, 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때 영화를 하고 싶다, 연극을 하고 싶다, 그렇게 꿈을 키웠던 시절의 최민식과 지금의 최민식이 과연 어느 정도 맞닿아있는지를... 정말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너무 많이 변했고, 너무 많이 물들었고, 좋은 작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이런 것부터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그 여백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서 지켜보겠습니다. 세상 살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항상 느끼고, 그렇게 자기위안 삼아 보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 여백을 지켜보도록 노력하고, 더 좋은 작품으로 여러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5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수상 소감 中
최민식은 1962년 5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서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의 아버지와 경기도 의정부시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는 연기에 관심이 없고 학교 생활에도 별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삼선중학교 2학년 때 13번 좌석버스를 타고 잠이나 자러 가깝기도 하고 외가가 있던 의정부에 있는 중앙극장에 가곤 했는데 처음에는 정말 잠만 자다가 무심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주연의 '스타 탄생'을 보고 처음으로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에 우연히 원로 영화감독인 하길종의 에세이인 '백마 타고 온 또또'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고 영화 관련 서적은 닥치는대로 읽었다고. 그렇게 무작정 영화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는데 신일고등학교에 다니던 형의 주선으로 당시 명동에 있던 필립이라는 경양식집에서 신일고의 국어교사이자 영화평론가인 변인식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영화감독은 공부할 게 많으니 학생 때는 일단 공부에 전념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영화감독의 길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는 어쩌면 뻔한 충고를 받고 그 진지함에 감동을 받아 대학에 입학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큰 싸움에 휘말려 얼굴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데, 성형외과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로 했다. 연극영화과는 실기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고3 때 '극단 뿌리'에 137,000원을 내고 3개월 연구단원으로 입단했다. 이때 생애 첫 연극인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에서 주인공 조지 역을 맡으면서 데뷔했다. 그때부터 연기에 두각을 나타냈는지 정식 단원으로 입단하라는 제의도 뿌리치며 이듬해 결국 13.7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82학번으로 입학한다. 당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는 1학년 때부터 연극에 출연하도록 했고 최민식도 테드 모젤의 '즉흥극'에서 연출가 역을 맡았다. 이를 지켜 본 안민수 교수가 배우가 될 것을 권유했고 이후에 '작은 여우들', '내 아들을 위하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 여러 연극에 참여하며 미친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