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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2009년 사진)
몇년전, 장충동 근처였을거야 아마도. 길을 걷다 언덕 위로 꽉 들어찬 집들 위로 길게 이어진 돌담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아니겠어.
자세히 보니 그 돌담은 오래된 듯 거무튀튀해. 윗부분은 허연데 구멍이 뽕뽕 뚫려있어. 딱 봐도 옛날 성곽이야.
난 그때까지 차를 타고 지나가다 성문 몇개 정도 보았을뿐 서울이 성곽도시였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리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
그런데 성곽이 바로 눈앞에 보이니 호기심에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는 굽어진 골목길을 오르고 올라 성벽 앞까지 갔지.
차 두대도 지나가기 버거운 좁은 아스팔트 따라 옛 성벽이 쭉 이어져 있는데 나름 신기하더군. 대도시 한가운데 이런 물건이 있다니!
그렇게 아스팔트길을 따라 성벽을 보면서 한동안 쭉 걸어갔지. 그런데 흥미롭게도 돌의 색깔과 쌓은 수법이 군데군데 달라.
어떤 곳은 강냉이 알갱이처럼 네모지고 둥그스름한 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았고 어떤 곳은 네모빠닥한 돌을 틈없이 견고하게 쌓았어.
그리고 윗부분은 아랫부분의 돌모양대로 그대로 깎은 것 같은데도 솜씨가 미묘하게 달라. 그리고 돌은 확연히 표가 날 정도로 하얘.
아마도 시대에 따른 차이겠지.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대가 다른 수많은 석공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600년 세월의 집합체였던거지.
위의 사진은 울산 검단리 유적과 청동기시대의 마을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한 그림이다.
중간사진은 백제 풍납토성과 전시관의 풍납토성 단면이고 아래사진은 고구려 오녀산성과 국내성이다.
성곽이란 뭘까. 간단히 말하면 적을 막을려고 만든 담장이지. 나무든 흙이든 돌이든 뭐로 만들던건에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좋은 것이고.
세계 어느 곳이든 많은 성곽이 있지. 아니 있었어. 많이 뽀사져서 그렇지. 그것은 인류는 오래전부터 많은 쌈질을 했다는 뜻이겠지.
왜 싸웠을까. 애들에게 떡을 나눠줘도 줘도 쟤것이 더 크다고 자주 싸우잖아. 더 많은 물질을 획득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겠지.
인간의 개체수가 많지 않고 떠돌아 다니던 구석기시대, 널려 있는 열매 따먹고 짐승 잡아먹고 그랬으니 니꺼내꺼 이런 개념이 없었지.
신석기시대에 가서는 정착이란걸 하기 시작했고 기초적인 사유재산 개념이 스물스물 생기기 시작하지만 아직까진 큰 갈등은 없었어.
가진게 많진 않았거든. 스머프 마을 같은거라고 생각하면 돼. 지혜가 많은 파파스머프의 지도 아래 랄랄랄랄랄라 랄랄랄랄라 노래 부르면서
같이 일하고 같이 분배하는거지. 파파스머프라고 특별한 버섯집에 살지 않고 빨갛긴 하지만 특제 스머프 멜빵바지를 입지도 않지. 평등한 사회였어.
하지만 청동기시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농경에 들어가고 잉여생산물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계급이 생기기 시작하지.
어떤 집단은 기름진 땅에 자리잡아 제법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척박한 땅에 자리잡은 집단은 그게 아니었겠지.
못 가진 집단은 뺏으려 들고 가진 집단은 막으려 들겠지. 그 과정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생기는거지.
도랑을 파고 거기서 생긴 흙으로 둑을 쌓고 또 그 위로 통나무를 세워 이중삼중으로 장벽을 세우기도 하는거지.
이렇게 만들어진 울타리는 그 집단의 방어막이자 경계선이 되지. 이런게 바로 성벽의 기원이자 국가의 기원이 되는거지
이런 울타리를 중심으로 밖으로는 띄엄띄엄 흩어진 촌락들이 점차 흡수하면서 영역을 점차 넓혀 나가는거지.
조선 후기에 그려진 평양성 그림과 조선고적도보의 평양 유적지도, 조선 말의 평양성 모습이다.
이런걸 성읍국가라고 하는데 성읍국가는 다시 연맹국가를 이루고 연맹국가는 다시 고대왕국을 이루면서 커지게 되지.
율령이 반포되어 국가의 통치시스템이 구축되고 불교의 유입으로 사상이 통합되고 넓은 영토를 가지는 국가로 발전하는거지.
그리고 강하지 않았던 왕의 권력은 외부세력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나 정복사업, 거대 토목공사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강해지지.
강한 권력에 의해 좀더 조직적인 정복활동을 하면서 훨씬 더 전쟁은 치열하게 되었지. 그 과정에서 무기의 발달은 당연한거고.
방어무기라 할 수 있는 성곽도 마찬가지였어. 세계 어느 곳이나 성곽은 있지만 그 지역이 처한 자연적, 인위적 환경에 따라
재료나 축성법, 구조 등에서 다양한 지역성을 가지게 되지. 양질의 석재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또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돌로 만든 석성, 그리고 산 위에 쌓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어. 그리고 우리나라에 쳐들어 오는 외적이란
기동력과 개인 전투력이 극강인 유목민족, 그리고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자 인해전술의 원조 중국이었으니 산성은 매우 중요했어.
평소에는 평지에서 농사지으며 생활하다가 얘네들이 쳐들어오면 짐 바리바리 싸가지고 산성에 짱 박혀 최대한 버티는거지.
