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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묵상글 들 ( 대림 제1주간 월요일. - 주님의 산 등산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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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산 등산가
오늘 복음은 백부장의 종이 치유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치유받은 종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아시다시피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백부장이고,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사랑 등등이겠지요.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왜 이 얘기를 대림절 첫날 듣게 되는지,
우리 교회는 왜 백부장 얘기를 대림절 첫날 복음으로 선택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랬을 때 백부장이 대림절을 잘 지내는
우리의 본보기이기 때문에 이 복음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대림절에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제가 처음에는 자캐오가 더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 마을에 오신 주님을 보고 싶어서 나무에 오르는
열망도 보이고 그래서 자기 집에 주님을 모셔들이기까지 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백부장이 더 좋은 본보기인 이유는
자기 집에 가시겠다는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얘기할 정도로 자캐오보다 더 큰 믿음과 겸손을 보인 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방인으로서 주님을 찾아와 만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 내내,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전해주는 이사야서는
오늘 그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렇게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실 메시아를 만나러 가자고
오늘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하지요.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주님의 산으로 오르고,
주님의 집으로 달려간 모든 민족과 백성의 대표이고 본보기입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산 등산가이고
우리도 주님의 산 등산가여야 합니다.
이때 떠오르는 유명한 시편이 있지요.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너희는 열어라. 정의의 문을. 주님께 듭시려 하노니. 야곱의 하느님이!"
그래서 저는 어제 그제에 이어 오늘도 정신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 대림절에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가 되자고.
주님께서 드시도록 문을 여는 이가 되자고.
그래서 다른 산을 오르지 않고 주님의 산을 오르고,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문을 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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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은 둘 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만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에게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묵시록>의 말씀에서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 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 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 이다.”(마태 8,11)
또한, 당혹스럽고 놀라운 것은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한 참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필시, 그는 이미 이 구원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바로 그 속에서 이미 자비와 사랑의 위력을 알기에 믿음의 굳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진정한 참된 힘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말씀의 힘에 승복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십니다.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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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으로 부르나이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하늘은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김수환추기경님의 파견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 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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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대림 시기에 우리를 맞이해 주는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유배 이전, 유배, 유배 이후, 이렇게 세 세대를 아울러 활동했던 예언자 학파의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는 제1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제1 이사야는 유다의 사제 귀족이었으므로 유다 왕실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밝았고, 머지않아 유다 왕국은 망할 것이며 백성은 유배를 당할 것과 이 참담한 유배 역사가 지나가고 난 이후에 메시아가 오셔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왕국을 세우실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주님의 산으로 올라오는 그날이 오리라.” 그날이 오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국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국운이 다하여 민족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때에 가장 찬란한 미래를 보았을 만큼 이사야의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내다본 장밋빛 미래는 단지 유다인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한 미래는 아니었고, 예수님을 내칠 그들 대신에 참으로 하느님을 섬길 새로운 백성이 나타날 것임을 내다본 예언이었는데, 그 백성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처음부터 이사야가 내다본 국제적 연대와 미래지향적 개방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꽉 막힌 유다인들로부터 견제를 받거나 배척을 당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모처럼 열린 이방인을 만나시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을 무력으로 식민 통치하는 로마 군대의 고급 장교였으므로 공적으로는 유다인들의 원수라 불릴 만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유다인들의 원로들은 그를 예수님께 소개하기를 그가 유다인들의 회당을 지어 주었고 유다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니 도와줄 만하다고 추천하였습니다. 또 자기가 데리고 있는 유다인 종들을 매우 아꼈으며 또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군인정신으로 충일한 사람이어서 신앙마저도 군인다운 단순함으로 예수님께 믿음을 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처형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 미사에 도입하였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또한 1945년에 출범한 국제연합은 미국 뉴욕에 세워진 본부 건물의 외벽에 이사야의 그 유명한 예언이자 인류의 이상을 크게 써 놓았습니다: “칼을 보습으로, 창을 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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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갈등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이를 폭력으로 또 힘으로 없애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폭력, 힘으로 인한 갈등 해소는 결국 모두에게 아픔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 부서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각 부서는 상대 부서를 힘으로 눌러 자기 부서의 뜻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한 부서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한 승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든 힘겨루기를 계속하면서 다음번에는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카인이 아벨을 죽여서 승리자가 된 것 같지만, 결국 둘 다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벨은 목숨을 잃었고, 카인은 자존감과 평화를 잃었습니다.
