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누가 어떤 형태의 종교생활을 하든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내 신앙적 노선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다른 신앙 노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던 때가 있었다.
20 여년 전에 누군가의 소개로 구로공단 앞에서 산부인과를 하는 여의사를 만났다. 당시 광명시 하안동에서 빈민운동을 하는 나에게 그녀가 후원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고마운 마음으로 만들어준 자리였다. 여 의사는 당시 공단 근처에서 사는 여성 노동자들이 임신을 하면 소파수술을 해주는 일로 돈을 잘 벌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여 의사는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자기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지 모르겠다면 자기의 가정 문제를 털어 놓았다.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의 고민의 핵심은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용돈까지 주어야할 정도로 무능력해서 결국은 이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혼소송을 하려고 했더니 남편에게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남편이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는 법이지만 여 의사의 경우에는 반대로 남편이 경제능력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아내가 위자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서 이혼을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돈을 주어야 한다니 억울해서 이혼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남편에게 용돈 까지 주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느냐는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는 그만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일어서려니까 그녀를 소개해 주려고 같은 온 사람도 어안이 벙벙해 했다. 여의사는 “남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무슨 답이 있어야지 그냥 가는 법이 어디있느냐?” 면서 불쾌해 했다.
나는 “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은데 목사인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그 결과는 뻔했다. 우리는 유쾌하지 못하게 헤어졌다.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의사에게 충격 요법을 사용하고 싶었다. 자신의 신앙을 강조하면서 가정 안에서 희생할 줄도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을 파격적인 행동으로 지적해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무슨 그 따위 목사가 다 있느냐?”고 욕을 하더란다.
또 한 번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일이었다.
86년도에 미국으로 생활 망명을 가서 어떤 분의 소개로 돈이 많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소개해 준 이 역시 가상하게도 불쌍한 내 처지를 생각해서 그로부터 후원을 받을 길을 터주기 위해서 모처럼 어렵게 마련한 자리였다.
당시 그는 700명을 고용하는 대청소 회사 회사의 사장으로 유대인 부인을 데리고 살고 디즈니랜드 영화에 나오는 골동품 오픈 롤즈로이즈를 타고 다니는 LA의 유명 인사였다. 그가 식당에 가면 앞에 주차장 있는 차에 누가 손을 댈까 보아서 종업원 한 명이 나가서 차를 지켜줄 정도의 대우를 받는 손님이었다. 그 역시 나에게 한 시간이 넘게 자기 신앙 간증을 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평소에 심장에 문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TV를 보다가 갑자기 호흡에 곤란이 생겨 앞으로 넘어지면서 손가락이 탁자에 있는 TV 리모컨을 누른 순간 채널이 바뀌면서 당시 유명한 치유전문 부흥사인 오랄 로버츠 목사 방송이 나오더란다. 당시 그는 자체 방송국과 대학까지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부흥사였다.
마침 그 때 방송에서 오랄 로버츠가 아픈 사람은 아픈 부위에 손을 놓고 기도를 하라고 해서 그가 말하는대로 심장에 손을 놓고 기도를 했더니 통증이 그 순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런 대로 좋았는데 그 다음 부터가 문제였다. 그 이후 자기의 체질이 바뀌어서 자기가 조금만 나쁜 생각을 하거나 저속한 것을 보던지 하면 즉각적으로 영혼이 더러워져서 몸이 아파지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환경을 피하기 위해서 까다로운 은둔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참을성을 발휘해서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나는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사장은 금방 안색이 굳어지더니 “지 목사! 큰 마귀가 들렸소.”라고 했다. 물론 우리의 인연은 그날 식사 한 끼 함께 한 것으로 끝이 났다.
지금 같으면 어떤 형태의 신앙이라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나도 무척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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