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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백화산 풀벌레☆]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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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산 풀벌레]
박용하 시조집 / 한국대표정형시선 033 / 도서출판고요아침(2015.04.06)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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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산 풀벌레
박용하
백화산 바라보며 깊은 잠이 드신 뒤로
자식들 찾아와도 아무 기척 없으시고
두 그루 늙은 소나무만 부모님을 뫼시네
앞뜰에 농토 사서 무척이나 기꺼워하며
날 새면 부지런히 흙과 함께 사시던 곳
여지껏 그 땅의 쌀로 메를 지어 올립니다
벌초 때나 한 번 찾고 훌쩍 뜨는 자식들
이승 인연 끊었다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웃자란 잡초 더미 속에 아프게 우는 풀벌레
설날 아침에
박용하
어머니 장롱에서 내어주신 설빔 입고
어른들 등 뒤에서 무릎 꿇고 절하던 날
이제는 잊을 만도 한데, 어제 같이 떠오른다
철들면서 객지로 돌아 고향을 멀리하고
절 받던 부모님도 세상 훌쩍 뜨신 후에
세배를 받고만 있다, 세배할 곳 모두 잃고
세월이 넘겨준 자리 어릴 때 조부님 자리
아버지가 물려받고 나에게 또 물려준 자리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른들 생각날 줄을
아버님 편지
박용하
획 하나도 조심해 그라
타이르시던 아버님 교훈
반백 년 세월이 가고
나도 이제 늙었지만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제같이 떠오른다
내 편지 틀린 글자
정성스레 고쳐 보내주시고
막내까지 제금 나도
항상 마음 못 놓으시던
빛바랜 아버님 편지
오늘도 걱정하신다
어머님 빨랫줄
박용하
냇물에 빨아 널은 열한 식구 옷가지들
빨랫줄도 바지랑대도
힘겨워 휘청거렸지
어머니
살아온 새월,
떠나시니 더 생각나
사립문 옆 조각자나무
구부정한 허리통에
철사줄 칭칭 동인 휼터는 그대로 남아
무릎에 파스 붙이던 어머니가 보인다
감나무 심으며
박용하
생생하다 어릴 때 감접 붙이시던 할아버지
눈이 터 기뻐하시며 마당가 거니셨지
먼 훗날 감 따는 손자 그때 벌써 그리셨나
집터에 그 감나무 지난 세월 감고 서서
연두색 예쁜 잎새 정을 담아 보여 주지만
늙어서 기력 없다고 풋감으로 떨군다
나도 이제 심고 가리라, 몇 그루 감나무를
잎 피고 꽃도 피고 푸른 감 절로 둥글어
갈 하늘 환한 등불을 밝혀주길 기다리며 ……
이원역* 지날 때마다
박용하
이원면 지정리로 시집 가신 작은 고모님
신혼의 단꿈도 깨진 새댁으로 세상 떴다
온 가족 애통해 했다 너무나 짧은 삶에
지금은 기차도 서지 않는 시골 간이역
마중 나올 사람도 기억할 사람도 없는데
이원역 지날 때마다, 자는 나를 깨우나
*경부선 옥천역과 영동역 사이에 간이역.
어머니의 메아리
박용하
초가지붕 굴뚝 연기 끊길 듯이 피어놀라
저녁밥 지어놓고 날망*서 날 부르던 음성
저 앞 산 메아리처럼 내 귀청 울려주던……
* 산마루의 방언
들 찔레꽃 ․ 가뭄
박용하
찔레꽃 필 때가 가뭄 심하단 옛말 있다
80년대 어느 핸가 극심한 한발이 들어
양재천 물 푸던 양수기 밤새워 통통거리고
게리마을 포이마을 잔디마을 원터마을
일력동원 모내기 때 파란 물감 퍼지던 곳
지금은 빌딩의 숲이 가뭄 모른 채 크고 있다
목련꽃 손가락마다
박용하
황홀한 드래스 이복
새봄 일찍 맞으려고
겨울 목련 손가락마다
털 골무를 끼고 있다
그 적공積功
막지 못한다
세한의 매운 날씨도
세월 1
- 입추 무렵
박용하
쓰름매미 울음소리에
찌던 더위 물러가나
빨간 고추 일광욕 마당에
메밀잠자리 볕을 쬔다
텃밭에
갈 무 배추 가시는
두런두런 부모님 음성
베란다 한란
박용하
몇 달 뜸들이다 뽑아 올린 꽃대인가
어린 나비 날아와서 날개 접고 앉아 있다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세밑 엿보다 찾았을까
길러준 정 고맙다고 수줍게 미소 머금고
세상 구경 잠시 하다 봄 오기 전 떠난다고?