이렇게 힘에 의한 갈등 해소는 더 큰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가지고 갈등 해소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갈등 해소는 사랑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교도이면서 로마인의 장교로 알려져 있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종이 아픈 상황의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인 행동은 아주 의외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찾아가 부탁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가족이 아닌 거느리고 있는 많은 종 중의 한 명에 불과한 종을 위해 직접 찾아가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그가 종을 사랑했다는 것과 자신을 낮췄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의 구조를 자신의 지위를 통해 나타나는 힘이 아닌, 종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직접 갈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 구조에서 보여 준 백인대장의 모습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커 보이는 폭력과 힘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기본으로 있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 도저히 풀기 힘든 갈등도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있을까요? 백인대장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갈등을 깨끗하게 해소하면서, 평화 속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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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방법은 그만 말하고 이제 행동하는 것이다(월트 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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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뽑기
어떤 꼬마 아이가 놀다가 자그마한 나무 가시가 발뒤꿈치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따가웠고, 그래서 까치발을 하고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가서 가시를 뽑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엄마는 핀셋을 가지고 왔습니다. 순간 아이는 겁이 났습니다. 핀셋이 커다란 주사처럼 보였고, 뽑을 때의 통증이 너무 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본 엄마는 “네가 원한다면 가시를 그냥 둘테니 뽑을 준비가 되면 다시 오렴.”이라고 말했습니다.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발뒤꿈치의 통증으로 뛸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엄마에게 가서 핀셋으로 가시를 뽑았습니다.
가시를 뽑는 순간의 통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신나게 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도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과의 갈등, 사랑을 실천하기 힘든 마음, 부정적 생가 등의 가시 말이지요. 이를 어떻게 하십니까?
시간이 해결해 줄까요? 뽑을 때의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지금 당장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곧바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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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0월 29일입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로마의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교황님을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를 청하며 휴전선의 철조망을 녹여 만든 십자가를 선물했습니다. 교황님은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대통령의 방문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이냐시오 성모마리아 경당에서 ‘철조망 평화가 되다.’라는 주제로 136개의 십자가를 전시하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분쟁과 갈등의 상징인 휴전선의 철조망을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남과 북의 허리를 가로막는 철조망이 평화와 일치를 드러내는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136이라는 숫자는 남과 북이 휴전 중인 68년을 더한 숫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철조망을 녹인 십자가가 한반도 평화의 마중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휴전전의 철조망을 녹여 만든 십자가를 보면서 몇 가지 상상을 해 봅니다. 북한이 바티칸에 교황님의 방북을 원하는 초청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미국이 지원한 코로나19의 백신을 한국의 선박을 이용해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민들이 교황님이 선물한 코로나19의 백신을 접종하는 것입니다. 백신을 매개로 북한과 미국이 수교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들 듯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남과 북을 가로막던 모든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긴장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군사분계선은 생태계가 보존된 평화 공원이 되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평양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출발한 기차가 평양을 거쳐 부산으로 오는 것입니다. 상상을 마치면서 교황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남과 북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나는 기꺼이 남과 북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몇 천 년을 함께 살았던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동질감이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휴전선을 평화의 상징으로 물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휴전선은 축제와 화합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강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기적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 하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을 열면, 희망의 문을 열면, 사랑의 문을 열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품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까지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비오니 그분께서 저희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실 때 깨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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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시詩와 꿈
- 하느님의 시인詩人이, 꿈쟁이가 됩시다 -
한국인은 물론 소띠인 제가 아마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소일 것이고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일 것입니다. 둘 다 소씨입니다. 어제 구상 시인의 절친이었던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소의 말’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소를 많이 사랑했고 많이 그린 소의 화가 이중섭입니다.