옮길 것은 다 옮기고 못 옮기는 것은 모두 불태우고 한번씩 보급로를 습격해주면 얘네들은 배고파서, 혹은 전염병이 돌거나 추워서
결국은 물러나게 돼. 수나라가 침략했을 때 고구려가 이런 방식을 썼는데 이 방법은 우리쪽도 쌍코피가 줄줄 흐르는 일이었지.
전쟁에는 이겼지만 평소의 생활로 돌아가면 파괴된 도시기반시설의 복구부터 시작되는거지. 언제 농사짓고 소 키우냐.
그래서 도시의 방어력을 높이게 되는데 산성과 결합하여 최대한 도시를 끼고있는 산악지형을 이용해서 도성을 쌓는거지.
개성 남대문과 현재 남아있는 개성 성곽 유적들. 왼쪽 위의 지도는 세계유산 지정구역을 표시한 것으로 개성 성곽도 표시되어 있다.
이전에도 도시나 마을이 산을 끼고 있었지. 원래 우리나란 산이 없는데가 없거니와 겨울바람 막고 땔감도 구해야 되거든.
그러다 통일신라 말기 풍수지리가 유행하면서 도시나 마을의 입지에 이론적 체계가 잡히고 고려의 수도 개성은 풍수의 영향을 받게 되지.
개성은 북쪽에 기가 맺히는 주산인 송악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어. 원래는 궁궐 주변에만 성곽이 있었는데
당시 대륙에서 히트치던 거란과의 전쟁을 겪고 난 후 강감찬의 건의로 도시를 둘러싸는 나성을 쌓기 시작해 1029년에 완성하지.
개성나성은 외성 부분이 16km 정도 되는데 도시 전체를 두르는 성곽길이는 23km 정도되지. 길이로 따지면 상당히 큰 성이었어.
외성은 흙을 쌓아 다져만든 토축성인데 기술자 8450명을 포함하여 연인원 304400명의 인력이 동원돼서 21년동안 만들었지.
높이는 27척,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8.2m가 되고 두께는 12척, 약 3.6m. 대문은 4개, 중문 8개, 소문 13개로 문도 상당히 많았지.
1123년, 이자겸이 최고 실력자였던 고려에 송나라 사신 서긍이 와서 고려도경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개성나성에 대해
둘레는 60리에 산에 둘러싸였는데 흙과 자갈을 섞어 지형에 따라 만들었고 성 바깥에 해자가 없고 성벽 위에는 담장이 없다고 적고 있지.
고려 말이 되면 홍건적이 개경까지 들이닥쳐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가고 만월대의 궁궐이 불타는 사태가 벌어졌고
왜구가 개성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얼쩡대면서 노략질하니깐 수도인 개성의 방어력을 높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지.
성곽이 너무 길면 그만큼 수비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깐 안에 성곽을 한겹 더 쌓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곧바로 실행되지는 않았어.
그러다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킨 후인 1391년 공사가 시작되긴 했는데 완성된 것은 고려가 없어진 후였어.
이게 내성인데 지금 남아있는 개성 남대문은 내성의 남문이지. 이렇게 만들어진 성곽은 이후 더이상 수도의 도성이 아닌 읍성 역할을 하게 되지.
이성계가 나는 개성이 싫어효 하면서 한양으로 천도해 버렸기 때문이지. 이후 6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수도는 서울인 것이고.
대동여지도의 서울부분과 그 주변. 서울에 빨간색으로 표시한 점은 사대문, 파란색 점은 사소문이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 등극한 것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지 4년만인 1392년 여름이었어.
태조는 한동안 고려라는 국호를 유지하고 계속 개성에 머물렀지만 이듬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새 도읍 물색작업을 하기 시작했지.
그렇게 해서 결정된 곳이 계룡산 근방이었는데 궁궐의 터를 닦고 주춧돌을 놓았을 쯤 반대여론이 빗발쳐서 결국 백지화가 돼.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고려시대 남경이었던 한양이 새 도읍으로 결정되었는데 도시의 설계방향에서도 여러 논쟁을 낳게 되지.
왕조의 도읍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정치공간인 궁궐, 왕조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종묘사직, 그리고 도읍을 방어하는 성곽인데
이것을 어떻게 배치하느냐 따라 도시 전체의 모습이 달라지는거지.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을 동쪽을 바라보게 지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남향의 경복궁이 지어지지.
경복궁이 남향으로 지어짐에 따라 좌묘우사의 원칙에 입각해 경복궁 왼쪽, 즉 동쪽엔 종묘가, 오른쪽인 서쪽에는 사직이 세워진거고.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수선은 당시 서울 별칭 중에 하나이다.
조선시대 서울의 정식명칭은 한성부지만 서울, 한양, 경조, 경도, 경성 등 다양한 별칭이 있었다.
위의 지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인데 대략 1800년대 중반의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옛날 지도는 지금의 지도와 비교하면 평면의 형태나 거리가 매우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 보는 맛이 있지.
가끔 어디 잘 찾아가라고 종이 쪼가리에 약도같은거 그리잖아. 약도에는 그것을 그린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지리나
중요하게 여기는 지형지물 등을 반영하고 있지. 옛날 지도도 약도처럼 당대의 철학과 제작자의 개성을 볼 수 있어.
즈바 너무 정확한 등고선보다야 산모양을 그리고 나무 표현도 된 것이 얼마나 회화적이야. 성곽과 성문 표시도 그렇고.
지도에서 보듯 서울은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해 세워진만큼 산이 중요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백두대간 줄기는 삼각산(북한산)까지 이어오고
다시 백악(북악산)으로 연결되어 도읍의 주산이 되고 있지. 주산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되는 타락산(낙산)과 인왕산이 있고
그 남쪽에는 목멱산(남산)을 안대로 잡고 있지. 이렇게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도읍의 터가 자리잡게 된거야.