속내는 말하지 않고, 청향만 뿜고 있다
영동역에서
박용하
고향엔 유년도
다 떠나고 없었다
옛일들 매달리는데
모두가 낯선 얼굴
골목 안
늙은 은행나무만
나 아는지 굽어본다
동창 몇 남아 사는
백화산, 천마산 기슭
영동역전 올갱이국집
소주잔에 내리는 노을
서울행
무궁화 열차가
떠날 시간 재촉한다
소 걸음牛步
박용하
내 시집 받으시고 원로시인이 내린 말씀
시詩를 지키기란 만리장성 독수사위 대기만성萬里長城 獨守四圍 대기만성 고졸高捽한 우보牛步이기를
시 한 편 짓는다는 것 어려움은 커가네
촌각을 다투는 속도전의 요즘 세태
소걸음牛步 걷더라도 시 한 편 받고 싶다
깊은 뜻 되새기면서 누구나가 가슴에 답을
땅끝 전망대에서
박용하
이름마저 땅끝인가! 아득히 멀고멀어
몇 십 년 벼르다 왔네, 발 디딘 갈두리*를
하루면 왔다 가는 길, 파도만 올렸었네
구름 치마 두른 낙도落島 반갑다고 다가온다
보길도 뱃머리서 어부사시사 들려오는
땅끝은 큰집이었다 세간 나간 섬, 섬들의
*땅끝마을
어릴 때 봄날
박용하
전등 같은 살구꽃이 골목길을 밝혀주고
벌 나비 꽃을 찾아 잔치가 한창인데
엿장수 가위 소리가 멀리서 다가온다
봄볕 내린 앞마당에 병아리를 종종대고
꽃밭 속 작약 난초 수줍게 머리 들고
토종벌 바쁜 봄나들이 출입문이 비좁다
아침 까치 인사하면 기쁜 소식 기다릴 때
우체부 자전거가 마당으로 들어서면
만주 간 아버지 편지, 온 가족 봄날이다
잃어버린 신발
박용하
잊히지 않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라
내 곁에 머물다 간 손떼 묻은 나의 분신
헤어져 답답한 얼굴이 눈에 밟혀 아프다
송별회 자리에서 잃어버린 내 동반자
누군가 곤드레 되어 너를 끌고 갔구나
가출한 아이를 찾듯 하루 같이 기다린다
허약한 나를 만나 조심조심 발 옮기고
길흉사吉凶事 외출 때면 늘 함께 다니던 너
그 모습 지우지 못하고 또 한 해가 저문다
떠나가는 길
박용하
단정히 치장하고 고운 옷 갈아입고
마지막 몸가짐이 저리 아름다울 수 있나
가는 길 주황색 카펫, 눈부시게 고운 것을
봄부터 새잎 달고 여름 가을 짧은 생애
도로에 비켜서서 청색 차일遮日 드리우며
답답한 회색의 도시, 녹색으로 주던 안식
말없이 누워 있는 잠든 몸이 뒤척이네
꼬리 물고 찾아오는 그리움은 말 못해도
겨울로 가는 길목에 너희를 어찌 잊을 건가
어떤 초병
박용하
오로지 밤거리를 지키는 보초병이다
늦은 밤 이른 새벽 출퇴근 길 걱정도 하며
수많은 차량과 행인 안전 위해 봉사 한다
겨울밤 외로움을 빛살 뿜어 발산하고
눈보라 비바람도 개의치 않는 불침번을,
해 뜨면 임무 마치고 소음 속에 눈 붙인다
영화천*에서
박용하
1. 왜가리
물벼룩 숨어버린 영화천에 발 담그고
박제 같은 이서 잇는 왜가리 한 마리가
골똘히 걱정을 하네, 어디로 가야할지…
2. 들쥐
산책길 바꿔 타고 들어선 개천 뚝 풀밭
놀란 들쥐 질겁하고 굴로 숨는 잽싼 도망
이 도시 어떻게 사나 날름 혀를 내두른다
*수원시 장안구 정지동과 영화동을 흐르는 개천, 서호로 들어감.
