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죽천사·양춘재를 중수한 관암공
공의 자는 중여(重汝)이며, 호는 천관산을 지고 산다는 의미로 관암(冠庵)이라 자호했고, 휘(諱)는 상정(相鼎)이다. 그는 아버지 옥호공(玉湖公) 명성(命成)과 어머니 김해김씨 사이에서 1732년(壬子)에 태어났다. 그는 효성은 지극했으며 부지런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6세 때 아버지께서 등창을 앓았다. 그 때 의원(醫員)이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면 나을 수 있다고 일러줬다. 그러자 공은 등창의 고름을 입으로 종일토록 빨았다. 의원의 진단은 적중해서 아버지의 등창이 깨끗이 나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학문에는 진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8세 때 사략(史略)을 읽을 정도로 명석했다. 사략을 배우면서 선진 농법(農法)을 익혀 농사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후 이른바 고등원예라 할 채소와 원예작물을 재배해서 재산을 모아갔다.
어머니 또한 집안 살림을 해서 살림을 키워나가는데 진력을 다한다. 어머니 김씨는 하루도 쉬지 않고 베를 짜서 아들에게 장흥 장(場)에 가서 팔게 했다. 어머니의 축재(蓄財)방법은 동네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큰비가 오면 마을 개천에 발을 쳐서 걸리는 허술한 물건을 재활용하거나 고쳐 돈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는 공이 베를 시장에 내다 팔고 솔치재를 넘어오다 피곤해 잠깐 쉬었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 꿈속에 도깨비들이 나타나 해치려고 덤벼들었다. 그 때 대장이 ‘위장자는 건들지 말라’며 집에까지 모셔다 주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재산을 모은 데 정직성을 대변하는 전설이리라.
농사의 소출과 어머니의 길쌈으로 재산이 무럭무럭 불어났다. 한 마지기 두마지기 논과 밭을 사들였다. 그것이 자꾸 불어 300두락의 부자가 됐다. 부자라도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았다. 흉년이 들면 가난한 이웃에게 양식을 나누어주어서 입에 풀칠을 하게 했다. 그래서 인심 좋은 부자라는 평을 들었다.
1) 죽천사와 양춘재 강당을 짓다 (편제록p.154)
관암공은 피나는 노력과 집념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남이 잠잘 때 일하고, 먹고 싶을 때 먹지 않고 저축했다. 살림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남이 버린 것도 모았다. 옷도 사지 않고 근검절약으로 재산 모으기에 한눈팔지 않고 살았다. 그 결과 관산관내는 물론 장흥고을에서도 부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됐다.
그러나 그는 재산이 모아진 이유가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로지 조상들의 돌보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재산은 반드시 조상을 위한 모선사업에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럴 즈음 파조 청계공(聽溪公)의 사우인 죽천사와 양춘재가 낡아 비가 새는 등 보기가 흉했다.
그는 사우와 강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저축한 돈과 일부 부족한 것은 전답을 팔아 거금 200냥을 마련, 문중에 희사(1797년)했다. 문중은 그 돈으로 1737년에 중수했던 죽천사(竹川祠)와 양춘재(陽春齋) 강당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니 중수된 지 109년 만에 사우와 강당은 새 모습으로 신축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우와 강당이 중수된 지 9년 후인 1806년에 사론(士論)에 따라 6현을 추배했다. 즉 21세 휘 덕원(德元), 휘 덕화(德和), 22세 휘 정훈(廷勳), 휘 정철(廷喆), 휘 정명(廷鳴), 26세 휘 백규(伯珪) 등이 그 분들이다. 그가 사실상 신축을 하지 않았다면 추배는 거의 불가능했다. 아무리 모시고 싶어도 공간이 없으면 안 된다.
한편 죽천사는 1868년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철거됐다. 문중은 그 후 30년 뒤인 1898년 원래의 자리에 설단해서 제사를 지내다 1917년 춘헌공(春軒公) 계반(啓泮)의 주도로 문중의 협조를 얻어 현재의 위치에 신축하고, 이어 1928년 칠현(七賢)문중에서 재원을 출연하여 사우와 강당을 중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죽천사는 지금으로부터 77년 그리고 양춘재는 88년 전에 마련된 건물인 것이다. 물론 이때도 누군가 앞에서 이끈 주인공이 있었다. 그러나 기록을 제대로 갖춰놓지 않아 당시를 소상하게 반추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향후의 문중사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2) 문중에 논 63두락을 내놓다
관암공의 모선충정은 문중에 제위답을 과감하게 헌정(獻呈)한 것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희사한 200냥으로 1797년에 사우와 강당 등 기와집 두 채를 짓게 한 그는 당시 제위답으로 논 6두락을 내놓았다. 그러다 말년에는 무려 63두락의 논을 문중에 희사하니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6두락도 아닌 그 10배가 넘은 제위답을 내놓았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큰 문중도 위토답이 20두락 안팎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그 많은 논을 희사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여기다 관암공의 논은 관산관내에서는 옥답으로 유명하다. 그런 옥답을 쾌척하는 것은 관암공이 아니고는 어렵다.
논이 60두락이 넘으면 농촌에서는 부자에 속한다. 각고의 노력으로 한 두락, 두 두락씩 마련한 전답을 종중에 바친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관암공은 평소 치부가 조상들의 도움으로 누린 것이라고 했더라도 막상 내놓으려면 망설여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일을 과감하게 실천했다. 문중에서는 희사 받은 논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가지로 궁리 끝에 상봉(觴峯) 연봉(蓮峯) 두 종중으로 분할해서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다. 한 사람의 위선정신이 문중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현대를 사는 후손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을 것이다. 만일 관암공이 모선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재산도 없어지고, 문중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3) 가난한 친척과 이웃을 돕다
관암은 하루 세끼의 식사도 혼자서 먹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과 어울려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많은 식객으로 날이 새고 졌다. 주변의 친인척이나 불우한 이웃들이 그의 집에 눌러 살면서 지내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병이 나면 치료비를 대주기도 했다. 흉년이면 이자를 받지 않고 곡식을 빌려주는 등 남을 위한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당시 우리 위씨 가운데 형편이 어려운 일가는 거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솔치재에서 도깨비를 만난 얘기 재미있네요.
관암공의 문중사랑이 지대하군요
훌륭하신 위문중 조상님이시네요.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