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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성지 스크랩 [자랑스런 신앙유산(信仰遺産)] 인천교구 / 진무영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0 12.06.21 17: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천교구 / 진무영

 

강화도의 순교지 진무영 성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가 된 군영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譏察)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진무영(鎭撫營)에서 최인서(崔仁瑞, 요한, 애오개 회장, 59세),

장치선(張致善,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세),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세) 등이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년)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성교(聖敎 : 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上海)까지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신교의 자유, 그

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순교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진무영은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1700년(숙종 26년)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년) 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년)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으므로,

그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포량미(砲糧米)라는 특별세를 설정하여

군영의 경비에 충당하였다.

1887년(고종 24년) 심영(沁營)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진무영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겸임하는 사(使 : 정 2품) 1명,

중군(中軍 : 정 3품) 1명, 진영장(鎭營將 : 정 3품) 5명,

경력(經歷)이 겸하는 종사관(從事官) 1명, 총관(摠官) 4명, 파총(把摠) 10명,

초관(哨官) 6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기패관(旗牌官) 71명,

군관(軍官) 15명이 배치되었다.

 

일성록(日省錄, 1868년 5월 22일자)에 "사학죄인 장치선,

최영준(일명 인서)이 진무영으로 압송되어

효수(梟首, 목을 베어 매달아 둠)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무영은 지금은 고인이 된 성지 연구가 한종오(베드로) 씨가

10여 년 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교회 자리)를

 진무영 터로 지목한 바 있다.

큰길에서 약 100m 성당 방향으로 올라오면 왼쪽에 은혜교회가 있고

이곳에 진무영 관련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200m 더 가서 있는 강화 성당 있는 곳까지 정도가

 진무영 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강화성당 구내에 이들 4명의 순교를 기념하는 현판과

 아담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2004년부터 성지를 개발하기 시작해 아직 미흡하나 문헌 연구와

고증 작업을 하고 있다.

'좌우포청등록'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에 따르면

 장치선은 제천 배론 신학교 집주인이던 장주기(요셉) 성인의 조카다.

그리고 최인서는 서울 아현(애오개) 회장이다.

이들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하자

생존자 리델 신부를 중국 천진으로 탈출시킨 데 이어

상해에서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 제독의 강화도 출병(병인양요)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흥선대원군이 생각한 대로 천주교인들이 정말

서양 배를 불러들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려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장치선이 중국에 다녀온 직후 재동에 사는 조주서와 나눈 대화록에 있다.

"서양배가 나라를 침범할 생각은 없나요?"(조주서)

"성교의 본뜻은 다른 사람의 나라를 빼앗는 법이 없고,

만일 성교가 널리 퍼지면 풍속 중 괴상한 것은 혹 바꿔지고

고쳐지는 법은 있소."(장치선)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진무영에 대하여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섬이자,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섬 강화도.

 강화읍내 중심가를 가다 보면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라는 안내 표지판을 찾을 수 있다.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터이다.

고려궁지는 읍내 중심가에서 북쪽에 있다.

궁지로 가는 길에는 한옥으로 유명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궁지로 가는 오르막길 오른쪽에는 강화초등학교가 있고,

그 맞은편에 ‘천주교 강화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문에서 왼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제대와 십자고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이번 호에서 소개할 진무영 성지이다.

 

진무영(鎭撫營)은 숙종 4년(1678년)

강화도와 주변 지역의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軍營)이었다.1)

이러한 방어 체제를 구축한 이유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강화도는 서울과 가까워 물길로 아침에 떠나면 해질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2)

게다가 황해도와 삼남(三南) 지역을 연계하는

수로와 한강 하류가 연계되는 요충지에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화도는 일찍부터 중요한 군사 방어기지로 간주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가 조선에 압박을 가하면서

 강화도의 군사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강화도는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국왕 일가와 조정의 신하들이 피난할 수 있는 지역인 보장처(保障處)로 지정되었고,

행정단위도 유수부(留守府)3)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비상시, 경기 · 황해 · 충청 · 전라도의 연안 읍들이

 강화유수부를 중심으로 군병과 군량을 지원한다는

해안 방어 체제의 기조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는 인조(仁祖) 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정비되었고,

그의 일환으로 진무영이 창설되었다.