“높고 뚜렷하고/참된 숨결/나려 나려/이제 여기에/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쌓이고 철철/넘치소서
삶은 외롭고/서글프고/그리운 것/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두눈 열고/가슴 환히 헤치다”
더불어 김종삼(1921-1984) 시인의 묵화墨畫란 시도 생각났습니다. 정말 시의 장면이 묵화같습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시와 꿈이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말씀(言)의 사원(寺)이 시(詩)입니다. 그러니 진짜 시인은 마음 안에 말씀의 사원을,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참 그윽한 깊이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시와 꿈이 있어 참으로 사람이 됩니다. 사람만이 시와 꿈을 지닙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있게 하는 것이 시와 꿈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밖에서는 모른다/살았는지 죽었는지/잎들 다 진 겨울나무들이 그렇다
그러나 보라!/살아 있지 않은가/봄되니/피어나는 꽃들/짙어져가는 신록들
아! 꿈이 있어야 산다/꿈있어 겨울 추위 견뎠다
꿈없으면 죽는다/꿈은 생명이다
가슴에 담았던 꿈/활짝 피어내니/아름다운 생명이다”-2001.5.6
성서의 예언자는 물론이고 예수님 역시 시인이자 꿈쟁이였습니다. 부단히 하늘 나라를 꿈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지난 주 제1독서의 주인공 다니엘 예언자가 시인이자 꿈쟁이이듯 대림 제1주 계속될 이사야 예언자도 시인이자 꿈쟁이입니다.
시와 꿈은 함께갑니다. 꿈에서 샘솟는 시요 시가 꿈을 키웁니다. 아, 꿈도, 희망도 키워야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우는데 시편 노래 기도에 바탕한 전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래서 하늘 나라의 꿈을, 희망을 부단히 키우기 위해서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시詩중의 시가 생명과 빛과 희망을 노래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시편’이요, 꿈중의 꿈이 ;하늘 나라 꿈’임을 깨닫습니다. 평생 시편을 노래하다 보니 세상 시맛을 잃은지 오래입니다. 어제는 아침 성무일도 후렴 셋을 노래하며 많은 시간을 지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꿈을, 희망과 기쁨을 노래한 싯구입니다. 모두가 하늘 나라 꿈을 앞당겨 살게 하는 기도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들이여 주님 앞에서 흥겹게 우쭐거리고 숲을 이룬 나무들도 손뼉을 쳐라. 주께서 오시어 영원히 다스리시리라. 알렐루야.”
“보라, 위대한 예언자가 오시어, 새 예루살렘을 세우시리라.”
한결같이 아름답고 하늘나라 꿈과 희망을 북돋아 주는 시적 표현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영원한 평화’에 대한 꿈과 시는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참으로 하느님의 시인이자 꿈쟁이인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해설이 필요없다 싶어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어 통째로 인용하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산이, 주님의 집이, 시온이,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대림시기 미사가 거행되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 성전입니다. 이사야의 꿈은 바야흐로 대림시기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의 길을 걷는 우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바라시는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바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파스카의 예수님이 재판관이자 심판관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얼마나 아름다운 평화의 꿈인지요! 영적 야곱의 집안에 속하는 형제자매님들,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시인이, 주님의 꿈쟁이가 되어 주님의 빛속에 걸어가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평화의 하늘 나라 꿈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또 이 은혜로운 대림시기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백인대장을 통해 이사야의 평화의 꿈을 실현시킵니다. 꿈과 희망을 잃었을 때 온갖 영육의 질병이 엄습합니다. 영육의 면역력 강화에 하늘 나라의 꿈과 희망보다 더 좋은 영적 식食과 약藥은 없습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인 예수님과 백인대장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백인대장의 종의 치유에 앞서 전제되고 있는 백인대장의 종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께 대한 겸손한 믿음이 치유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다음 대화는 늘 들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미사중 영성체전 우리의 고백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사랑과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은총의 응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칭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겸손한 믿음을 통해 앞당겨 실현되는 평화의 꿈, 치유의 꿈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참으로 하늘 나라를 꿈꾸는 겸손한 믿음의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 치유되는 우리들이요 우리 또한 하늘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시인이, 하느님의 꿈쟁이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평화를 실현하며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참 많이 바쳤던 오늘 화답송 시편 후렴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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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저희 프란치스칸 가족의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가톨릭 교회 내에서 성인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집단이지요. 매년 오늘을 축일로 지내는 이유는 프란치스코의 회칙이 교회로부터 공식 인준받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저희 축일이니 축하해 주세요^^
오늘 성인은 누구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오늘날에 누가 성인인가라는 물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를 통해 답을 내려주시지요. "성인은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일상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랍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바로 성인이십니다.