내 얼굴 왜 볼 수 없을까
박용하
등은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못 본다 하자
얼굴은 왜 평생 볼 수 없을까 바로 앞에 있는데
거울 속 허상만 보고 내 얼굴인가 살아 왔다
마음은 늙지를 않아 늘 젊을 때 모습 같지만
동창들 주름진 얼굴에서 내 얼굴을 만난다.
세월 속 내 얼굴이다 끝내 못보고 헤어질
입추立秋 무렵
박용하
사람들 더위 피해 휴가 간 7,8월에
불볕에서 키 키우고 몸 불리던 농작물
여름의 막바지에서 가을맞이 바쁘다
말복 무렵 벼꽃은 바람 불어 하얗고*
적산온도** 채우려고 안간힘 다하는…
가을에 황금 결실로 기쁨을 안겨준다
* 양이시楊以時의 작품 한 구절(稻花風際白)
** 생물의 생육기간에 필요한 일평균 온도의 총계(일 평균 온도 부족할 시에는 수확량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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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첫 시집『선운사 이팝나무』를 내고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엮었다. 떳떳이 내놓을 수 있는 작품도 별로 없고 그나마 수량도 적어 초라했다. 그래도 마냥 미룰 수 가 없고, 또 지나가면 후회가 될 것 같아 부끄럽지만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여기저기 잠자고 있는 작품들을 모으고 최근 쓴 것들을 합해서 같이 정리했다.
엮고 보니 역시 새롭지 못하고 거칠고 미숙함이 많아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몸은 비록 노쇠하여 가지만 앞으로는 젊고 새롭게 시를 써야겠다. 황혼에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나도 빛나는 좋은 시 한 편을 얻고자 온 정성을 쏟으려 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삶의 바람이며 꿈이다.
이번 시집을 내는데 많은 격려를 해주시고 부족한 작품 해ㅔ설을 써주신 이지엽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수원 정자동에서
박용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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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 時調集 [※백화산 풀벌레※]
[ 해설 ] -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시적 상상력과 생명성
이 지 엽(시인, 경기대 교수)
1.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아날로그적 삶의 시학
박용하 시인의 작품에는 따뜻함이 있다. 동시에 차분히 정제된 단아한 사유가 있다. 따뜻함은 가족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잘 정돈된 삶의 사유들은 독자로 하여금 아득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훈은 시인에게 생의 좌표가 되어 하나하나 그대로 살아난다. 할아버지께서는 한학의 가르침까지 물려받았다. 그 뜻을 오늘의 상황들에 맞추기란 힘들 것이다. 급격하고 임기웅변적인 현대의 디지털적인 삶이 아니라 더디 가면서도 하나씩 곱씹어 보는 아날로그적 삶의 기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기꺼이 자신의 삶은 물론 철학까지도 이 아날로그적 기준에 맞추고자 한다.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아날로그적 삶의 시학이 바로 박용하 시인의 작품세계 요체다.
획 하나도 조심해 그라
타이르시던 아버님 교훈
반백 년 세월이 가고
나도 이제 늙었건만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제같이 떠오른다
내 편지 틀린 글자
정성스레 고쳐 보내주시고
막내까지 제금나도
항상 마음 못 놓으시던
빛바랜 아버님 편지
오늘도 걱정 하신다
-「아버님 편지」전문
시인은 아마도 아버님이 보내신 젊은 날의 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컴퓨터 앞에서 떠듬거리며 詩를 쓸 때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획 하나도 조심해 그라” 타일러 주시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편지의 오탈자를 하나씩 지적해주시던 세밀함과 이제쯤이면 괜찮다 싶을 정도로 장성했을 때에도 늘 걱정과 염려로 마음을 쓰시던 자상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주 사소하여 그런 일이 있었던 것조차 잊어버렸을 법한 일들까지도 세밀하게 기억하여 시상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시인의 마음에는 형식과 규율을 강조하던 전통적 사고를 넘어서는 따뜻한 애정이 있다.
