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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고달픈 삶을 살다 간 우장춘박사>
세계 최고의 육종학자 우장춘박사의 슬픈 삶
우장춘 박사하면 아직도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씨 없는 수박은 일본인 농학박사 '기하라 히토시'가 처음 만들었고 그것을 우장춘박사가 한국에 들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의 삶을 자세히 살펴 보면 우장춘 박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을 먹고 살만한 국가로 바꿔 놓은 구국의 은인이다.
우장춘박사는 출생부터가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1898년생이며 아버지는 구한말 친일부대 대대장이었던 우범선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인물이다. 사건 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바로 우장춘이었다.
<우장춘(가운데) 가족 사진>
아버지 우범선은 대한제국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우장춘 나이 5살 때 암살당했다. 이때부터 우장춘 가족은 거지만도 못한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조선에서는 배신자 역적의 자식이고 일본에선 이용가치 없는 쓰레기 아이노꼬(혼혈)였던 것이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겼다. 고아원에 들어간 어린 우장춘은 고아원생들의 극심한 괴롭힘에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조금도 삐뚤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면서 그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다음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너희들에게 복수 하겠다'고 다짐했다.
우장춘 어머니는 보기 드문 훌륭한 여인이었다.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긴 후 악착같이 돈을 벌어 우장춘을 다시 집으로 데려왔고 공부를 시켜 끝내 대학까지 보냈다. 그것도 일본 최고의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보낸 것이다. 졸업 후 농림성에 취직했으나 일본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사실 일본에서 우장춘이 살아남는 길은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야 하는데 일본인이 되길 거부한 것이다. 우장춘에게 일본이란 나라는 혹독한 굶주림과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다. 당시 세계 육종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그가 일본인으로 살아갔다면 아마도 명예와 부는 물론 화려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은 우장춘박사와 같은 농학박사가 절대 필요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농학박사 우장춘에게 조국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애원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을 위해 비워놓고 우장춘 가족에게 영입의 댓가로 당시 엄청난 액수의 돈 1백만엔을 보냈다.
그는 평소 아버지가 조국을 배신한 반역 죄인임을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죄값을 자신이 갚는 다는 일념으로 살아 오던 차 한국이 먼저 귀국해달라고 요청을 해오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서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 1백만엔을 몽땅 털어 한국 땅에 심을 각종 종자를 사는데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부산으로 귀국하여 52살 나이에 군복무까지 했다. 당시 고위층 관료들이 만류하였지만 우장춘은 이를 거부하고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대한 후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고 편안히 기거할 사택은 아예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을 옷이 없어서 우 소장은 행사장에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을 끌고 나갔다. 그러나 우장춘박사는 10여년 동안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육종개량사업에 최선을 다했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우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 종자 개발에 주력하였으며 최단시간 내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 20여 품종개량에 성공함으로서 농사에 활력을 심어주었다. 그 외에도 한해 두번 수확하는 2모작 벼 품종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장춘박사 덕분에 한국은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 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분명히 우장춘박사는 천재였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우수 과일 품종인 "제주 감귤“의 종자와 재배기술을 개발하여 제주도에 '감귤' 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또 당시 강원도 감자가 특정 바이러스에 너무 취약해 한번이라도 병이 유행하면 단한개의 감자도 건지지 못했다. 이때는 강원도 농민들은 배를 곯고 상당수가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지만 바이러스에 면역이 강한 감자종자로 변형시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 수 있도록 개발하여 원예 산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건 일본의 육종학계도 깜짝 놀라게 만든 엄청난 업적이었다. 우장춘 박사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해 준 게 아니라 먹을 거리로 경제와 산업을 창출하는 기반까지 닦아 준 은인으로, 그야말로 하늘에서 보내 준 '구원의 천사'였던 것이다. 십이지장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한창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 봉투에 넣어 링거 병이랑 같이 걸어 놓고 관찰했다고 한다. 이렇게 훌륭한 한국의 은인이었음에도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을 업신여겼다. 당시 정신 나 간 고위층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의 연장 선상에서 일본말만 잘하는 우장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장춘 박사는 한글에 도통한 분으로 읽기, 쓰기, 듣기 다 잘하는데 다만 말하는 것만 서툴렀을 뿐이다. 일부 몰지각한 관료는 아예 대놓고 구박하고 모욕을 주기도 했다.
세계적인 육종학박사가 한국에 와 졸지에 외국인 노동자가 된 꼴이다. 게다가 이승만정권은 그분의 어머니가 작고하였을 때도, 딸이 결혼할 때도 우장춘을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출국을 금지시켰다. 평소 바른 말을 잘하는 우장춘이 이데오르기문제에 관해 입바른 소릴했다고 하여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그를 출국 금지시킨 것이다.
<한국 땅에서 시신 없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우장춘박사>
아들로서, 애비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었겠지만 우장춘은 끝까지 조국아닌 조국을 위해 마지막 생을 바쳤다. 그는 1959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더 우수한 벼 품종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죽기 바로 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게 된 우장춘박사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이제야 조국이 날 인정했구만....... 근데 좀 일찍 주지......."
이땅의 모든 전후 세대는 이 위대한 인물에게 너무 큰 빚을 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우장춘을 철저히 이용만 해 먹었다. 그러면서 우장춘의 업적과 연구기록을 남기는 것조차 소홀히 했다. 그 분이 떠난지도 50여년이 지났고 이분의 묘소는 지금 수원 농촌진흥청 관내에 모셔져 있다. 우리는 지금도 구국의 영웅 천재과학자 우장춘박사에 대해 너무 소홀히 취급하고 있으며 실제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서점에서 책을 찾아 보기도 힘들다. 우장춘에 관한 글은 코흘리개 애들이 배우는 초등학교 교과서 한 귀퉁이에 겨우 몇줄 실릴 정도의 분량 밖에 나오지 않는다. -퍼온 글-
남몰래 흐르는 눈물-Giovanni Marrad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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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지가 조국을 배신한 반역 죄인임을 알고
아버지의 죄값을 자신이 갚는 다는 일념으로 살아 왔기에
당시 친일파가 모든 권력을 잡고 있던 이승만 정부의 눈 밖에 난게 아닐까요??
그들은 친일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싶었기에 말이죠
당시 우장춘박사는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에서 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노하우를 발휘해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자유당 정부는 그분의 진심을 아예 무시했던 것이지요.
더구나 막노동꾼 대하듯 했으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 꼴이네요.
우장춘박사의 사위되는 분이 일본 굴지의기업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회장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은 '마츠시타 고노스케'회장과(작고)
우장춘박사의 사위인 '이나모리 가즈오'회장 두명뿐이랍니다.
세계적인 일본항공사 JAL이 도산위기에 빠져 일본 재계가 술렁일 때
JAL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나모리'회장 밖에 없다고 전 국민이 추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승만은 국부로 박정희는 영웅으로 추대하자는 넋나간 사람들은 많으나
정작 대한민국의 은인 우장춘박사를 추모하고 기리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는듯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