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30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살전 1:1, 행 16:6~10
<이팔청춘_화양연화_리즈 시절>
오늘부터 데살로니가 전서를 설교합니다.
잘 아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서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본격적으로 데살로니가 설교를 하기 전에 살펴볼 주제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두어 번, 데살로니가 설교를 위한 ‘준비운동’을 하겠습니다.
중국에는 ‘화양연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화양연화’라고 한답니다.
영어권에서는 ‘리즈시절’이라는 말을 씁니다. 전성기, 황금기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는 ‘이팔청춘’이라고 합니다.
인생에는 최고의 전성기, 황금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도 이렇게 이팔청춘, 화양연화, 리즈시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도 있지 않을까요?
인류역사가 매양 똑같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어떤 때는 암흑, 어떤 때는 광명!!
☞ 역사에도 이팔청춘의 시대, 화양연화, 리즈시대가 있습니다.
역사에도 이러한 전성기 황금기가 있었다고 맨 먼저 말한 사람이 누굴까요?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이 ‘역사에서 기둥 즉, 축이 되는 시기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들어보실까요?
“모든 역사란 그리스도로부터 와서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출생은 세계사의 차축이다. 서력기원이 그 증거다.”
매우 정확한 말입니다.
☞ 이때부터 세계사에 ‘축이 되는 시대’가 있다는 개념이 생겼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팔청춘은 언제냐?’ ‘화양연화는 어느 때냐?’ 라는 질문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세계사의 차축이다!” 모두가 아멘하면 좋을 터인데, 세상은 반발합니다.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세계사의 중심축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의 얘기이다!”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나 인정하는 역사의 축을 연구해 보자!”
<세계사의 차축>
우리가 살면서 ‘내 인생의 전성기’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아가서 인류 역사에서 축이 되는 시대를 아는 것도 매우 유익할 줄 압니다.
19세기에 헤겔이 “역사의 축이 예수그리도”라고 갈파했습니다.
이후 철학자들이 ‘역사의 축’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중에서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가 눈에 띱니다.
야스퍼스는, BC 9세기부터 BC 2세기에 이르는 700여 년! 그 시대에 주목합니다.
그 시기, 중국, 인도, 그리스 그리고 이스라엘, 이 네 지역을 눈여겨봅니다.
네 군데, 서로 교류도 없는 상태에서 종교와 철학이 동시다발로 싹이 텄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우파니샤드,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가 활동했습니다.
이 네곳에서 발생한 철학과 종교와 사상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지금까지 축의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라고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BC 9세기에서 BC 2세기에 이르는 700년을 “인류 역사의 축”으로 인정합니다.
제가 오늘 들고 나온 책이 축의 시대라는 책입니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이 썼습니다.
이 책을 쓴 카렌 암스트롱은 여류학자입니다. 그런데 암스트롱의 이력이 독특합니다.
1944년에 태어난 암스트롱은 열일곱살에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가톨릭신자였다는 뜻입니다.
7년간 수녀원에서 살다가 그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환속합니다.
세상에 나와서 옥스퍼드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종교학을 공부했습니다.
종교학자가 되었습니다.
종교학자가 되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학자는 필연적으로 세계 모든 종교를 대등한 입장에 놓고 학문을 시작합니다.
그러니 그녀에게 기독교 신앙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종교학자에게 기독교신앙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찾는격입니다.
수녀원 생활 7년을 팽개치고 세상의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놓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대 종교학계에서 ‘최고’라는 권위를 얻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이 이 한 권의 책으로 ‘축의 시대’를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이제는 누구도 ‘축의 시대’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개개인에게 황금기가 있듯이 역사에도 ‘축의 시대’가 있다.
그 시대의 산물로 인류 역사는 지금까지 지탱해 오고 있다. 이것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데살로니가서 설교를 앞두고 제가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인류 역사에 ‘축의 시대’가 먼저 있었다는 점을 말씀하기 위해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침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선포합니다.
“내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 그 분은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침례 요한이 외쳤습니다.
여기서 역사를 더 멀리 바라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축의 시대가 있었다’
하나님은 예수님보다 먼저 침례 요한을 보내시고, 그에 앞서 축의 시대로 섭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 땅의 역사에 정지작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야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기 전에 주도면밀하게 섭리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축의 시대 이스라엘, 그리스, 인도, 중국, 네 곳에서 종교와 철학과 사상이 만개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 ‘복음’이 이 땅에 편만하게 퍼져야 합니다.
십자가_부활_승천_성령 강림의 사중복음으로 인류를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축의 시대’ 그리고 ‘침례 요한’을 먼저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서력기원 즉 Ano Domini, 서력기원이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_부활_승천_성령 강림으로 복음을 완성하십니다.
이제 이 땅에 복음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봐야 합니다.