어머니 떠나시고 영정 한 장 방 지킨다
안 계셔도 방 따습게 불 넣고 켜놓았다
감도는 공허한 마음, 차마 문 못 닫겠다
늘 앉으셨던 식탁, 그대로 비워두고
때마다 내 앞으로 밀어 놓던 반찬 그릇
호수에 물결이 일 듯 다가오는 어머니
아들 며느리 보고 싶어, 경노당도 가고 싶어
언젠가 오시려나, 꽃바람 건 듯 타고서
목련 꽃 환한 샛길로, 꽃핀 듯 오시려나
-「어머니의 빈자리」전문
시인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님의 살아생전 식탁의 자리를 아직껏 비워두고 있다. 지극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식사를 할 때마다 반찬 그릇을 밀어놓던 어머니, 세상의 어머니들이 자식 앞에서 늘 그렇게 하건만 이를 “호수에 물결이 일 듯”자주 생각하는 시인들은 아주 드물다. 봄이 와 목련꽃 환히 핀 것만 봐도 그 샛길로 꽃이 핀 듯 오실 것 같다고 얘기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레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용서를 빌 길이 없다
나에게 자주 하시던 조부님 말씀 한마디
“소년이로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
용서를 빌 길이 없다, 허송세월 다 보냈으니
3. 과묵
바위같이 말이 없으시고 늘 듣기만 하셨다
하물며 남 헐뜯는 말씀 평생 못 들었다
살림은 가난했어도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셨다
-「할아버지 생각 셋」부분
아마도 할아버지는 시인에게 소학이나 명심보감, 사서 등 한학의 소양 교육을 시시때때로 하였음직하다. 시간을 아껴 써야 하는데 허송세월을 했으니 “용서를 빌 길이 없다”는 인식 안에는 “미각지당 춘초몽未覺池塘 春草夢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란 구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을 오동잎 같은 자신의 존재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산등성 이 십리 길 산저리 앞 큰 내 건너
대금동 잘 사는 집에 고모님 시집가셨다
울안에 감나무 많고 토종 벌통 놓인 그 집
배운 남편 소실 얻어 읍내 딴 살린 차려도
시부모 모시다가 쓸쓸히 세상 버렸다
빈집의 적막 깨운다, 툭 떨어지는 풋감 소리
-「고모 생각」전문
고모가 살았던 생은 응달의 삶이었다. “울안에 감나무 많고 토종 벌통 놓인” 잘 사는 집에 시집을 갔지만 “배운 남편 소실 얻어 읍내 딴 살림 차”린 아픔을 감내해야하는 비극의 삶이었다. 가부장적 절대 권력이 가족사에 엄연하게 존재하던 시대였다. 잘못되었지만 부당하고 왜곡된 현실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던 시대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오히려 “시부모 모시”며 순종의 한 시대가 살다간 아픈 생애를 “툭 떨어지는 풋감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로 잘 살려내고 있다. 마치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리는 듯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시인이 가족사적인 것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고향에 대해 갖는 애정과 다를 바 아니다. 「가을비 영동역」에서는 이러한 시인의 심경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삼도봉이 지켜보는/내 고향 영동역”을 가게 되면 어김없이 가슴이 설렌다고 적고 있다. “한 세월 뒤돌아보면/가뭇없이 떠난 사람”들 뿐이어도 “경부선 증기 기관차/물 넣고도 숨이 차던//추풍령 오르막길/헐떡이며 넘던 고개”는 늘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객지의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향과 가족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2. 현실 너머의 역사에 사고를 기대고 실천하는 믿음의 시학
가족에 대한 지극한 따뜻함은 주변으로 확산되고 시대를 넘어 역사적인 사고에까지도 확장되어 나간다. 앞서 우리는 시인의 사고가 현대의 디지털적인 삶이 아니라 아날로그적 삶의 기준을 따르고 있음을 보았는데, 대개 이럴 경우 고답적이기 쉬운데 박용하 시인은 현실의 삶에 대하여도 예리한 사고를 얹는다. 역사가 모여진 것이 오늘의 삶이란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찔레꽃 필 때가 가뭄 심하단 옛말 있다
80년대 어느 해 극심한 한발이 들어
양재천 물 푸던 양수기 밤새워 통통거리고
게리마을 포이마을 잔디마을 원터마을
일력동원 모내기 때 파란 물감 퍼지던 곳
지금은 빌딩의 숲이 가뭄 모른 채 크고 있다
-「들 찔레꽃․ 가뭄」전문
“일력동원 모내기 때 파란 물감 퍼지던 곳”은 지금은 “빌딩의 숲이 가뭄 모른 채 크고”있는 곳이다. 두 공간은 아주 상이한 기능을 하는 이질적 공간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변화된 동일한 공간이다. 자연적인 공간이 인공적인 공간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있는 현실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현대인을 싸고 있는 문명의 극단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뭄 모른 채”솟아오른 “빌딩의 숲”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는 건조하고 딱딱한 물질의 세계다.
