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시아간에도 한번 하자고 하니 일사천리로 현안이 해결됐다. 감정에 의한 기싸움만 아니라면, 껄끄로운 문제들도 언제든지 풀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의회는 27일 미-러 핵무기 감축조약의 하나인 '신 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New Start)을 5년간 연장하는 비준안을 승인했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와 연방의회(상원)는 이날 각각 비준안에 대한 심의와 표결을 실시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뉴스타트 협정 비준안은 푸틴 대통령이 전날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한 뒤 하원에 제출한 바 있다.
국가두마(하원), 뉴스타트(전략무기감축협정-3) 연장안 비준/얀덱스 캡처
푸틴 대통령은 이날 다보스 포럼 화상 연설에서 뉴스타트 협정 타결에 대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 상원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콘스탄틴 코사초프는 "뉴스타트는 러시아의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협정"이라며 "연장되지 않았다면, 핵무기에 대한 통제가 사라져 군비경쟁이 새로 시작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환영했다.
앞서 양국 외교당국은 26일 러시아외무부 청사에서 뉴스타트 협정을 오는 2026년 2월 5일까지 5년 연장하는 내용을 담은 외교 문서를 교환했다. 존 설리번 주러 미국 대사가 외무부 청사로 와 협정 연장 제안을 담은 미국측 노트를 전달했고,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이 이 제안을 수용한다는 러시아측 노트를 건넸다.
양측이 맞교환한 외교 문서가 양국 정상이 서명하는 '협정문'을 대체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은 '외교 노트' 맞교환 후 전화 통화를 갖고 뉴스타트 연장 사실을 확인했다.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이 처음으로 전화통화/얀덱스 캡처
'뉴스타트'는 지난 2010년 4월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체결한 협정이다. 미·러 양국이 실전 배치 핵탄두 수를 1천550개 이하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등 핵탄두 운반체를 700기 이하로 각각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지난 1991년 7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를 새롭게 개정했다고 해서 '뉴스타트'로 불린다. 정식 발효은 양국의 의회 비준 절차에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10개월 뒤인 2011년 2월 5일 발효됐다. 내달 5일 만료되지만, 양국이 합의하면 최대 5년간 연장된다는 부가 조항을 담고 있다. 이번 연장합의가 비교적 손쉽게 가능했던 이유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뉴스타트' 연장의 조건으로 '중국 포함 카드'를 들고나오는 바람에 양국은 오랜 기간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미국 측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러시아가 비교 우위에 있는 '신형 극초음속 무기'들을 연장 협상 내용 속에 포함할 수 있다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핵탄두를 운반하는 운반체 수에 '극초음속미사일'을 포함시켜도 좋다는 뜻이다.
러시아는 군함에 장착하는 신형 극초음속 순항미사일 '치르콘'을 실전 시험 중이고, 중거리탄도미사일(IRBM)급 극초음속 미사일 '아반가르드', 전투기 탑재형 극초음속 미사일인 '킨잘' 등은 실전 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 모습/사진출처:크렘린.ru
다행히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뉴스타트의 5년 연장을 추진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면서 타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러시아측은 즉각 환영의 뜻을 피력했고, 양국 외교당국간에 뉴스타트 연장을 위한 실무 협의가 시작됐다.
뉴스타트 연장을 위한 양국의 첫 고위급 협상은 지난해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다. 협상에는 미국의 마셜 빌링슬리 군축 담당 특사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랴브코프 외무차관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은 뉴스타트 협정에는 중국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빌링슬리 특사는 협상이 끝난 뒤 자신의 트위터에 중국 국기가 장식된 빈 자리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측이 핵무기 규모에서 절대 열세인 우리가 협정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며 참가를 거부, 협정 연장 협상은 꼬이기 시작했다. 중국의 핵탄두 수는 현재 320개 정도로 미국(5천800개)이나 러시아(6천375개)에 비하면 절대 열세다.
러시아의 미사일 발사 시험. 군함에서 발사되는 극초음속 미사일 '찌르꼰'(위)와 지상 발사 미사일/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사이트
미국 국무부의 집계에 따르면 2020년 3월 1일 현재, 미국은 655기의 전략무기 운반체를 실전 배치하고 있다. 장착할 수 있는 핵탄두는 1372개다. 러시아는 실전 배치한 485기의 운반체에 1326기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있다.
트럼프 전 행정부는 지난 2019년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폐기한 데 이어 항공자유화조약(Open Skies Treaty)에서 탈퇴하는 등 군사 안보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해 왔다. 미국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34개국이 가입한 항공자유화조약은 2002년 발효됐다. 이 조약은 가입국의 군사력 보유 현황과 군사 활동 등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투명성 확보를 위해 회원국 간의 상호 자유로운 비무장 공중정찰을 허용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미국과 소련이 가장 먼저 체결한 핵 군축 관련 협정은 1972년 성사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이다. 요격시스템을 확보해 탄도미사일을 무력화하면, 상대의 보복 공격을 겁내지 않고 선제 핵공격을 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조약이다. 하지만 미국은 2002년 이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효력을 상실했다.
이후 나온 게 지난 2019년 8월 폐기된 중거리핵전력(INF) 관련 협정이다. 사거리 500~5500㎞의 중거리 지상발사용 핵미사일의 개발·생산·배치·보유를 금지하고 기존 보유분도 모두 폐기한다는 내용이다. 1988년 발효된 뒤 양측은 1991년 상호 검증 아래 모든 중거리 핵전력을 폐기했다.
뒤이어 제1차 전략무기감축협정(스타트-1, START-1)이 1991년 성사됐다. 미국과 소련이 보유 전략 핵탄두를 6,000개, ICBM과 전략폭격기 등 운반체를 1,600개로 제한한다는 게 주요 내용. 하지만 소련의 해체로 '스타트'는 2009년 협정 기한 만료와 함께 실효됐다.
그 사이, 조지 부시 미 대통령(아버지 부시)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전략 핵탄두를 3,000~3,500개로 제한하는 제2차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2)에 1993년 전격 서명했지만 의회 비준에 실패했다. 또 2003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간에 '전략공격무기제한조약'(소위 모스크바 조약)이 이뤄졌지만, 상호 검증도 채 이뤄지지 못하고 2011년 폐기됐다.
마지막으로 나온 게 스타트-1, 2의 내용을 개정한 '뉴스타트'(러시아에서는 START-3, договор СНВ-III으로 부른다)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핵군축 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