주산인 백악 아래에는 주궁궐인 경복궁이 도시의 중심으로 잡고 있고 말했듯이 태묘(종묘)와 사직이 세트로 자리잡은거지.
그런데 자연에 완벽한 좌우대칭이란 없어서 백악은 서쪽에 치우쳐 있고 때문에 경복궁도 도시의 서쪽에 쏠려있지.
그래서 태종 때 보조궁궐인 창덕궁은 그 동쪽에 세운거고 후기에는 응봉주산론이 대두되면서 창덕궁이 주궁궐 역할을 하게 돼.
한양도성 모형(서울시립대)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1394년, 아직 주요 도시 인프라가 거의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지.
개성 궁궐에서 좀더 덩더리 궁뎅이 땃땃하게 하며 살다가 주요 공사가 완료된 후에 천도하면 될 것을
굳이 불편한 임시처소에서 머무르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서둘러 천도한 이유는 정말 나는 개성이 싫어효였기 때문이었겠지.
선죽교 지나면서 정몽주와 한잔 때리던 생각날거고 고려가 망하면서 짤린 대신들은 눈을 희번뜩하게 뜨고 개성바닥을 살아갈 것이고
왕씨들은 성계 이놈하면서 빠드드드득하고 있을테고 백성들은 이성계 장군이 왕자리 해먹더니 기름기가 좔좔 흐르구만 쑥떡쑥떡 이랬을거야.
그리고 왕조의 창업주라면 자고로 새로운 나만의 왕도를 만드는 것을 꿈꾸는 것은 당연할테지. 내 집 마련의 꿈 같은거라고나 할까.
그런데 신하중에서는 개성이 좋아효하는 애들도 많으니 왕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며 일찌감치 천도해서 말뚝을 박는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해서 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고 같은 해 종묘도 완공되면서 왕조를 위한 시설이 하나씩 갖춰지기 시작했지.
성곽공사는 1396년 시작했어. 봄과 가을 2차례 나눠서 공사했는데 19만 7천 4백 70명이 동원되어 단 98일만에 완성했지.
그 긴 구간을 포크레인이나 크레인도 없이 단 100일 이내에 완성했다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전설의 행보관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큼 도성의 축성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으며 빠짝 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로부터 574년 후 그들의 후손들은
400킬로 넘는 아스팔트 공구리 도로를 단 2년만에 완성하게 되지. 어쨌든 그런 정신으로 만들었다 이래 볼 수 있을거야.
도성의 둘레는 5만 9천 5백척이었는데 공사는 천자문 순서인 하늘 천(天), 땅 지(地) 이런 순서대로 마지막은 조상할 조(弔)로 끝나는
97개 구간으로 600척씩 나눠져 있지. 이렇게 구역을 지역별로 할당해서 만약에 무너지면.. 아유 내가 책임자라면 생각만 해도 싫으네.
봄공사에는 대개 성곽 전체와 수문 조성들의 대공사, 가을공사는 성문과 누각, 그리고 봄공사의 미흡한 부분의 보수에 주력했지.
태조 때의 축성은 지금처럼 다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높고 험한 부분만 돌로 만들고 평지나 평평한 산지는 흙을 쌓아 만들었지.
석성의 높이는 대략 높이 15척, 길이는 1만 9천 2백척, 토성은 높이 25척, 길이는 4만 3백척으로 지금과 달리 토성이 주류였지.
이것은 토성이 제작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어서였는데 토성은 잘 쓸려나가기 때문에 비탈진 곳에는 석성으로 만들게 된거지.
그러다 모두 석성으로 바뀌게 된 때는 세종 집권 초인 1422년의 일로 당시에는 장마 때문에 토성에 무너진 부분이 많았다고 해.
조선 후기 한성부의 모습과 사대문과 사소문.
한양도성은 지형에 맞춰 쌓았기 때문에 구불구불하지. 전체적인 모습은 음.. 뭐랄까 윗쪽이 넓은 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어.
시계 반대방향으로 약간 돌아가 있는. 어떻게 보면 심장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해. 그래서 한반도의 심장이 된 것인지도 모르지. 와따 해몽좋다.
한양도성 성곽은 여러 시설물을 갖추고 있지. 방어를 위한 시설물도 있을테고 도시가 기능하기 위한 시설물도 있을테고.
수원화성을 보면 방어를 위해 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이런저런 시설물이 많지만 한양도성은 그런 시설물이 많지는 않아.
원래 도성은 적극적인 방어를 위한 목적의 성곽과는 달리 그냥 도시에 부수되는 방어시설이라고나 할까. 적당한 반란군 정도나 막지
외적이 개떼같이 몰려들면 피난가야지. 도시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려면 또 성곽이 길어야 하잖아. 그게 방어에는 마이너스가 되는거지.
그래서 도성이 역사적으로 군사적인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우는 거의 없어. 도성이 그라믄 안 돼 이래서 약점을 보완한게 수원화성이고.
어쨌든 도성이란 방어를 위한 목적보다는 도시를 구획짓는 담장, 왕의 지배가 직접 닿는 하나의 조그만 왕조국가라고나 할까.
예전에 있었던 통금처럼 시간이 되면 성문을 열고 닫고 사람의 흐름을 국가의 시스템에 따라 통제하는거지. 그게 왕조의 질서였고.
한양도성에는 총 8개의 성문이 있어. 개성 나성에는 외성에만 25개씩이나 되는 성문이 있었는데 꼭 성문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고.
