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자음 모음 이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문자생활을 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 한글 때문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문해율이 높고, 또 현대 정보화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한글은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한글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한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이때의 ‘ㄱ’ 자에 대해 ‘기역’이란 이름을 붙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어 보았더니, 세종대왕이라고 스스럼없이 대답하는 걸 보았다. 또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모음의 차례 즉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는 누가, 왜 그렇게 배열했느냐고 물어 보니 이 또한 세종대왕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틀리는 답을 하고 있다. 한글을 편리하게 쓰고 있는 이 땅의 사람이라면, 그런 문제쯤은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이라 생각된다.
이에 한글의 자모(字母)에 대한 이름과 그 순서에 대하여 간략히 적어 본다.
지금 우리는 한글의 자음 이름을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글자 이름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당시에도 그렇게 불렀을까? 그렇지 않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해례 어디에도 자모의 명칭에 대해 명시하거나 설명한 대목은 없다.
그러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글자의 이름을 짖지 않았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훈민정음해례에는,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뜨고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에 바탕하여 창제하였다 하고, 나아가 거기에 대한 철학적 의미까지 덧붙이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는데, 어찌 낱글자의 이름을 짖지 않았겠는가? 글자를 만들면서 그 현명한 세종대왕이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을 짖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기로 하자.
훈민정음해례에는 ‘ㄱ’의 소리값을 설명하면서 ‘ㄱ如君字初發聲’이라 기록되어 있고, 이를 번역한 언해본에는 ‘ㄱ 엄쏘리니 군(君)자 처 펴어나 소리 니라’ 고 적혀 있을 뿐이다. 곧 ‘ㄱ’은 ‘군(君)’ 자를 발음할 때 나는 첫소리와 같다는 말이다. ㄱ의 음가(소리값)를 알려줄 뿐 ㄱ의 이름 자체는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러면 당시에는 ㄱ을 무어라고 불렀을까? 정확한 이름은 알 수가 없으나, 훈민정음해례나 언해본에 나타난 창제 당시의 어법규정과 그 뒤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의거하여 그 대강을 유추할 수 있다.
창제 당시의 기록에 나타난 국어의 엄격한 법칙의 하나가 모음조화다. 즉 양성모음과 음성모음 그리고 중성모음에 따른 쓰임이 엄격하였는데, 당시 이들의 갈래는 다음과 같다
양성모음 … ㅏ ㅗ ㆍ
음성모음 … ㅓ ㅜ ㅡ
중성모음 … ㅣ
양성은 양성끼리 음성은 음성끼리 결합하고 중성은 양성, 음성 두 가지 소리와 결합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모음조화 현상은 단어, 조사, 어미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조사는 더욱 엄격하였는데, 예를 들면 오늘날의 조사 ‘은’에 해당하는 ‘, 은’과 ‘는’에 해당하는 ‘, 는’의 쓰임은 다음과 같다.
① 사(사람+)… ㆍ[ᄅᆞ] + ㆍ[ᄆᆞᆫ] → 양성+양성
구루믄(구룸+은)… ㅜ[루] + ㅡ[믄] → 음성+음성
② 고기(고기+)… ㅣ[기] + ㆍ[ᄂᆞᆫ] → 중성+양성
집(집+) …… ㅣ[집] + ㆍ[ᄋᆞᆫ] → 중성+양성
그런데 여기서 ②의 예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고기’ 같이 받침 없는 말 밑에는 ‘’이 쓰였고, ‘집’ 같이 받침 있는 말 밑에는 ‘’이 쓰였다. 이 규칙을 훈민정음언해에 씌어 있는 ‘ㄱ 엄쏘리니 군(君) 자 처 펴어나 소리 니라’에 적용해 보자. ‘ㄱ’이라고 했으니 ‘’ 앞에는 받침 업는 말이 와야 함을 알 수 있다. 또 끝 글자가 양성이나 중성의 모음을 가진 글자가 와야 함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면 ‘ㄱ’의 이름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ㄱ’의 음가를 나타낼 수 있는 글자가 되어야 하고, 둘째는 끝 글자가 양성이나 중성이고 받침이 없는 모음으로 끝나는 말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소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 고, 기, ’가 된다. 곧 ㄱ의 이름은 이들 중의 어느 하나가 될 것임을 추단할 수가 있다.