꼭두새벽 불 밝히고 바쁜 경매 시작되면
치열한 가격경쟁, 이겨야 사는 현실인가
명패 단 출하물과 농민들 눈빛마저 번득인다
새 주인 트럭에 실려 떠나가는 농수산물
어느 집 식탁에 올라 저 몸이 산화散華 될까
고달픈 좌판 위에도 뉘엿뉘엿 노을이 앉고 있다
-「가락시장에서」부분
승복 차림 차력사 앞 사람 많이 웅성거린다
재주도 가지가지 또 무슨 꿍꿍이 속일까
등 굽은 노인들 속여 약을 파는 세상인심
먹을거리 김나는 장터 몇 천 원에 배부르고
국밥집 막걸리 잔 추억 흠뻑 취하는 시간
석양에 짐을 꾸리는 어머니 모습도 본다
-「모란시장」부분
농수산물도매시장과 전통재래시장의 두 모습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치열한 현장이 가감 없이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다. “치열한 가격경쟁” 속에 가장 순박해야할 농민들의 “눈빛마저 번득”이기도 하고, 물건을 팔기 위해 “꿍꿍이 속”을 벌여 “등 굽은 노인들 속여 약을 파는 세상인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치열함을 지닌 “고달픈 좌판 위”의 삶이지만 시인은 “뉘엿뉘엿 노을이 앉”는 부드러운 풍경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그 석양에 “국밥집 막걸리 잔”에 취하는 이들을 애정으로 바라보며 그들 사이에서 “짐을 꾸리는 어머니” 모습도 보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역사적인 사건과 사물에도 관심을 보이는데「철도 박물관에서」란 작품에서는 “지금은 위리안치, 제자리만 지”키는 1942년 서울에서 제작하여 청량리에서 부산 간 특급열차용 기관차로 이용되다가 1971년 퇴역한 파시형 증기기관차를 그려내기도 한다. 단지 역사적 사물의 복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이를 통해 우리의 근대화 과정 속에 겪은 험난한 역사적 사실 곧, 한국전쟁의 아픔과 “컴컴한 터널 속을 연기 뚫고 빠져 나와 들판을 힘차게 달”리는 근대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란 부제가 부쳐진「6월, 그 기억」이라는 작품에는 “아침밥 저녁 죽으로 어렵게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트럭 타고 전선으로 홀연히 떠”나 전쟁에서 산화한 국군들을 추모한다. 그러나 이 작품 무게 중심은,
이름마저 잃어버린 무명용사 묘비 앞에
누가 울다 갔을까 비 젖은 하얀 국화
해마다 유월이 오면 저며 온다 가슴이
역시 셋째 수에 놓인다. 역사적 사실이 지닌 수밖에 없는 무미건조함을 “비 젖은 하얀 국화”의 서정성으로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시인은 “해마다 유월이 오면 저며 온다 가슴이”라고 절절이 말할 수 없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진시황 이뤄놓은 거대한 꿈 천하통일”의「만리장성」에서는 “돌을 쪼던 석공들의 정 소리, 망치소리/성 밑에 묻혀 있을 장정들의 신음소리”를 듣기도 하고,「낙성대 공원에서」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948-1031)이 태어난 집터인 낙성대를 보면서 “거란의 십만 대군 물리친” 용맹과 “아직도 나라 걱정에 잠 못 들고 계시는” 장군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장소만이 아니라 현실적 공간에서도 시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데 「어떤 초병」에서는 “늦은 밤 이른 새벽 출퇴근길 걱정도 하며/수많은 차량과 행인 안전 위해 봉사”하는 신호등의 “눈보라 비바람도 개의치 않는 불침번을 그려내기도 한다.