서울의 지형을 봐서 동서남북에 산이 있으니깐 성문을 놓을 곳이 많지는 않아. 그 사이 평지에 문을 세우는 것은 뻔하지 않았어.
자고로 문은 주요 교통로에 있어야 되고 사람이 드나들기 편해야겠지. 그렇게 한양도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어.
서울의 산과 주요 시설의 배치.
동서로 뻗은 도로 양쪽으로는 동대문(흥인지문)과 서대문(돈의문)이 있고 남대문로 끝에는 한양도성의 정문인 남대문(숭례문)이 있어.
그러면 북대문은? 북악산 정상 동쪽 산능선에 숙정문이라는 문이 있는데 교통로 상에 있지도 않고 왕조 내내 거의 사용되지 않았어.
그냥 구색용으로 맞춰놓은 것인데 북쪽이란게 북망산처럼 어두침침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이잖아. 음양오행상 그런 것인데
열어두면 음기가 들어온다고 닫아두고 있다가 가뭄이 들거나 특별할 때에나 가끔 열었고 복원이랍시고 해놨지만 문루도 원래는 없었다고 해.
사대문은 도성의 중요한 문이니 유교의 이념인 인의예지신을 붙였는데 북대문 빼고는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이런 식으로 이름 붙였고
도성의 한가운데에는 보신각이 있지. 청백적흑황이라든지 화수목금토라든지 춘하추동이라든 다 거기에 부여되는 방위가 있어.
사대문 사이에는 사소문이 있는데 사대문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북대문 다음에 북소문이 있고 서대문 다음에 서소문이 있어.
사소문은 보조적인 교통로에 위치해 사대문의 기능을 분산하여 보조하는 기능을 맡았지. 북대문은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쪽 지방으로 가려면 창의문이나 혜화문을 이용해야 했고 도성 안에서는 무덤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소의문과 광희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지. 이렇게 7개의 성문이 교통로로 기능했고 또 2개의 수문으로는 청계천 물이 빠져나갔지.
이것이 대략적인 한양도성의 모습이야. 이런 틀 속에 600년간 시간의 퇴적층을 켜켜이 쌓아온게 지금의 사대문 안의 모습이고.
지도는 청나라 말기의 북경성의 모습이고 흑백사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북경성의 모습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50년대부터 철거가 논의되어 60년대에는 몇개의 문과 극히 일부의 성곽만을 남긴채 파괴된다.
세계에도 많은 도시 성곽이 있지. 아니 있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을만큼 남은 것은 많지 않아.
한양도성과 주변국의 도시 성곽과 비교하자면 일본의 경우는 외적의 침입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 성곽을 쌓지 않았지.
일본의 성이란 지방영주인 다이묘들이 머무르며 지방의 정치, 행정이 이루어지는 관청과 궁전이라고 할 수 있지. 말하자면 castle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본과는 수평 비교를 할 수 없고 중국과 비교해 볼 수 있겠지. 중국의 성은 우리나라 성처럼 wall의 형태를 하고 있거든.
예전에 중국 서안, 당나라 시대에는 장안이고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지 거기에 있는 성벽을 올라간 적이 있는데 거대하더군.
명나라 때 만든 것이라던데 길이는 한양도성보다는 짧아. 그런데 일반적인 벽돌보다도 훨씬 큼지막한 벽돌을 쌓아 거대한 벽을 만들었어.
앞에는 방어용 연못인 해자가 있고 성벽은 꽤 높은데 성벽 위는 4차선 도로만큼 넓고 직선으로 쭉 뻗어있어. 그 위로 관광용 차도 다니고.
이런 것이 중국성의 모습이야. 중국의 수도 북경에는 장안성보다 훨씬 길이가 더 길고 규모가 큰 북경성이 있었는데 장안성과 흡사해.
안부터 궁성인 자금성이 있고 여기서 황성이 둘러싸고 다시 내성이 둘러싸지. 그리고 남쪽에는 외성이 덧대어져 전체적으로 凸모양이야.
스케일이야 세계 어느 곳도 따라올 수 없는 중국의 특징이고 성이 벽돌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거의 직선이라는 점은 우리와 큰 차이지.
중국은 지질상 벽돌을 만들기 좋은 흙이 많았고 또 도시는 넓은 평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산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런 모습인게지.
지금이라면 중뽕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조선 후기의 학자 박제가는 이런 중국의 성을 벤치마킹해서 벽돌로 성을 쌓자고 주장하기도 했지.
규격화된 벽돌로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또 튼튼하다는게 주장의 요지였는데 수원화성 축조에 벽돌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지.
어쨌든 중국의 성과 우리의 성은 달라. 다르다는 것은 특징이 있다는 것이고 보편성과 함께 고유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겠지.
누군가는 한양도성이 중국의 성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만리장성은 북방민족을 막을 수 없었고
북경성은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을 수 없었듯이 중국의 성이라고 특별히 뛰어났던 건 아냐. 지역과 시대마다 그 대상이 처한 환경은 다른 법이지.
또 북경성은 공산당정부가 수립된 이후 봉건시대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사라져버려 성곽라인이 도로가 되고 그 밑으로는 지하철이 다녀.
한양도성도 근대 이후 도시의 확장과 개발 등으로 평지부분은 거의 철거됐지만 성곽 대부분이 산에 있는고로 지금도 상당부분이 남아있지.
여전히 사대문 안의 서울은 산을 하나의 거대한 성돌로 사용한 한양도성에 둘러싸인 도시로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지.
우리와 다른 것을 따라가고 부러워하기보다는 우리만의 고유한 특성을 알고 또 있는 것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야.