벗님 주위에 기쁘고 즐겁게 자신의 소명을 살아가는 이웃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성인을 만나러 멀리 성지순례를 가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성지순례는 성지가 따로 없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성지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만 필요할 뿐이지요.
성인이 많다고 자랑하고 영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소명을 살았는지 생각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해야한다고 성 프란치스코는 말씀하시곤 하였지요. 또 성인은 돌아가시기 전에 "형제들이여, 나는 내 몫을 다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몫을 다하기를 바랍니다"고 하셨답니다.
사랑하는 벗님!
성인되소서.
기쁘고 즐겁게 벗님이 받은 소명을 살아가소서.
그리고 벗님 주변의 많은 성인들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오늘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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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
'이방인의 믿음!'
백인대장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으면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종의 처지를 예수님께 알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예수님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탄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인대장은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방인'입니다.
유다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던 그가 이런 큰 믿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큰 믿음을 보시고, 이제 많은 이방인들이 하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믿음은 죄에 빠지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 부활하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처럼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지금 여기에서 말하게 하고 실현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믿음도 이렇게 큰데,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믿는 이들의 대열에 들어선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인가?
머리와 입으로만 믿고, 구체적인 삶으로는 믿지 않는 그런 위선적인 믿음은 아닌지?
전례력으로 새해 둘째 날인 오늘, 이방인의 큰 믿음 앞에서 나의 믿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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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기다림의 시간이 모두 같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풍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의 기다림과
시험 전날 잠을 못 자며 공부하는 아이의 기다림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과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다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행복하고 기대되는지의 여부는 누구를,
무엇을, 그리고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백인대장의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아픈 종을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의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고 배려합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마침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을 만난 백인대장은 이를 표현합니다.
“주님, 제 종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욕심과 바람만을 요구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표현합니다.
“수고롭게 이방인인 저의 집에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시면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백인대장은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기다림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기쁨과 행복의 기다림인가요?
아니면 고통과 초조함의 기다림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해마다 다가오는 성탄이기에
너무 익숙해진, 그래서 아무 느낌 없는 기다림인가요?
우리는 가난한 구유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크리스마스의
활기 속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기다림인지 잘 바라보아야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가난하게 오신, 나의 가장
가난한 마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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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한 말씀만 하소서.
백인 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그 백인 대장은 종을 예수께 데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하는데, 종이 숨을 거두려 한다는 말 같다. 루카 복음에는 그가 “죽게 되었는데”(루카 7,2)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루카 5,19)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을 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일을 하신다. 발 벗고 그 종을 치유해 주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 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그냥 종을 치유해 주셨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 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하고 대답한다. 여기서 백인 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이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백인 대장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짐작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믿은 그의 지성을 드러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사람으로서 제가 다스릴 권한을 받은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권한을 받은 당신께서는 말씀만으로 틀림없이 병을 떠나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 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 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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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 8)
마음이
무너진 곳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시고
누구보다도
먼저 기도하여
주시는 도움의
주님이 계신다.