3. 생에 대한 충일한 에코이즘의 시학
박용하 시인의 작품은 또한 생에 대한 에너지가 충만한 에코이즘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늘 가까이 해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단지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생태적인 차원의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생태의 파괴로 인해 인간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21세기가 화합과 공존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에코이즘의 사고야말로 미래구원의 중요한 시학적 자세라는 점에서 의미가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랏빛 맥문동 꽃이
인사하는 아파트 옆 공원
매미는 식전부터 목청 돋워 짝을 찾고
불붙은
배롱나무 꽃
가지마다 활활 탄다
지금쯤 고향에는
풋감이 살 오르고
배동선 벼포기 출수를 서두르겠지
더워도
속살 찌는 달
푸나무는 바쁘다
-「팔월 어느 날- 아침 산책」전문
“불붙은/배롱나무 꽃”에는 강렬한 생의 메타포가 있다. “풋감은 살 오르고”“벼포기 출수를 서두르”는 “속살 찌는 달”의 건강함이 있다. 이 건강함이 이끌어 가는 사회가 바로 에코이즘이 지향하는 세계이다. 이 건강함은 물론 단순한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축 늘어져 태만해지기 쉬운 팔월에 “배롱나무꽃”은 가장 활발한 신진대사를 하며 가열차게 생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대로 보이는 아름다움만을 지닌 낭만적인 존재가 아니다. 삼동의 혹한을 건너가는 식물들을 보라. 살갗을 트며 그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을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고향집 난초 닮은 두터운 파란 입술
쭉 뻗은 꽃대 위에 주황빛 꽃 문 열고
촛대에 불을 밝혔다, 온 집안이 환하다
삼동 추위 이겨내고 출산한 봄 아기
십 년 넘게 함께 살아 정도 담뿍 들었다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옛 정이 묻어난다
- 「군자란 꽃」전문
몇 달을 뜸들이다 뽑아 올린 꽃대인가
어린 나비 날아와서 날개 접고 앉아 있다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세밑 엿보다 찾았을까
길러준 정 고맙다고 수줍게 미소 머금고
세상 구경 잠시 하다 봄 오기 전 떠난다고
속내는 말하지 않고, 청향만 뿜고 있다
-「베란다 한란」전문
그렇지 않은가. 모든 영광은 늘 고난 뒤에 오는 법, 고난을 이겨낸 뒤라야 얻어진 열매가 더 달고 빛난다. 인용한 두 작품은 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군자란과 한란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둘이 뿜어내는 희망의 메시지는 “온 집안이 환”해지고 “속내는 말하지 않고, 청향만 뿜”어 대는, 겨울임에도 충만한 생명성으로 넘치고 있다.
거실과 베란다에 함께 사는 식물 가족
아내가 자식처럼 보듬는 청정식물淸淨植物
눈빛도 맑게 해주며 헛헛함도 잊게 한다
직장만 우러르며 만취한 남편 대신
난蘭을 토닥이며 고독을 비질한 아내
‘어떻게 살았을까, 풋풋한 저게 없었으면’
그 옛날 이불 하나로 같이 자던 작은 온돌방
체온을 서로 나누며 더불어 산 어르신들
사랑만 서리서리 남긴 채 떠나가고, 떠나가고
-「청정식물」전문
생명을 가까이 하는 마음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실과 베란다에 함께 사는”것이다. 이 작은 실천은 아내를 통해 실천되고 있는데 시인은 이를 통해 “이불 하나로 같이 자던 작은 온돌방”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청정식물」은 싱그러운 일상의 상쾌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혼탁함까지를 맑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산국山菊」에서는 “산 어귀 홀로 와 서서, 고개 숙인 침묵”처럼 “향기 짙은 금빛 얼굴”로 맞이하는 산국山菊을 그리고 있는데 “빈집 많은 산골 동네 산 밑에 외딴 집”과 “문짝도 넘어진 채 허물어진 흙돌담”을 운치 있게 그 공간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동해바다 어우러져 그림같이 푸르던 산
화마가 태운 민둥산에 숯등걸만 남았다
세월이 얼마를 가야 죽은 땅에 피가 돌까
하늘 땅 놀란 산불, 모든 숨결 앗아갔다
불속에 알, 새끼 두고 연기 속을 날던 새들…
바위도 침묵을 깨고 고함 지른 삼포리
-「삼포리를 지나며」전문
해일이 덮치면 피할 곳 없는 작은 섬에
노도는 용서 못할 듯 밤 새워 포효 한다
잠시도 잠들지 못했다 겁 많은 내륙인
교회의 새벽종이 구조선 이듯 반갑다
성도들 통성기도 노여움도 풀릴거나
저 파랑 어금니 앞에 빌어대는 기도여
알겠다 섬사람이 까맣게 탄 얼굴들을
바위 틈 풍란도 태풍 견뎌 향기 피우고
동백 숲 쓰러진 고목, 겪은 시련 알겠다
-「홍도 일박․ 폭포 경보」전문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청록파 시인들과 무엇이 다르야. 현대의 자연은 화마와 해일로 얼마든지 파괴되어 이지러진 기형의 모습으로 우리를 덮쳐올 때가 많다. 숯 등걸만 남은 폐허의 땅이 되어버린 삼포리, 폭풍이 무섭게 몰아쳐 몸하나도 피하기 힘들었던 작은 섬 홍도. 성난 재해의 휩쓸림 앞에 인간은 너무나 왜소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허울 좋은 개발의 미명 아래 불을 지르고 길을 낸다. 자연의 큰 재해가 쓸고 간 자리에는 늘 인간의 오욕이 자리 잡고 있다. “세월이 얼마를 가야 죽은 땅에 피가 돌까”라고 묻는 시인의 질문이 아프기만 하다.