현재의 한양도성. 회색 성곽표시 부분이 현재 미복원된 구간으로 대부분이 평지구간이다.
서울은 성곽도시야. 조선시대에는 종로구와 중구에 해당하는 지역과 그 주변부만이 서울이었지만
지금의 서울은 한강을 넘고 사방으로 10배 넘게 팽창하여 25개 자치구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지.
인구도 조선 전기에는 10만 정도 되던 것이 조선 후기엔 20만명, 해방 당시엔 100만, 그리고 서울올림픽 이후에는 1000만을 찍음에 따라
빠글빠글 뽁짝뽁짝한 지금의 서울이 되었지. 이게 다 조그만 성곽도시가 씨감자가 되어 이렇게 알이 주렁주렁 매달린거지.
이 포스팅에서는 이 씨감자, 즉 오리지날 서울의 경계선 되는 한양도성을 걸어보고자 해. 물론 직접 걷는 것은 아니고.
서울 한양도성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순성코스를 숭례문구간, 인왕산구간, 백악구간, 낙산구간, 흥인지문구간, 남산구간
이렇게 6군데로 나누어 놓았지. 요사이 서울시에서는 한양도성을 유네스코에 등재한다고 복원정비사업에 한창인 모양이야.
또 도성투어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 옛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치러 서울로 올라오면 합격을 기원하면서 성을 돌기도 했고
봄과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하루종일 성을 돌며 경치를 구경하는 순성놀이를 즐겼다는군. 지금도 사람들이 도성일주를 하는데
다 돌려면 10시간 넘게 걸린다는군. 여기서는 숭례문구간과 인왕산구간을 옛 사진과 현재의 사진을 보면서 돌아보고자 해.
황토색 네모 부분과 회색 네모 부분이 되겠네. 출발은 남산 백범광장 아래에 있는 도동삼거리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지.
한양도성 숭례문구간
숭례문구간은 백범광장에서 숭례문을 거쳐 소의문 터, 정동,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이야.
거리는 1.8km로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려. 이 구간은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 가장 성벽의 멸실이 심한 구간이기도 하지.
근대로 접어들면서 성벽은 본래의 기능을 잃고 유명무실해져. 숭례문은 도성 문 중에서 사람의 출입이 가장 많고 번잡한 곳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확장이 이 구간에서 가장 빨리 이루어지지. 1907년 숭례문 양쪽 성벽 철거를 시작으로 현재는 성벽의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야.
그래서 걷기는 쉽지만 성벽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걷기에 가장 힘든 구간이기도 해. 그렇기 때문에 답사를 위해 사전조사가 필요하지.
1904년 남산자락에서 본 한양도성 서쪽 부분과 그 주변 풍경.
위의 사진은 1904년의 서울의 모습으로 대략 백범광장 아래 도동삼거리 근처쯤에서 찍은 사진이라 생각돼. 사진을 대충 훑어볼까.
사진은 1907년 이전의 모습이라 성곽이 아주 완벽하게 남아있지. 가까이 보이는 성곽에는 총구멍이 3개씩 뚫린 여장이 쭉 이어져 있고
성곽 뒤편은 흙을 쌓아 만들었어. 그 위로는 하얀옷을 입은 사람 몇몇이 지나가고 있고. 성곽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숭례문과 연결되지.
성곽은 다시 숭례문 북쪽으로 계속 진행되어 점점 멀어지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인왕산까지 희미한 선으로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어.
성곽 안과 바깥쪽으로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들어차 있는데 가까운 곳으로는 초가집이 많고 중간에 텃밭도 보이는구만.
남산자락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벼슬이 없는 샌님이 많이 살았지. 허구인물이지만 허생도 남산 아래 살았다 하지 않냐. 학교에서 배웠지?
여기서 동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허생 동네일거야. 남산 아래는 산 때문에 볕이 잘 들지 않아 주거환경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
숭례문 밖으로는 일직선으로 길이 뻗어있는데 길가 옆으로 일렬로 늘어선 집들이 보일거야. 아마 상당수는 상점들일거야.
숭례문 앞으로는 한강을 접한 마포, 용산과 이어지기 때문에 배로 실어나른 곡식이나 해산물을 파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지.
북쪽길로 가면 독립문이 나오고 좀 더 가면 무악재가 나오는데 이 고갯길은 황해도, 평안도 지방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지.
전체적으로 옛 서울은 지형에 따라 나즈막하게 엎드려 있는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고 산이 뚜렷이 인식되는 그런 도시였지.
위) 성곽 여장 옆에서 본 숭례문과 좀더 동쪽에서 바라본 숭례문. 아래) 성곽 바깥에서 본 숭례문과 그 주변의 모습.
1,3,4번째 사진에서 붉은 색 점을 찍어둔 맞배지붕의 작은 기와집이 보이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촬영자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2013년의 소월로 주변 모습이고 왼쪽 사진은 1904년 성벽 위에서 촬영한 서울의 모습이다.
그로부터 110년 후 서울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따라라라라 따라라라라라라라(러브하우스 BGM)
지금의 서울은 주변으로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서고 바닥은 온통 아스팔트로 덮혀 굳이 산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흙을 밟기 어려운 그런 도시가 되었지. 이런 서울에서 옛 서울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삼겹살에 소주 마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되었지. 인샬라.