이 조건에 맞추어 보면, ‘기역’이라는 이름은 결코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 앞에는 ‘역’과 같이 음성모음인 ‘ㅕ’가 올 수가 없고, 또 ‘역’과 같이 종성(받침 ㄱ)으로 끝나는 말이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들 네 개의 소리 ‘가, 고, 기, ’ 중에 어느 것이 ㄱ의 이름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답은 ‘기’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곧 이어질 것이다.
이에 답을 줄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 훈몽자회(訓蒙字會)다. 훈몽자회는 1527년(중종 22)에 최세진이 한자 학습서로 편찬한 책이다. 그는 당시의 한자 학습서인 천자문이나 유합(類合) 등의 내용이 경험세계와 직결되어 있지 않음을 비판하고, 새·짐승·풀·나무의 이름을 나타내는 글자를 위주로 4자씩 종류별로 묶어 편찬하였는데, 상·중·하 3권에 총 3,360자의 한자가 수록되어 있다.
한자(漢字)의 글자마다 한글로 음과 뜻을 달았는데, 책머리에 한글에 대한 해설을 싣고 있다. 이것은 훈민정음과 그 시대의 국어를 연구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훈몽자회에는 언문자모(諺文字母)라는 제목 아래 ‘속소위반절이십칠자(俗所謂反切二十七字)’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훈민정음이 27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반절은 훈민정음의 자모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세종이 만들 때는 28자였는데 ‘ㆆ’ 한 자가 없어진 것이다. 이어서 그는 훈민정음 자모의 이름을 한자(漢字)를 이용하여 나타내고 그 쓰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글자의 이름
ㄱ(其役) ㄴ(尼隱) ㄷ(池末) ㄹ(梨乙) ㅁ(眉音) ㅂ(非邑) ㅅ(時衣) ㆁ(異凝)
ㅋ(箕) ㅌ(治) ㅍ(皮) ㅈ(之) ㅊ(齒) ㅿ(而) ㅇ(伊) 히(屎)
ㅏ(阿) ㅑ(也) ㅓ(於) ㅕ(余) ㅗ(吾) ㅛ(要) ㅜ(牛) ㅠ(由) ㅡ(應 不用終聲) ㅣ(伊) ㆍ(思 不用初聲)
⁕ㄷ(池末)의 末 자와 ㅅ(時衣)의 衣 자는 글자의 뜻 ‘귿’과 ‘옷’을 취하여 적은 것이다.
②글자의 쓰임
초성과 종성에 통용하여 쓰는 여덟 글자[初終聲通用八字] ~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초성에만 쓰이는 여덟 글자[初聲獨用八字] ~ ㅋ ㅌ ㅍ ㅈ ㅊ ㅿ ㅇ ㅎ
중성에만 홀로 쓰이는 열한 자[中聲獨用十一字] ~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ㆍ
지금은 모든 자음을 초성과 종성에 다 사용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ㅋ ㅌ ㅍ ㅈ ㅊ ㅇ ㅎ’ 등은 초성에서만 쓸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①에서 보면 자음 중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은 其役(기역), 尼隱(니은) 등과 같이 두 개의 한자로 표기하고, ‘ㅋ ㅌ ㅍ ㅈ ㅊ ㅿ ㅇ ㅎ’은 箕[키], 治[티] 등과 같이 한 개의 한자로 표기하였다. 그 연유는 ②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초성과 종성 두 군데에 통용하는 8자는 두 글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표기하고, 초성 한 군데에만 쓰이는 8자의 이름은 하나의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것은 초성에서만 쓰는 글자는 하나의 음가만 표시하면 되지만,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쓸 수 있는 글자는 초성에서 나는 음가와 종성에서 나는 음가를 아울러 나타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ㄴ’의 글자 이름 尼隱(니은)의 경우, 尼는 ㄴ의 첫소리값을 나타내고, 隱은 ㄴ의 끝소리값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ㅍ’의 글자 이름 皮(피)의 경우, 초성에 쓰이는 ㅍ 하나의 음가만 나타내면 되기 때문에 하나의 글자로만 표시한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초성에만 쓰이는 8개 글자는 하나의 글자로 소리값만 나타내고,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쓰이는 8개 글자는 초성과 종성, 두 개의 소리값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개의 글자로 나나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밝혀 낼 수가 있다. 그것은 최세진이 훈몽자회에서 붙인 ‘기역(其役)’과 같은 이름은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세종 당시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ㄱ’ 자리에 ‘기역+’은 결코 대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앞에는 종성(받침)이 없는 양성이나 중성모음이 와야 당시의 어법규칙에 맞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훈민정음언해의 ‘ㄱ 엄쏘리니 군(君)자 처 펴어나 소리 니라’에 적용해 보면, ㄱ의 이름은 모음조화에 바탕하여 ‘가, 고, 기, ’ 중의 어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 중에서 ‘ㄱ’의 이름은 어느 것이 될까? ‘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초성에만 쓰이는 여덟 자인 ‘ㅋ ㅌ ㅍ ㅈ ㅊ ㅿ ㅇ ㅎ’의 명칭이 ‘키[箕] 티[治] 피(皮) 지(之) 치(齒) (而) 이(伊) 히(屎)’와 같이 ‘ㅣ’를 붙인 이름으로 되어 있음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이를 보면 원래 자음의 이름은 모두 ‘키[箕]’와 같이 한 글자로 된 것인데, 뒷날 최세진이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쓰이는 글자는 그 쓰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기역(其役)’과 같이 두 글자를 붙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 등의 이름도 원래는 ‘기 니 디 리 미 비 시 ᅌᅵ’였다.