1. 왜가리
물벼룩 숨어버린 영화천에 발 잠그고
박제같이 서 있는 왜가리 한 마리가
골똘히 걱정을 하네, 어디로 가야할지…
2. 들쥐
산책길 바꿔 타고 들어선 개천 뚝 풀밭
놀란 들쥐 질겁하고 굴로 숨는 저 잽싼 도망
이 도시 어떻게 사나 혀를 넬름 내두른다
-「영화천에서」전문
이 작품 역시 도시 속에서 개천이 얼마나 오염되고 찌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박제같이 서 있는 왜가리 한 마리”의 외로움이 어찌 왜가리에만 국한된 것이겠는가. 현대인 모두가 그런 왜가리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개천 뚝 풀밭에도 문명의 때가 끼기 시작하여 “들쥐”하나도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배어든 자연환경이 얼마나 생태계에 위협적인가를 아주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동물 위령비」에서는 “태어난 고장에서 종족끼리 살지 못하고/이국땅 감옥생활로 숨을 거둔”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시인의 관심은 이렇듯 살아있는 것들이 제대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함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근본적으로 생명 존중의 에코이즘에 기대어 사유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4. 탄탄한 서정성과 조화로운 삶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박용하 시인의 시편들에 나타난 문학적 지향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박용하 시인의 시편들은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아날로그적 삶의 시학, 현실 너머의 역사에 사고를 기대고 실천하는 믿음의 시학, 생에 대한 충일한 에코이즘의 시학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박 시인의 작품들은 탄탄한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쓰름매미 울음소리에
찌던 더위 물러가나
빨간 고추 일광욕 마당에
메밀잠자리 가을을 알리고 있다
텃밭에
갈 무 배추 가시는
두런두런 부모님 음성
-「세월1-입추 무렵」전문
“갈 무 배추 가시는 두런두런 부모님 음성”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시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렇지 않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느끼는 깊이에서 묘미를 느낀다. 제주도에서 도로변 줄지어 선 단팔수丹八樹 가로수를 보며 “팔남매 열여섯 식구”를 바라보는 부모님 모습을 그리는 박용하 시인에게 가족은 생의 전부이자 모든 좌표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를 바탕으로 역사와 현실로 그 범위를 확산시키며 폭넓은 사유와 인식을 견인한다. 결국 시인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삶에 주목하고 이 생명성에 기대어 남은 생에 대한 조화로운 귀의를 생각한다. 사물의 깊이와 상황이 보여주는 인식이 조화를 이루면서 다소 무미해지기 쉬운 일상에 탄력을 주고 있는 박용하의 시편들은 분명 더 깊은 세계를 열어 가리라 확신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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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박용하 시인의 작품에는 따뜻함이 있다. 동시에 차분히 정제된 단아한 사유가 있다. 따뜻함은 가족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잘 정돈된 삶의 사유들은 독자로 하여금 아득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훈은 시인에게 생의 좌표가 되어 하나하나 그대로 살아난다.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아날로그적 삶의 시학이 바로 박용하 시인의 작품세계 요체다.
― 이지엽 시인.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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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하 시인∥
∙ 충북 영동 출생
∙ 2002년《월간문학》신인상 시조부문 당선
∙ 시집《선운사 이팝나무》
∙ 2009년 경기시조문학대상, 2014년 시조시학상 본상 수상.
∙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경기시조시인협회, 열린시조학회, 서울시시우문인회 회원
∙ 녹조근정훈장, 서울시장상, 농림부장관상 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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