기독교의 향방은 사도 바울이 어디로 갔느냐로 결판이 났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 북쪽 시리아의 안디옥교회로 갔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마가, 이 세 사람의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안디옥교회에서 트루키예로 파송이 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은 비교적 짧았습니다. 투르키예 남부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2차 선교여행은 투르키예를 동서로 횡단합니다. 투르키예 서쪽 드로아까지 갔습니다.
드로아는 그 유명한 ‘트로이’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 그러나 성령이 막았습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바울은 복음을 들고 일단 투르키예 전역을 돌 계획을 했습니다.
아직 바울의 계획에 그리스와 이탈리아 로마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서쪽으로 갈 것을 제시합니다.
행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8~9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이 환상으로 자기의 계획을 수정합니다. 동쪽으로 가려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아~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발걸음을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 성령께서 서쪽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드로아는 아시아입니다. 드로아에서 바다를 ‘폴짝’ 건너뛰면 그리스 땅, 유럽입니다.
복음은 그곳으로 갔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화두를 묵상할 때 떠오르는 하나가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한국의 배용균 감독이 이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 상영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 말은 불교계의 매우 중요한 화두입니다.
‘축의 시대’에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중국에서 부흥합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즉, 불교는 인도에서 동쪽에 있는 중국으로 갔습니다.
달마대사는 AD 520년경 인도 사람입니다.
달마대사가 인도의 불교를 가지고 동쪽에 있는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때까지 불교는 경전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달마가 경전을 제쳐두고 선을 주장합니다.
달마를 통해서 선불교가 시작됩니다.
☞ “누가 어디로 향하느냐?” 이것이 역사의 물꼬를 좌우할 때가 많습니다.
<전주 도심이 어디를 향하느냐?>
제가 쓴 책, 너 알아? 전주대학교에 보면, 전주 도심이 어디를 향하느냐를 다뤘어요!
1980년, 전주 도심은 팔달로를 중심으로 올망졸망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전주에 있는 전주대학교와 우석대학교가 전주 구도심을 벗어나야 합니다.
전주대학교는 서쪽을 방향을 잡았습니다. 우석대학교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각기 서쪽과 북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전주 도심이 어디로 가느냐입니다.
전주 도심이 다가가는 방향에 따라 두 학교의 운명이 걸려있습니다.
1990년을 지나면서 전주 도심은 전주천을 건너 삼천천을 향했습니다. 서쪽입니다.
전주 도심은 삼천천을 건너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혁신도시는 김제시 이서면까지 접근했습니다. 어느 학교가 유리해졌습니까?
전주대학교는 전주 도심이 둘러쌌습니다. 우석대학교는 삼례읍에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 여러분의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도 이처럼 중요합니다.
☞ 내가 오늘 어디를 향하느냐? 이것이 내 인생을 좌우합니다.
☞ 인생의 전성기는 내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달렸습니다.
☞ 화양연화, 이팔청춘, 리즈시절!!! 내 발걸음이 어디를 향했느냐가 판가름 합니다.
<복음이 그리스를 향한 까닭>
성령님은 바울의 발걸음을 서쪽으로 돌렸습니다.
동쪽의 아시아가 아니라, 그리스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왜 아시아가 아닌, 그리스로 복음이 향하게 하셨을까?
그리스는 축의 시대에 발아한 철학과 종교가 만개한 지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전 6세기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주전 5세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활짝 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로 건너감에 따라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과 사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복음이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를 묵상해 봅니다.
☞ 요한복음을 읽으면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 성자 예수를 ‘로고스’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다.
☞ 요한복음에 그리스 철학이 꽤 많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로, 또 인도로, 중국으로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독교가 인도와 중국의 사상, 철학, 종교와 만났을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진입합니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헤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헤겔의 얘기를 다시 들어봅니다.
“모든 역사란 그리스도로부터 와서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세계사의 차축이다. 서력기원이 그 증거다.”
헤겔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축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러나 비 기독교 진영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역사를 보는 관점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역사의 기둥이 되는 ‘역사의 축’이 그리스도냐, 아니냐?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역사의 기둥이 예수 그리스도라 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기둥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면, 역사는 주어가 빠져버립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역사를 주관하실까요?
하나님을 부인하면, 그때부터 역사는 중구난방이 되고 맙니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는 역사가 됩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잘해야 100년을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떻게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날 불교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얘기는 없습니다.
불교는 훌륭한 종교이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힌두교나 여타의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둘로 극명하게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이거나, 아니거나!!!
① 역사의 주인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② 역사의 주인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닙니다.
두 가지 대답 말고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끄는 역사 속에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부인하는 순간, 역사의 주관자가 누군지 미궁에 빠집니다.
☞ 우리가 왜 행복합니까?
☞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중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 알면 행복하고 모르면 불행한 겁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