위의 사진은 작년에 숭례문에서 남산공원으로 올라가다 찍은 것인데 반대로 배열해 봤어. 어쨌든 남산 쪽에서 숭례문으로 간다고 생각하자구. 사진에 보이는 도로는 소월로인데 이 길은 일제시대에는 조선신궁으로 가는 참배로였지. 일본신을 모시는 종교시설 있잖아. 당시에는 남산 위에 조선 전국에 있는 일본신사의 체인본부격이었던 조선신궁이 있었는데 백범광장으로 올라가는 길 근처부터 도리이와 그 뒤로 급나게 높은 계단이 있었지. 어쨌든 조선신궁으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해 성곽 윗부분은 날라가고 축대를 쌓고 흙을 채우면서 지금과는 지형이 엄청 달라졌지. 옆 사진과 비교해봐봐.
좀더 내려가다 보면 남산육교가 나오는데 그 아래가 퇴계로지. 여기 서니 다리가 쿠쿠쿵 거리면서 진동이 느껴지더라고. 입구에 적힌 걸 보니깐 60년대에 만든 다리야. 새로 만들어야겠드라고. 여기서 보면 숭례문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서울역이 보여. 최근에 서울시에서 녹지로 만들겠다던 고가도로도 있더구만. 이 길을 따라 도보로 숭례문 가는 길과 남산공원으로 가는 길을 성곽정비 사업과 함께 연계해서 코스를 잘 짜면 괜찮겠다 싶어. 만들어 놓고 보면 문제점이 튀어나올지도 모르지만 갑갑한 서울에 문화유적과 어우러진 공원이 많아진다는 것은 방향성으로 따지자면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
소월로 방향에서 본 숭례문의 어제와 오늘.
숭례문 쪽으로 실실 걸어가 보자구. 위의 사진은 시대순대로 거리순대로 배열해본거야. 첫번째 사진은 대략 1900년 근처의 사진인데 위의 사진에서도 확인했듯이 성곽은 여전히 건재한 상태지. 지금의 백범광장 가는 오르막길 쯤 될거야. 좀더 내려가면 두번째 사진의 장소가 나오는데 도동삼거리 근처가 되겠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즈음의 모습인데 사진 중간에 숭례문 지붕 끝이 약간 보여. 오른쪽의 도로는 당연히 지금의 소월로고 도로를 지탱하고 있는 축대의 밑부분은 성곽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리고 그 윗부분에는 일본식으로 돌을 마름모꼴로 쌓았구만. 일제시대에 조선신궁으로 가는 도로를 만든다고 성곽을 훼손한 흔적이지. 지금은 왼쪽의 현재 모습처럼 날라간 윗부분과 여장까지 복원한 상태고 이런 성곽이 도동삼거리에서 남산육교까지 약 100여 미터 가량 남아있지.
세번째 사진은 소월로가 거의 끝나는 지점으로 바로 앞에 숭례문이 우뚝하게 서 있지. 도로에는 예전에 많이 보던 초록색, 주황색의 포니 택시가 다니고 또 다른 차종들을 보아 80년대 후반의 모습이라 추측할 수 있겠지. 이 때의 숭례문은 도로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는 섬과 같았지. 여느 대도시 중심부에 있는 로터리 기념탑과 같이 쌩쌩 다니는 차들을 피해 가는 모험을 하지 않는 이상 숭례문 앞까지 갈 수 없었어. 예전에 뉴스에서 기자가 숭례문의 실태를 취재한다고 미친듯이 도로 한가운데를 뛰어가던 모습이 생각나네. 그 때의 숭례문은 매연으로 인한 검은색 그을음으로 꼬질꼬질했지. 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공기질은 장난 아니었거든. 지금은 그나마 많이 좋아진게지. 그렇게 도로 한가운데 있던 숭례문은 이명박 시장 시절에 도로 한쪽을 덮어 공원을 만들면서 인도와 연결이 되었지. 그리고 이후의 일들은 다들 알거야.
1930년경의 서울. 왼쪽으로는 숭례문이 보이고 남산 중산 중턱에는 1925년 완공된 조선신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의 숭례문의 모습.
아, 이제 숭례문 앞까지 왔네. 숭례문... 에휴우우~ 피휴유우우우~.. 이 한숨의 의미가 뭔지 잘 알거야.
2008년 2월 10일 불꽃남자, 그래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토지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창경궁 문정전 문짝도 태워먹은 전력이 있었던
채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질렀지. 그렇게 숭례문은 한바탕 불난리를 겪은 다음에 폭삭 주저앉았고 다시 복구한게 지금의 모습이지.
소실된게 목조 누각의 2층 부분과 1층 일부분이라 계속 국보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유물의 완전성에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
어쨌든 숭례문 화재사건은 문화재 관리의 허술함과 재난에 대한 적절한 메뉴얼 미비 등 많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참사였지.
숭례문은 조선의 수도 한성부의 정문으로 세워졌고 그후로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로 자리해 왔지.
처음 세워진 것은 태조 7년인 1398년 때의 일로 1447년에 고쳐 지었고 1479년에는 대대적으로 수리했어.
그 뒤로는 짜다리 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잔 수리 정도만 하고 그 상태로 거의 20세기까지 쭉 간 것 같애.
그러다가 병합 이전에 양쪽으로 성곽이 날라가고 한국전쟁 때는 폭격의 파편으로 거의 너덜너덜해져 있던 상태였지.
그래서 1961년에서 63년까지 전부 해체해서 부서지고 썩은 부분 등을 수리한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불타기 전 숭례문 모습이었지.
예전에는 거의 대부분 숭례문이라 부르지 않고 남대문이라 불렀는데 숭례문 화재사건 이후부터인가 어느 순간부터 전부 숭례문이라 하대.
화재사건으로 언론에서 하도 다루고 거의 인격화되다시피 하면서 숭례문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각인된 것 같아. 동대문 이름은 모르는 사람도 많잖아.
남대문이라 하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악의적으로 격하시킨 명칭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선시대에도 흔히 속칭으로 남대문이라 불렀어.
