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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6부 - 현대 노아 방주
1) 현대판 노아 방주가 떠오를 시간이 되었다
최근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 흥행에 성공한 한 재난 영화는, 마지막 이 세상에 다가올 재난과 마지막 종말의 멸망을 피하기 위하여 소수의 선택된(?) 그룹의 사람들이 방주를 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흥미롭게도 그 영화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큰 배를 등장하게 하고, 그 배에 탄 사람들만이 생존하여 살아남는다는 줄거리로 결말을 장식한다. 물론, 그것은 허황한 공상의 이야기이다. 이 세상은 재난 때문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끝이 가까웠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성경 베드로후서에는 전 하늘과 땅에 곧 다가올 멸망과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6, 10~12) 베드로는 노아 홍수 때 물로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머지않아 세상은 불로 멸망될 것이라고, 최후의 날에 서도록 준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을 때, 노아가 순종하므로 방주를 짓고 그 방주가 물 위에 떠올라 구원을 받은 것같이,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순종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하여 묘사하실 때도 홍수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 17:27) 마지막 시기가 가까운 지금은 열심히 방주를 지을 때이다. 모든 진리와 말씀에 순종하는 대개혁의 삶을 살아야 할 때이다. 지금은 방주가 떠오를 때가 되었다. 다가오는 심판과 재림을 위하여 방주를 짓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자!
2) 하나님께서 더는 참으실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세상에 애착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소식 듣기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 세상의 재미에 빠져서 사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재림의 소식을 기뻐하지 않으며,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조차 세상의 끝이 가까웠음과 지구의 수명이 다해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곧 지구의 역사를 끝마치려고 하신다. 아니, 하나님께서 더는 참으실 수 없는, 세상을 끝마치시고 예수께서 꼭 재림하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옛날에 세상에 홍수를 불러왔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이 이루신 창조의 자연법칙과 질서에 인간이 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노아 홍수 못지않게, 아니, 그때보다 더 자연법칙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예수님 재림의 필요성이 얼마나 절실한지 피부로 느끼게 된다.
1.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는 인간
근래에 들어 현대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인간이 생명의 창조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복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일이라고 극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엄연하게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이제는 미세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줄기세포를 이용해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DNA의 조작을 통해서 엄마나 아빠 없이 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유전자들만 뽑아서 주문형, 맞춤형 인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동물과 인간의 유전자를 섞어서 이상한 유형의 종(種)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몸만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이나 개인적 성격이 유전자로 말미암아 유전된다면, 복제되어 만들어지는 인간의 개성은 인간의 성향을 띨까? 아니면 동물의 성향을 띨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이어받고, 그 성품을 개발시켜야 하는 인성적인 면에서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는 일 속에서 야기될 혼란이 두렵기만 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끝내실 시간이 되었다.
2. 과학 발달로 지구가 스스로 자멸할 위기에 처함
과학과 문명의 이기는 인간 삶의 질을 높여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그 과학과 문명의 산물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자동차 및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르는 가스와 공해의 증가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고, 그로 말미암은 자연 질서와 법칙의 파괴로 무서운 천연재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지구는 과학 발달로 인해 스스로 자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님께서 속히 재림하셔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3) 현대판 노아 방주를만들자
당신은 방주를 짓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의 믿음은 참된 것이어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게 하고 행위에 열매를 맺게 하고 있는가? 말로만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믿음에 비례해서 행동이 변하고, 삶이 완전히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경이 가리키는 모든 진리에 순복하고 따르며,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생애를 사는 것이 마지막 시대에 방주를 짓는 것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순종으로 구원을 받겠는냐고. 그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함께 생각해 보자.
노아는 다만 목재로 배를 건조하였다. 강철도 아니고, 어떤 철재도 아닌, 보잘것없는 나무로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힘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고안하신 법을 순종하여 지은 인간이 만든 방주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실 때 온 세상을 뒤엎은 폭풍과 홍수를 넉넉히 견디고도 남는 강한 배가 되었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기만 하고 방주를 짓지 않고 그냥 밖에 있었다면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을까? 순종하지 않은 노아를 하나님께서 그냥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셔서 홍수가 지날 때까지 손바닥에 가리고 계셨을까?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행위는 보잘것없고 공로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대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셔서 우리로 그 큰 구원을 얻기에 넉넉하게 하시는 것이다.
1. 행함은 율법주의?
요즈음 기독교인들은 행위 나 행함 이란 단어만 들어도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구원은 믿음 으로만 받는 것이며, 예수를 믿고 입으로 주를 시인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행함은 율법주의이다.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옳으며 진리이다. 인류가 범죄한 이래로 인간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에 있다. 왜 그런가? 요즈음 기독교에서 가르쳐지는 믿음 과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영혼을 구원하는 진정한 믿음(벧전 1:9)이란 무엇일까?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기독교를 장악하고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가르침은 반쪽 복음이다. 완전한 복음, 균형진 복음을 알고 믿어야 한다. 참된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 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온전한 복음이란 바로 믿음과 행함이 병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순종과 행함에 대하여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또 행함을 강조하시며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0,21)
2.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온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머리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동반한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적으로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는 이 둘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며, 이런 참된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어기기를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2,13)라고 하였다. 또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킨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지킨다. 는 표현을 매우 율법주의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며, 또 아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그러나 계명을 지킨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께 모두 바치고 주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을 가리킨다 육신의 정욕과 자신의 모든 뜻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사는 것이다. 곧, 생애에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이다. 마음속에 예수께서 매일 거하시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 능력으로 매일 악한 것을 이기고,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그 대신 주님의 뜻을 따르므로 계명을 지키는 생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예수님의 충만하신 사랑이 거하므로 그 사랑은 그 사람의 생애에서 율법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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