삶의 아픔과
괴로움을
고쳐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은총의
대림시기는
무엇보다도
우리 주위의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다.
기도가 멈추면
사랑도 멈춘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들 믿음이다.
믿음은
진실한 한 마디
말씀에서
치유되지 않던
관계의 아픔까지
낫게 되는
은총이다.
믿음의 문을
열게하시는
말씀이다.
그저
말씀다운
한 말씀이
필요한 말씀의
여정이다.
참된 믿음은
말씀으로
서로를 살린다.
말씀 안에
희망이 있고
감동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말씀이 사람이며
사람이 말씀이다.
믿음은
말씀의
힘이다.
말씀이
빠져버린
믿음은
힘을 잃는다.
말씀의 나눔이
희망의 도착이
된다.
말씀과 마음이
만나니 감탄이
된다.
한 마디
말씀이 필요한
여기에
우리가 있다.
오늘을
구원하는
말씀의
실천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씀이 되는
믿음의
신비이다.
지나칠 수
없기에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는
말씀의
대림이다.
마음과 몸에
필요한 말씀이
우리를 다시
오늘을
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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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성탄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0-11).”
여기서 예수님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교리가 들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하느님이신) 분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2)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구세주이신 분이다.
(이 믿음에는, 하느님은 온 세상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나라’ 라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저는 예수님이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믿음은,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
첫 번째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의 말이 올바른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신 날”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 아니라면, 성탄절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 날이 될 뿐이고, 그러면 특별할 것도 없는 기념일이 되어버립니다.
(아기 예수님이 자라서 나중에 구세주가 되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이시고 구세주이신 분이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이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특별하고 귀한 자녀”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따라서 성탄절은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나의 구원’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개인을 무시하고 억압하면서 전체만 중시하는 ‘전체주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반대쪽에 있는 ‘나쁜 사상’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림’은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잔치라는 뜻인데, 이 말씀은, 당신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겉으로만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의 역사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조상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조상이 됩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뒤에 처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동방 박사들이었다는 것은,
“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위한 구세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에는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가 없고,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첫 번째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은 특정 계층 사람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세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에 목자들은 소외계층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에,
성탄절은 당연히 ‘모든 사람을 위한 날’입니다.
신앙인들만의 잔칫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잔칫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끼리만 모여서 축하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성탄 잔치에 ‘모든 사람’을 초대해서, ‘모든 사람’과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지만,
초대를 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의 부유한 신자들을 아주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그 당시에 코린토 교회에서, 부자들끼리만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당하고 굶주리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사랑을 거스르는 죄가 되고, 예수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죄가 됩니다.
성탄절을 지낼 때에 부유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려서 잔치를 하고,
자기들끼리만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축하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성탄절을 모독하는 죄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계층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또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라는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할 때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곁에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마태 5,46-47).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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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
인간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예절이 있습니다.
보통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기에 앞서, 제자가 먼저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립니다.
장관이 실무자를 먼저 찾아가기보다는 실무자가 결재판을 들고 장관을 찾아갑니다.
명절 때 부모가 자녀들 집을 먼저 찾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녀들이 먼저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의 틀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성체성사는 어떤 성사입니까?
크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먼저 찾아가 뵈어야 당연한 일인데, 황공스럽게도 그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너무나 송구스런 일이기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정녕 기적 같은 일이기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사실 우리가 송구스러운 나머지 미사 때 마다 외치는 위 성체성사 전례문은 백인대장이 오래 전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신앙은 무척이나 올바르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 충만한 치유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사도들 못지않은 신앙,
유다인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제대로 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이었기에 겸손하게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열렬한 신앙, 깊은 신앙 앞에 예수님께서도 감탄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은 치유나 기적을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께서 현장에 계셔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그들의 신앙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 굳이 오시지 않아도 말씀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인내의 주님, 너무나도 부족한 믿음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청하면서도 의심하고, 구하면서도 의혹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는 불쌍한 우리를 용서하여주십시오.
