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것이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봄비가 내려 대밭으로 가 보았다. 우후죽순이라더니 죽순은 하루에 30센티미터를 자랄 만큼 빠르게 솟아 한꺼번에 수확을 할 수밖에 없다. 봄 가뭄이 심해서인지 아직은 아무런 낌새가 없다. 무(無 )맛인 죽순은 어느 음식이나 궁합이 맞는 편이고, 그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무기질과 탄수화물이 들어있으며 눈을 맑게 하고 불면증 치료에 좋으며 섬유질이 풍부해 변비는 물론 대장암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죽순은 맹죽순 분죽순 왕죽순이 있는데 맹죽순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껍질이 짙은 밤색이며 마디가 짧고 아린 맛이 강하다. 왕죽은 노르스름한 껍질에 약간 검은빛이 얼룩거리며 마디가 길고 우리 집 죽순은 분죽순으로 재래종이라 맛이 가장 좋다. 예전에는 대나무를 키워야 하므로 죽순을 마음대로 꺾지 못했지만 한때 소중했던 생활필수품 재료가 되었던 대나무가 이제는 대나무 박물관에나 가야 그 쓰임새를 알아볼 만큼 쓰이는 곳이 없으니 옛날에 비해 죽순 먹기가 한결 쉬워졌다.
아이들 넷이 올망졸망 자랄 때쯤 대나무를 절반으로 쪼개고 다듬어서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앉아 대발을 엮었다. 긴 대쪽을 나란히 놓고 넷이 똑같은 솜씨로 엮어 나가야 틀어지지 않고 모양 좋은 대발이 만들어진다. 어머님이 젊었을 때도 우리처럼 대발을 엮어 시동생 7명을 키웠다고 하셨다. 그 대발이 낡고 군데군데 부러지기도 했지만 내가 들어와 다섯 식구가 불어났으니 대가족이 앉아 밥을 먹기에는 너무 비좁아서 하나 더 만들었던 것이다. 마당에 대발을 펴고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올려다보던 여름 밤하늘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 많았다. 아이들은 서로 큰 별을 자기별로 하겠다고 다투고, 나는 하늘에 잔별만큼 많은 걱정으로 별을 헤었다. 그로부터 먼 훗날 아이들이 떠나가자 모기를 쫒아 부채질 해줄 일도 없었으니 날선 모시옷이나 삼베옷을 입고 대나무로 만든 베개를 베고 발에 누워 대숲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름밤은 오히려 서늘하기까지 했다. 여름에는 마누라보다 죽부인이 더 좋다는 할아버지의 죽부인은 반질반질했었는데 가지고 놀다가 호된 꾸중을 들었던 어린 날이 생각난다. 그 많던 죽제품들은 플라스틱 제품에 밀려 모두 없어졌지만 나는 아무런 쓰임도 없이 일 년 내내 시렁에 올려놓은 광주리 몇 개, 대소쿠리 두어 개, 앙증스런 석작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대나무는 일상생활에 쓰임만 많았던 것이 아니다. 호랑이와 대숲은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었고, 사군자 중 대나무는 선비의 곧은 기상과 절개를 나타낸다 하여 많은 화가나 시인들이 특히 사랑했다. 어찌 문인이나 화가만 좋아할까. 좋아하기는 서민도 마찬가지였다. 문에 창호지를 바르는 날 푸른 대 나뭇잎 한두 개는 어김없이 문살에 대고 붙여 방문을 여닫을 때마다 그 푸른 생기를 느껴보려 하지 않았던가. 창호지 문창살에 붙여진 댓잎에 달빛이 비치면 금방이라도 젓대소리로 화답할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친정동네에 달이 밝은 밤에만 대 피리를 잘 부는 친구 오빠가 있었다. 피리소리 따라 하나 둘 나온 우리는 은빛 물결이 반짝이는 냇가 방천에 앉아 까닭 없이 대상없는 그리움에 목이 메었다. 천상 한량으로 태어난 그 오빠는 사는 동안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에 태어날 것을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취미로 대금을 불고 살기에는 우리시대가 너무 가난했으니 말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유자광이 태어나면서 대나무의 모든 정기를 빨아들여 그만 누렇게 변하고 말았다는 누른대 마을(남원 황죽마을)이 있다. 서출로 태어나 무령군에 오르기까지 난세에 영웅이라고 한 그가 꼭 간신이기만 했는지 요사이 다시 재조명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대나무의 정기를 타고 났으면 충신으로 푸른 절개를 다했으면 좋으련만 간신으로 기록된 유자광이 태어난 황죽마을을 지날 때마다 아쉽기만 하다. 아무튼 대나무의 기운은 아무나 타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6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대 꽃은 행운이 따른다하여 옛날 선비의 집안에는 벽오동나무와 대밭이 꼭 있었다. 대 꽃이 피고 나면 열매가 맺히는데 전설의 새인 봉황이 먹는 죽실이 열리기 때문이다. 봉황은 벽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틀고 죽실만 먹는다 하였으니 어디 봉황보기가 그리 쉬운 일이랴. 사실은 영양분이 없어진 척박해진 땅에 더 자랄 수 없는 대나무가 꽃을 피워 꽃씨를 바람에 날리고 스스로 죽는다 했으니 쪼개지기는 할망정 꺾이지는 않겠다던 대나무에게도 모성이 있음에 놀라울 뿐이다. 위만 보고 굽을 줄 모르는 곧은 성정이 남자를 연상하기 때문이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수런수런한다. 바람을 붙잡아 자기 몸에 머물게 하는 탓일 게다. 속을 비우고 눈비 맞기를 수십 번, 바람을 간직한 대나무의 노랫소리는 공명이 있다. 인간은 바람을 간직하면 한곳에 머물지 못해 사는 동안 가족이 힘들다 했는데 바람을 간직한 명금은 사람 곁에 남아 심금을 울린다. 천년의 소리를 간직한다는 대금소리도 바람을 속으로 안고 사는 대나무이기에 가능하리라. 이제야 비로소 대숲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온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다. 속을 비우고도 사철 푸른 모습으로 올곧게 자라는 대나무의 심성, 비우면 오히려 가득 채워진다는 가르침을 삼십년 넘게 들려주었는데도 그동안 몰랐으니 역시 이순은 귀가 밝아지는 나이인가. 죽순은 아직 나지 않고 대밭에서 윤선도의 오우가 한 대목이 바람에 실려 온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이러고도 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오늘밤은 달도 휘영청 떠오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