이로써 강화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인 경기도와 황해도 연안 읍을 통솔하는

 하나의 해안 방어 체제가 성립되었다.4)

 

 

그런데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진무영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방어 체제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청나라와 조선의 긴장관계가 완호된 것이 한 원인이었다.

또한, 국방정책도 비상시 수도를 버리고 안전한 장소로 피난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를 사수하는 ‘도성수비론’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강화유수부의 전략적 기능은

 서해안 지역의 중요한 요충지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무영의 군사 활동도 이전보다 축소되었다.5)

 

그런데 진무영의 기능이 다시 확대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866년에 발발한 병인양요였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데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10월 16일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점령하고, 대량의 서적과 무기,

금은괴(金銀塊) 등을 약탈했다.

그러나 11월 9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했고,

이를 계기로 11월 11일 강화도로부터 철수했다.6)

 

이처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가

손쉽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중앙 및 각 지방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그러한 가운데 진무영도 다시금 해안을 지키는 최대의 해방(海防)

기지로 정비되었다.7)

 

한편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던 신자들을

 총융진(總戎陣)이 있던 양화진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오늘날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된다.8)

그리고 진무영에서도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였고, 어떠한 죄목으로 처형되었을까?

 

 

진무영의 순교자들

 

1868년 5월(음) 장치선(張致善) · 최영준(崔英俊) 등이

진무영에서 효수(梟首)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의정부가 아뢰기를, “지금 우포도청이 보고한 바를 보니,

‘사학(邪學) 죄인 장치선(張致善)과 최영준(崔英俊)은

 양인(洋人)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의 진상을 모두 자복했다’고 합니다.

치밀하게 일을 꾸며 화응한 죄는 흉악하고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천지간에 이보다 심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잠시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인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군민(軍民)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5년 5월 22일).

 

장치선과 최영준의 죄목은 ‘서양인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이었다.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였다?

이것만으로는 장치선과 최영준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장치선은 1830년생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다.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吳子賢)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명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장성한 후에 많은 기도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과도 만났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서 살고 있을 때인 1866년 봄에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가 붙잡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3월경(음)에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오던 길에

지자익(池子益)을 만났다.

이때 지자익은 박해의 사정을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는 것을 꾀하였다.

이를 듣게 된 장치선은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연락의 책임을 맡아 적극 도왔다.

그들이 서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구입하여

 출항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F. C. Ridel, 李福明)와 연락이 닿았다.

마침 리델 신부도 중국으로 가서 조선의 박해 소식을 전하고자 할 참이었다.

장치선 등은 리델 신부를 피신시키기로 하고, 출항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5월(음) 장치선은 리델 신부와 최영준 · 최선일(崔善一) 등과 함께

충청도 신창 용당리(현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포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일행은 중국 산둥 반도의 연태(沿台, 즉 煙台)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은 남고 장치선 등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1866년 10월 프랑스 함대가 제2차 조선 침공을 단행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였고,

 이를 계길 철수를 결정하였다.

 퇴각하기 전, 장치선은 김계쇠(金季釗)·박복여(朴福汝) 등과 함께

프랑스 함대로 가서 리델 신부와 만났다.

리델 신부는 통역으로 프랑스 군함에 승선하고 있었다.