부디 청하오니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해 주십시오.
백인대장의 그 견고한 성채 같은 믿음은 아닐지라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오늘 우리에게 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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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에 대해 묵상한다고 다 믿음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자, 그는 굳이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나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그들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면 분명 그분의 종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묵상으로 얻어진 믿음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도 마지막 때에 주님께 참믿음으로 살고 왔다는 칭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위해 하느님의 대리자라 여기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청할 줄 아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백인대장처럼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우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도 묵상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우선 우리 묵상이 ‘주님은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를 확정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심을 믿어도 지옥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걸음을 받쳐줄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어떤’ 성품을 더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성품을 묵상한다고 믿음이 다 증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사람이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괴물이 나타나서 그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정진수라는 인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죄에서 벗어날 것을 설파합니다.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까지 생겨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집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형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의 딸이 새진리회의 추종자입니다.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이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10년밖에 살지 않고 출소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옥을 만드신 분이 반드시 정의를 실현한다는 새진리회의 교리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정진수란 인물도 사실 고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나는 무슨 죄를 지었나?’를 되새기며 그 고지가 틀렸기만을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포가 자신을 죄짓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사의 딸과 함께 범죄를 저지릅니다.
죗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나온 형사의 딸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함께 납치합니다.
그리고 지옥의 사자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 사람을 불태웁니다.
어차피 지옥의 사자가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자신들이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점점 더 세상은 지옥이 되어갑니다.
이것을 통해 돈을 버는 새진리회, 그리고 자신이 고지받은 것을 알면 가족이 다칠까 봐 몰래 죽으려고 외딴곳으로 숨는 사람들, 또 그런 신의 계시를 방해하는 이들을 또 방해하는 세력들. 이렇게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되어간다는 내용이 지옥입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만 집중하고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자비보다 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무서운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정의로우신 분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니고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것들도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렇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한 사람입니다. 자신과 같이 유다인이 아니어도 좋은 것을 청한다면
반드시 들어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자기 종의 병이 낫게 하실 분임임을 알았습니다.
믿음은 자비가 곧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전능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반도의 유일한 1946년생 근육할아버지’란 제목의 비디오가 있습니다.
70이 다 되어가시는 근육 할아버지의 근육은 젊은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완벽합니다.
그만큼 큰 노력을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50년간 소싸움을 하는 직업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지고 나면 그 패배감을 술과 담배로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다 건강 악화로 위, 장, 쓸개, 맹장 수술을 해야 했고
아내는 할아버지의 병수발과 함께 생계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크게 깨달은 할아버지는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에 자신도 땀 흘릴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아내는 할아버지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할아버지의 근육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묵상하고 정의로워지려고 하지만 이 두 부부는 서로서로 상대의 고생을 묵상한 것입니다.
상대의 자비와 사랑을 묵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상대에게 서운하지 않은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가 긍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생기게도 하고 사라지게도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도 우리는 자비를 묵상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상황이지 그것만을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밝은 면, 자비와 사랑을 묵상할 때만 커집니다.
부정적인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차피 내가 믿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고 믿으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감소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려면 항상 하느님의 긍정적인 속성을 묵상하여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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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9. 대림 제1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이사2,1~5)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4)
이사야는 2장 2절에서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성전으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였고, 이사야서 2장 3절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제 이사야서 2장 4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주님의 판결로 인해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즉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당신의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희망에 찬 예언이 제시된다.
여기서 평화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원죄와 완고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옥좌에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원수되었던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에게서 내려오는 평화를 나누어 갖게 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로 볼 수 있다.
전쟁의 무기를 모두 농기구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는다는 예언이 바로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완전한 평화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이것은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평화시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으로 이 땅에 시작된 메시야의 통치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될 메시야의 통치로 인한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내다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와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는 같은 뜻의 대구 구조를 이루는 문장이다.