그러나 최세진은 초성과 중성에 함께 쓸 수 있는 글자는 초성에서는 ‘기’의 첫소리 ‘ㄱ’ 소리를 나타내고, 종성에서는 ‘역’의 끝소리 ‘ㄱ’을 소리값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초성과 종성에 쓰이는 8자는 모두 이와 같이 두 음절로 그 소리값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최세진의 조치는 세종 당시의 ‘기, 니, 디, 리…… 등으로 나타내는 단음절의 이름보다 한층 더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면 ‘ㄱ’의 이름은 세종 당시에는 ‘기’로 이름 하고, ‘ㄱ’은 ‘기’으로 읽었다. 세종 당시의 한글 자음의 이름은 ㄱ은 ‘기’ ㄴ은 ‘니’ ㄷ은 ‘디’ ㄹ은 ‘리’ ㅁ은 ‘미’ ㅂ은 ‘비’ ㅅ은 ‘시’ ㅇ은 ‘이’로 읽었다. 또한 ㅋ은 ‘키’ ㅌ는 ‘티’ ㅍ은 ‘피’ ㅊ은 ‘치’ 등과 같이 불렀다.
최세진의 훈몽자회는 훈민정음 반포로부터 81년 뒤에 나온 책이다. 훈몽자회에 나와 있는 한글 자모의 이름은 최세진이 독단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만든 것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이래 죽 내려온 그러한 명칭을 밑바탕으로 하여 자기의 생각을 약간 덧붙인 것이다. 효과적인 한자 학습서를 만드는 데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터무니없이 마구 갖다 붙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지금 우리는 최세진이 기록한 이름그대로 자모명을 삼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것인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최세진이 한자로 붙인 이름을 보면 하나의 규칙성이 있다. 즉 ‘ㄴ(尼隱) ㄹ(梨乙) ㅁ(眉音) ㅂ(非邑) ㆁ(異凝))’과 같이 초성의 소리는 ‘ㅣ’ 앞에 나타내고, 종성의 소리는 ‘ㅡ’ 뒤에 나타냈다. 그런데 ㄱ(其役) ㄷ(池末) ㅅ(時衣)은 이 규칙에 어긋난다. 규칙대로라면 ㄱ은 ‘기역’이 아니라 ‘기윽’으로, ㄷ은 ‘디귿’이 아니라 ‘디읃’으로, ㅅ은 ‘시옷’이 아니라 ‘시읏’으로 적어야 옳다. 그런데 최세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들 글자 이름을 ‘기역(其役), 디귿(池末), 시옷(時衣)으로 적어 놓았다.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최세진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윽, 읃, 읏’을 적을 수 있는 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이 그와 비슷한 글자를 빌려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윽’을 ‘역(役)’ 자로 ‘읃’을 ‘귿(末) 자로 ‘읏’을 ‘옷(衣)’ 자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최세진도 이들 글자를 ‘기윽, 디읃, 시읏’으로 적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음을 적을 수 있는 한자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비슷한 글자를 빌려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ㄱ, ㄷ, ㅅ 을 훈몽자회에 나와 있는 글자 그대로 독음하여 ‘기역, 디귿, 시옷’으로 읽도록 맞춤법 규정에 정해 놓았다. ‘기윽, 디읃, 시읏’으로 읽으면 틀린다고 시험 문제까지 내고 있다. 이것은 최세진의 뜻과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과학적 문자라는 한글의 우수성 논리에도 어긋난다. ㄱ, ㄷ, ㅅ 의 글자 이름은 ‘기윽, 디읃, 시읏’으로 하루빨리 바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