장치선 등은 리델 신부에게 박해의 상황, 조선에 남아 있던 페롱(S. Feron, 權)과

 칼레(A.-N. Calais, 姜) 신부의 소식 등을 전하였다.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은 군함을 타고 중국 상해로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러다가 1867년 장치선은 김계쇠·최영준과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귀국할 때 칼레 신부는 은자(銀子) 70량을 주며

신자들의 상황을 잘 살펴 속히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덧붙여 신부 1명을 보낼 것이니 영접할 방법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귀국 후, 장치선은 1867년 10월(음) 백동(현 혜화동)으로 이사하여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가 1868년에 체포되었다.9)

 

최영준(요한)은 1811년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최인서(崔仁瑞)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39년경에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서울 아현에 거주하면서 회장직을 수행했고,

선교사들과 지도급 신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서상기(徐尙基, 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1866년 5월(음)에는 장치선 등과 함께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최영준은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철수할 때에 장치선 등과 함께

중국 상해로 갔다가 1867년 장치선·김계쇠와 함께 귀국하였다.

서울 산막리에서 쌀장사로 생활하던 최영준은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었다.10)

 

여기까지 장치선과 최영준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보았다.

그들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려고 했다.

더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다.

장치선은 4월 18일(음) 포도청에서 있었던 문초에서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진술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인 흉악하고 패역한 일’로 규정했다.

그리고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처형하도록 했다.

5월 22일(음) 장치선과 최영준은 진무영에서 효수되었다.

진무영으로 보내 처형한 이유는 강화도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서 처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양화진과 같이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강화도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기 위한’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진무영 순교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순교하였다.11)

박 서방은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박순집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그들의 유해 발굴에도 큰 공을 세운 이였다.12)

하지만 박 서방의 신앙생활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 서방도 마찬가지다.

조 서방은 조 참봉(參奉)의 부친이고,

나이가 50여 세라는 점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들이 최영준과 함께 잡혔다는 점을 볼 때,

 최영준과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진무영 성지를 소개하는 자료를 보면,

진무영이 1700년에 설치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대전회통”(大典會通), 병전(兵典),

진무영 조(條)를 근거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진무영 조에는 경진년(숙종 26년, 1700)에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무영은 그 이전인 숙종 4년(1678)에 설치되었다.

“숙종실록” 1678년 10월 17일 기사를 보면,

숙종이 강화유수로 진무사(鎭撫使)를 겸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조낙영, ‘19세기 강화 유수부의 재정 운영,

“조선후기-대한제국기 인천지역 재정사 연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9, 26쪽).

 또한 “여지도서”(餘地圖書), 강도부(江都府), 궁전(宮殿),

부(附), 공해(公廨), 진무영 조를 보면,‘종각의 서쪽에 있다.

현판의 이름은 열무당이다.

 두 번 전 갑자년(숙종 10년, 1684)에 세웠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진무영의 설치 시점은 1700년보다 이른 1678년이다.

 

 

순교자

최인서(崔仁瑞) 요한(1810-1868년)

순교자. 일명 영준(英俊), 세례명은 요한. 경기도 용인(龍仁) 출생.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서울 애고개[지금의 阿峴洞]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한 7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되고

 박해가 점점 가열되자 1866년 6월말

장치선(張致善), 박성집(朴聖集) 등 10명의 교우들과 함께

조선의 박해상황을 프랑스 정부에 알리려는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켜 주었고,

이어 이해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자 리델 신부를 태우고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군함에 승선, 리델 신부에게

조선에 남아 있는 칼레(Calais, 姜) 신부,

페롱(Feron, 權) 신부의 소식과 박해상황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1868년 5월(음)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아내 주 데레사는 옥사하고 자신은 2명의 교우와 함께

강화도에서 처형당해 순교하였다.

 

장치선(張致善, 1810-1868)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성인 장주기(張周基)의 조카.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한

 7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자

 이 해 6월말 최인서(崔仁瑞) 등 10명의 교우와 함께

조선의 박해상황을 프랑스에 전하려는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켜 주었고,

이어 이해 9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리델 신부를 태우고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군함에 승선,

조선에 남아있는 칼레(Calais, 姜) 신부, 페롱(Feron, 權) 신부의 소식과

 박해상황을 리델 신부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온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1868년 순교하였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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