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5:10-20, 마가복음 10:17-23
“성도에게 비참한 일”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이 정체성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정체성으로 마귀의 시험과 세상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사역 역시도 사랑받지 못한 이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을 향해 “아니다! 너는 사랑받는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일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환대의 삶’으로 나와 타인 간에 이루어지는 존재의 변화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일어납니다.
선을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진정한 선과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라야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사랑의 존재’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이상으로 성도가 얻어야 할 다른 정체성은 없습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하나로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정체성을 얻기 위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전도자의 말처럼 그 일들은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도서 1:2)가 됩니다.
한 주간 혹시나 내가 누구인지를 잊은 채 살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그 어떤 세상의 수식어보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사랑의 존재’라는 정체성, 이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잠언의 저자는 “나는 세상에서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라고 말하며 비참한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이상합니다. 전도자는 돈을 많이 버는 것, 재산이 많은 것을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왜 불행이고, 재산이 많은 것이 왜 불행입니까?
10절 말씀입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전도자의 이 말에 동의 되십니까? 헛되어도 좋으니까 돈 좀 많고, 부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여기에 우리의 본심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본심이 있습니다. 성도는 ‘그래도 돈 좀 많고, 부유했으면 좋겠다.’라는 이런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돈과 부의 추구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끝도 없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정부패, 폭력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돈과 부를 끝도 없이 추구하는 현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과 극우 기독교를 통해 부정부패, 폭력의 사태를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불의한 자들에 기생해 돈, 부,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우리는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행복하면 또 다행인데, 이런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비참한 일을 보았다.”
13절입니다. “13 나는 세상에서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아끼던 재산이, 그 임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13절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이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입니다.
소유한 재물을 잃을까, 또는 더 늘리지 못할까를 끊임없이 걱정해야만 하는 삶이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은 잃을 것도 많습니다. 지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런 해를 당해도 좋으니까 재물을 많이 소유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전도자는 한 가지 예화를 들려줍니다. “14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 15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 가지 못한다.”
많이 소유한 자가 재난을 만나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녀를 낳습니다. 이 자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맨몸의 상태에서 인생을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은 파산으로 시작된 인생의 삶은 재산을 모으기도 힘듭니다. 만약 힘들게 인생을 살아 재산을 모았다 하더라도 모은 재산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자신에게 해가 되도록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녀에게 큰 고통과 짐을 안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재산이 많을수록 재산을 잃는 고통은 더 큽니다. 더 두렵고, 절망스러운 일이 됩니다.
전도자는 이런 예시를 통해 돈과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 15절은 부유한 사람이 겪는 비참한 일이라면 16-17절의 말씀은 부유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겪는 비참한 일에 관해 말합니다.
“16 또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17 평생 어둠 속에서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살 뿐이다.”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돈과 부를 ‘추구’하는 삶, 돈과 부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사는 삶을 빗대어 전도자는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라 합니다. ‘그래, 그렇게까지 살아서 무슨 보람이 있었는데?’라고 질문합니다.
전도자는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는 보람은커녕, “평생 어둠 속에서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사는 삶이지 않은가?”라고 합니다. 돈과 부를 욕망하며 추구하는 삶을 애써 살았지만, 돈과 부를 얻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런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살 때 울분, 고생, 분노에 시달리며 살지 않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돈과 부를 가져서 그 돈과 부를 지키려는 삶, 돈과 부를 욕망하며 추구하는 삶 모두 전도자의 눈에는 비참한 삶입니다.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돈과 부를 지키려는 이들, 욕망하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길,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무릎을 꿇은 사람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이를 예수님은 사랑스럽게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예수님께 무릎을 꿇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대화 후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대체 어느 정도까지 가져야 재산이 많다고 하는 거지?’, ‘얼마간의 재산을 가져야 괜찮은 거지?’
오늘 하나님 나라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돈과 부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18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몫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같은 몫을 주시지 않고 다른 몫을 주십니다. 이렇게 받은 몫에 자족하고, 주어지 몫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자,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19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20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전도자는 부와 재산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각자에게 정해진 몫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부와 재산에 관해 주어진 인생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수고로이 애쓰며 사는 인생이 행복한 삶입니다.
부와 재산을 욕망하며 추구할 때, 불행한 삶이 시작됩니다. (이상중 목사의 예시) 이런 사람은 자신이 가진 부와 재산을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아까워서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하지만 부와 재산이 하나님이 주시는 몫이라고 여기는 성도는 기꺼이 부와 재산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욥기에 기록된 욥의 일화가 이런 믿음의 태도를 잘 설명해 줍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욥의 믿음을 시험하는 중에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소식을 듣고 욥은 이렇게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이 때에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욥기 1:20-22)
성도에게 비참한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이 정해주신 몫을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삶은 전도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전도자는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다른 시각으로 주어진 것들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선물을 선물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두운 눈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성도의 비참함입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에 자족하고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