조선왕조실록 태조 때 기사부터 떡하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 살다보면 비상식이 상식으로 알려진 경우가 의외로 상당히 많지.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숭례문이라 불러야겠지만 그냥 남대문이라 불러도 잘못은 아니란거지. 또 누군가에게는 남대문이란 이름으로 여러 기억이 있을거야.
아이들은 동동동대문을 열어라 남남남대문을 열어라라는 동요를 부르며 놀기도 했었지. 예전에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같은 세계의 랜드마크가
찍혀있는 비스켓이 있었는데 남대문과 함께 다보탑인가 석가탑인가 뭔 탑도 찍혀 있었지. 버터향이 나고 달달한 나름 고급까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찾아보니 최근까지도 나왔던 것 같애. 그런데 슈퍼에서 빠다 코코넛은 본 것 같은데 이 과자는 레어 아이템인지 오랫동안 본 기억이 없네.
그리고 쌍팔년도 시절부터 한국을 상징하는 도안이나 상징물로 자주 등장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식상하다 생각했는지 잘 보이질 않네.
1900년대 초반의 숭례문과 그 주변의 모습. 아래는 지금의 성곽 여장과 100년전의 성곽 여장을 비교해 본 것으로 형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숭례문의 옛 모습을 한번 살펴볼까. 위의 사진은 대략 1903년이었나 1904년이었나 그쯤의 사진일거야.
숭례문 외형 자체는 지금과 큰 차이가 없지. 복구사업이 저런 옛날자료를 참고해서 똑같이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이니 당연한 것이겠지.
세부사진이 아닌 저런 세밀하지 않는 전체사진으로 지금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겠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이다 이런 설명은 백과사전을 참고하면 될 것이고 100여년 전의 숭례문은 저런 모습이었어.
아직 성벽이 붙어있는데 성벽에서 지금과 다른 모습이 보이긴 하네. 자세히 보면 성벽 위의 여장의 모습이 복원된 지금의 성벽 여장과 달라.
여장이란 성벽 위에 구멍 3개 뚫려있는 부분이라 이미 말했었지. 군사들이 몸을 숨기며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담장이야.
사진은 작아서 잘 보이진 않지만 검은색 돌을 시멘트처럼 석회의 접착력을 이용해서 쌓는 방식으로 만든 그런 형태인 것 같아.
지금 복원한 여장은 석회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돌을 네모지게 잘라 맞물리게 쌓은 방식이지. 여장은 성벽의 가장 상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가장 쉽게 마모되고 훼손되는 부분이라 그때그때 수리가 이루어졌지. 때문에 한양도성에는 다양한 형태의 여장이 불규칙하게 존재하고 있어.
저 사진 속의 여장도 원래는 저런 형태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그리고 지금도 벌이고 있는 성곽 복원사업에 나름의 사정과 원칙이 있을거야.
하지만 저런 사진이 남아있으면 되도록이면 저런 모습에 충실했으면 좋겠어. 지금 복원하고 있는 여장의 형태는 너무 일률적이라고나 할까.
숭례문과 성곽은 완벽히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어쨌든 복구, 복원된 모습으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하지만 숭례문 주변은 100년전과 완벽하게 달라졌다고 해도 좋을만큼 변해버렸어. 사진 속의 한옥상가들은 한채도 남지 않았으며
나무 전봇대나 전차철길, 그외 자질구레한 것을 다 따져도 흔적조차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만큼 변화가 극심했다는거지.
작년 준공된 후에 숭례문을 찾으니 예전에 봤던 모습과는 달라 어색하기도 하고 또 앞은 아무것도 없이 넓어 휑뎅그레하더군.
주변은 거대한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어 한때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중에 하나였을 숭례문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고 있었지.
1981년 숭례문 부근의 항공사진(위)과 1983년의 숭례문(왼쪽)
대략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숭례문 부근에는 수십층 되는 빌딩이 없었어. 그러다가 70년대부터 도시재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서울에는 높은 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하지. 당시에는 한강 이남이나 서울 근교가 개발되기 전이라 사대문 안에 모든 주요시설이 몰려 있었거든. 행정부를 비롯해 국회, 대법원같은 권력기관부터 서울대나 명문고, 여러 회사들이 있었고 종로나 청계천 부근은 극장, 유흥가, 술집이 많았고 명동은 고급상점들이 밀집한 최고의 번화가였지. 그 주변으로는 돈 벌러 무작정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주거지를 형성하면서 엄청 찌글뽁짝 했다고. 60년쯤에 250만 정도 됐는데 60년대 말에 500만이 됐으니 당시 인구 증식속도는 가히 장마철 미생물 증식속도랑 맞먹을 정도였다고. 어쨌든 당시까지만 해도 사대문 안이 서울 그 자체였고 사대문 안의 중심축은 중앙청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태평로 라인이었다고. 그래서 그 라인에 있는 숭례문 주변부는 70년대부터 큼직한 빌딩이 하나둘씩 들어섰고 지금 보는것과 같이 빌딩의 병풍에 둘러싸인 그런 모습이 되었더라 이런거야.
위에 1981년의 항공사진을 봐보자고. 크 30여년 전인데도 상당히 도시화가 됐네. 삼성본관 앞에는 그때까지 기와덮은 낡은 집들이 있었고.
저 동네는 83년의 사진에서 보듯 불과 몇년만에 헐려지고 그 자리에 빌딩이 들어서고 있네. 숭례문은 외딴섬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있고.