앞의 것은 민족(나라)들 사이의 분쟁 해결의 측면을 강조하고, 뒤의 것은 잘못을 어긴 자들, 각 개인을 바로 잡는 교정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재판관이 되시고'에 해당하는 '웨샤파트'(weshapat)나 '심판관이 되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호키아흐'(wehokiah)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행위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이 구절에서 주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는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평화를 구가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칼과 창은 전쟁때에 필요한 무기이지만, 보습과 낫은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 필요한 농기구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참전한 자들이 평화로운 때에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고, 또 농사일을 하다가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쟁터로 나가곤 하였다.
따라서 농기구를 잡은 손이 무기를 잡게 되고, 또 무기를 잡은 손이 농기구를 잡게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미래의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미래의 평화 시대를 예언했을 것이다.
'보습'(plowshare)은 쟁기의 술바닥에 맞춰 끼우는 삽처럼 생긴 쇠조각을 말하며,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리고 '낫'(pruninghook)는 곡식을 추수할 때 이삭을 자르는 도구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전쟁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칼과 창을 파종과 추수때 사용하는 농기구로 만들 것임을 지적하여, 더 이상 살상 무기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평화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와 마찬가지로, 본문은 절대적 부정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부정어 '로'(lo)가 이끄는 문장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같은 뜻의 대구를 이루는 강한 부정문을 반복 사용하여 두 번 다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그칠 것이며, 완전한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 예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발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마태24,7)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모든 분쟁과 싸움, 다툼이 종식되는 완전한 평화, 곧 그리스도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다해 [대림제1주간 월요일]
외아들 예수(모노게네스-하나로 갖는 이)
(마태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카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 성전)이다. 곧 자신의 뜻, 욕망을 위한 신앙을 사는 사람들이다. 백인 대장은 로마의 군인이다. 돈과 명예(義), 그 세상 힘의 원리로 사는 세상의 대장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시러 그 저주의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군인이 먼저 다가온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 중풍 또한 카파르나움이다. 중풍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病으로, 우리의 머리, 주인이신 그 주님의 뜻,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모든 죄인들을 의미한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가서 고쳐줄까?’란다. 주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죄인들을 찾아 오셨듯이, 오늘도 찾아 가시어 그 잘못된 생각(중풍- 카파르나움)을 고쳐 주신다는 말씀이시다.
8 그러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 자신의 욕망, 뜻(명예, 의)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지은 카파르나움의 자붕은 자격이 없음을 아는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된 사람의 말이다. 그 자기부인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청할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한 말씀으로 고쳐질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곧 주님의 말씀이 생명수, 양식임을 아는 사람이다.
(아모8,11)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요한4,13-14)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세상의 물, 곧 사람의 말이다. 인간들의 욕망(慾望), 명예(名譽), 의(義)를 위한 물(말)은 헛된말, 생각으로 하늘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의 물(한 말씀)은 살아계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 하시며, 영원한 하늘의 생명으로 이끌어 가신다. 곧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아는 것, 깨닫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요한7,3참조)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많은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머리이신 주님의 말씀이 아닌, 그 머리의 지체, 꼬리인 자신의 뜻을 위한 말(물) 로 중풍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그들 중에, 그것도 이방인이 그 자신의 삶이 헛된 것임을 아는 자기부인이 된 사람이 請하는 한 말씀이기에 예수님께서 감동을 하신 것이다.