빨간 점선은 성곽 위치를 추정해서 그어본 것인데 대략 저렇게 되어 있었지. 숭례문은 성곽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안쪽에 위치하는데
저렇게 만든 이유는 성문이 적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공략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성문 앞의 적을 공격하기 쉽게 저런 구조가 만들었을거야.
곧 가게 될 돈의문도 옛날 사진을 보니 그런 구조로 되어 있드라고. 흥인지문은 아예 성문 앞에 반원으로 성곽을 두른 옹성을 갖춘 구조고.
숭례문 윗쪽에는 태평로와 남대문로 두 갈래의 길이 나있지. 태평로는 원래는 길이 아니었는데 1912년에 뚫어버렸지.
이 길이 만들어짐으로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가 숭례문까지 다이렉트로 연결이 되었다고. 원래는 이 코스에는 황토마루라는 언덕과
덕수궁 궁역 일부 등 길을 뚫는데 장애물이 많았는데 과감하게 날려버린거지.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도로지.
그 이전에는 남대문로가 숭례문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하는 주도로였어. 쭉 올라가면 광교를 지나 보신각에 이르는 길이었지.
1968년의 서울. 순서대로 숭례문, 남대문로, 남대문시장, 명동.
숭례문 옆에는 남대문시장이 있는데 옛날에 서울로 올라오는 세금, 주로 쌀이겠지 이것을 보관하는 선혜청 창고가 있었어.
근대에 들어오면서 여기에서 물자가 거래되고 한국전쟁 때는 입에 풀칠한다고 사람들이 좌판을 벌이면서 시장이 커지게 된거지.
가보니 흥성흥성하고 상당히 크더라고. 갈치조림이라든지 칼국수라든지 물것도 많으니 함 잡솨봐. 명동과 가까워서 그런지 니뽄진도 많더라고.
여기가 남창동이고 그 윗쪽은 북창동인데 이름에서 보듯 남쪽, 북쪽 창고 동네라는 뜻이겠지. 북창동에도 선혜청 창고가 있었던 모양이야.
이곳은 윗쪽의 소공동과 함께 화교들이 많이 살던 차이나타운이었는데 가까운 명동 입구쪽에는 중국대사관이 있지. 예전에는 대만대사관이었지만.
재개발이 되면서 지금은 몇몇 화교상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예전에는 제법 많은 화교들이 살았지. TV에서 성룡 횽아가 여러번 말했지.
자신은 명동에서 살았는데 돌아다니다가 장발단속에 걸려 "아니야 나 홍콩살람." 이러면 "홍콩사람이 왜 이리 한국말 잘해." 이러면서 끌고 갔다고.
소싯적 성룡 횽아는 북창동, 명동 일대를 나와바리 삼아 좀 노셨겠지. 그런데 명동이야 당시 멋쟁이들이 붐비는 서울 최고의 번화가였지만
북창동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거 왜 차이나타운이라면 너저분하고 유흥가 뒷골목에는 삼합회같은 애들이 여러 초식을 펼치며 쿵푸로 싸울 것 같고
모퉁이 정육점에는 때가 잔뜩 껴 회색이 되어버린 난닝꾸를 입고 입에는 담배를 문 아저씨가 도끼같은 칼로 고기를 토막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있잖아.
실제로 이런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슬럼슬럼했던 모양이야. 그러다 이곳을 비롯한 도심 슬럼가들이 재개발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지.
1966년 시청에서 열린 미국 린든 B. 존슨 대통령 방한 환영식. 흑백사진은 당시 중계화면이다.
1966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한한 적이 있었어. 정부는 시민, 공무원, 학생들을 긁어모아 공항부터 행사장까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벌였지.
시청 앞 광장에서 박정희, 존슨 양국 대통령이 참석한 환영식이 열렸고 이 광경은 실황중계 되었지. 카메라는 당연히 시청을 비췄겠지만
간간이 건너편도 비췄겠지. 시청 건너편은 소공동이었는데 판잣집과 사창가같은 너저분한 슬럼가의 모습이 비치면서 항의가 쏟아진거야.
재미교포들이 "아이고 부끄러버서 낼 우리 옆집에 사는 심슨이 얼굴도 똑디 몬 보겐네 즈게 뭐꼬 즈거 쫌 우에 해바라." 대략 이랬던 모양이야.
이 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도심재개발의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해. 그렇게 해서 7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유흥가와 영세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대기업의 빌딩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지. 재개발의 단초를 제공하였던 시청 건너편 소공동, 북창동 일대에도 파도가 들이닥쳐
화교들은 거의 떠밀리듯이 이곳을 떠났지. 그리고 그 자리에는 플라자 호텔이 병풍처럼 널찍하게 세워져 그 뒷쪽을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
2013년 5월 4일의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숭례문 야경.
잠시 옆길로 샛는데 다시 숭례문 앞에 서 보자구. 2008년 2월에 불탔던 숭례문은 2013년 5월에 복구가 완료되었지.
언론에서는 전통공법 어쩌구, 이렇게 달라졌다느니 저쩌구,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숭례문 하면서 받아적기 한 것같은 똑같은 기사를 쏟아냈지.
그러면서 한창 분위기 띄우기에 바빴고 5월 4일 대통령이 참석한 성대한 기념식 치루면서 야심차게 숭례문이 돌아왔음을 알렸지.
아이고, 그런데 어쩌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거야. 만든지 반년도 안 된 건물에 색이 벗겨지기 시작한거지.
담벼락에 대충 페인트칠 해도 1년은 말짱하게 버티는 법인데 여러명의 전문가가 붙어 정성을 다했다던 공사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상식밖의 일이었지. 하긴 우리 사회에서 상식밖의 일들이 워낙 흔하게 일어나는지라... 헉헉, 아이고 디다. 좀 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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