박사학위 다섯 개를 다 버리고 아프리카에서 그들을 위해 희생을 한, 슈바이쳐 처럼, 그래서 세상에 칭찬과 명예를 받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헛된 것임을 청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주님의 한 말씀을 갖는 이들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말씀은 샘명수(물)와 함께 씨를 뜻한다. 곧 주님의 말씀, 씨를 갖고 가지 못하면 씹을 것이 없어 이빨끼리만 갈리는 ‘그 이를 갈 것’이라는 말씀인데 곧 말씀을 가지고 가지 못하면(깨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간다 해도 그곳이 바로 ‘이를 가는 곳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열병-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의 용서, 생명, 의로움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열심, 열성, 의로움으로 스스로용서, 구원을 위한 삶을 살려하니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어, 열이 나는 열병(熱病)이다. 그 헛된 열성(열병)의 손에 참된 열성이신 주님을, 말씀(물) 대시니(부으시니), 열이 가신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 드러누워 있던(죽었던) 여자가 하늘로, 주님의 뜻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시중을 들었다- (디아노코스-말씀으로 섬기다) 곧 말씀이 하늘의 용서, 생명임을 깨달아 그 용서, 생명의 주님으로 섬겼다는 것, 믿었다는 것이다. 그 열병의 다른 모습이 저녁의 상태이며 마귀 들림이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저녁- 구약, 곧 율법(제사오하 윤리)에 멈춘 신앙이 마귀 들림이다. 그래서 아침-신약으로, 곧 그 율법을 당신의 목숨으로 대속하시고 완성하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그 구언의 생명, 새 계약으로 반드시 건너와야(파스카)한다.
율법으로는 죄만을 알뿐이다. 율법의 그 사람의 의로움으로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의 대속, 그 예수님을 진리로 믿어, 그분의 의로움을 전가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느님나라다.(요한14,6 로마3,20-25참조)
그런데 하느님의 말슴을 사람의 뜻을 위한 선악의 말씀, 그 둘로 먹고 가르치며 사람의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자는 것이 뱀(악령*-마귀)의 유혹을 먹은, 곧 선이 악을 대속해 생명을 주시는 한 말씀을 선악의 그 둘로 준 거짓말, 그 거짓가르침으로 중풍, 열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 심판을 주는 그 선악의 둘, 그 거짓을 쫓아내고 선악의 둘의 말로 힘들고 지친 그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신 것이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우리의 병, 질병, 온갖 죄들을 예수님께서 다 떠맡으시고, 대속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온갖 더러움을 다 씻어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신(히브10,1-22) 성령께서도 증언하신 그 새 계약의 구원, 생명의 한 말씀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8,5~11)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8ㄴ~9)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로 번역된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uk eimi hikanos;I am not worthy; I do not deserve)에서 '히카노스'(hikanos)는 '고려할 만한', '많은', '가치있는', '적합한', '알맞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유대인인 내가 굳이 너에게 가서 고쳐 주어야 하느냐'(마태8,7참조)는 질문에 대해, '저는 주님께서 저희 집에 들어오실 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당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식사를 함께하는 등의 이방인과의 친교를 금지한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던 이방인백부장의 사려깊은 배려이기도 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마태오 복음의 주독자층인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믿음 없음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면서, 백부장과 같은 큰 믿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 8장 8ㄷ절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에서 '그저'에 해당하는 '모논'(monon; only)은 '단순히', '오직', '다만'의 의미를 가지고서 수식하는 문장의 의미를 제한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 '한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logo; a word)는 '말씀'이라는 뜻을 가진 '로고스'(logos)의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단수형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만 한 말씀으로 말해 주십시오'이다.
그는 주님의 '말씀'(로고스)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 믿음의 소유자였다.
말하자면, 이방인 백부장이 바란 것은,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이 주문을 외운다거나 주술적 기원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고침을 입으리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부장도 마태오 복음 8장 9절에서 남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었는데, 이러한 권세로 인해 교만하거나 방종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권세를 가진 분을 분별할 줄 알고, 그분에게 그 권세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종이 겪고 있는 질병이나 이 세상 만물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무런 권세를 행할 수 없었기에,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해 진정한 권세를 가지고 질병까지도 복종시키는 예수님 앞에서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질병이나 고난이 마귀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백부장은 자신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자신의 부하들이 그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님께서 질병을 유발시키는 더러운 영들을 향해 명령하시면, 그 세력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위와 위상과 그 능력을 깨달아, 그분께 대한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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