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8년 11월 4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오늘은 "식은 커피를 마주하는 낯선 일상"이라는 글을 쓰려는 생각을 하면서
아침을 굶은 터라 점심을 맛있게 먹으며 "윤칼 세상"을 시청하였습니다.
조선닷컴을 비롯하여 가짜 뉴스를 지적하는 급조된 논평이었는데
가짜를 지적하면서 진짜 말의 실수를 하였습니다.
가짜 뉴스는 신성일 선생의 타계 소식이었고
말의 실수는 말미에 신성일 선생의 명복(冥福)을 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사망 기사를 질타하면서
정작 본인은 쾌유(快癒) 대신 명복을 빌고 말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시선의 눈, 마음의 감찰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하루 동안의 사망설 논란은 질실이 되어
명복을 빈다는 말의 실수는 실제상황이 되었습니다.)
윤칼 세상의 논평은 항상 완전한 원고를 쓰고 방송하며
그 원고는 곧 책으로 출판되어 어느듯 4권을 출판하였습니다.
급조된 논평의 실수는 글짜의 오타와 같은 옥의 티이지만
윤칼 세상의 시사 논평은 논평의 지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탑 클라스입니다.
윤칼 세상은 지난 날 가짜 뉴스의 몰매를 맞고 피정의 세월을 보내면서
풀무의 연단을 받아 불의를 응징하고 진실과 정의의 투사가 되어 사자후를 발하며 포효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지혜를 가진 윤칼 세상의 논평은
다니엘서의 연단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게 합니다.
☞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
참으로 윤칼 세상의 시사 논평은 뿌리 깊은 애국의 나무여서
애국의 지혜로 빛나는 진실과 정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었습니다.
한편 윤칼 세상과 대조되는 타다남은 부지갱이 같은 설만(褻慢)한 거짓부렁은
최근 좀팽이의 난을 일으켜 하루살이의 시정잡배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개인 유튜브 방송이지만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온갖 거짓과 술수로 음해하고 모해하며
애국의 진실과 정의를 훼손하는 개망나니 짓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애국과 정의의 옷을 입은 불편한 사람들.......
언젠가 살생부를 들고 추살하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에게는 시편 64편의 말씀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진실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시64:2-7)
하나님의 쏘시는 공의의 화살에 상할 죄악을 꾸미며 묘책을 찾았다는 좀팽이의 연대는
광장과 아스팔트의 태극기 물결을 거스리는 오염된 쓰레기요, 시궁창이요, 수체 구덩일 뿐입니다.
윤칼 세상의 명복을 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식은 커피를 마주하는 낯선 일상의 글이 표적을 벗어났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장례식에 조의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는 크리스챤의 말은 말의 실수가 아니라
무속신앙의 발로라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 장례식을 치르면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기도는 지옥가는 크리스챤의 전형적인 무속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쾌유에서 명복 사이는
천국과 지옥 사이 깊은 구렁의 절대경계지점입니다.
사도신경의 원문인 "성인의 통공"은
개신교 신앙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은 자의 넋일 뿐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서가 아니라
10세기 동안 수정을 거친 완벽한 카톨릭의 교리를 집대성한 고백입니다.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일제시대 우리의 교회가 예배 드리기 전.......
신사참배를 하며 동방요배를 하고 가미가요를 불렀던 것과 진배없을 것입니다.
1938년 9월 10일 제 27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성경을 모독하고 진리를 배도하는 신사참배를 시행할 것을 결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3년에 한국기독교는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그 명칭이 해체되고
"일본 기독교단 조선지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가마다나'로 대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던 찬송이 '가미가요(일본국가)'로서 우상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던 예배가 동방요배로 바꿔지고,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던 기도는 800만 잡신을 묵념하게 되었다.
몸에 밴 사도신경의 정신은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 그 우상화의 늪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도신경을 바로 가르치지 않고 외우게만 하는 교회는
사도들의 고백이라는 전제적 신앙으로 교조화되었습니다.
식은 커피를 마주하는 낯선 일상이라는 가벼운 글을 쓰려고 하였는데
원고 없는 글을 쓰다 보니 사도신경의 교조화라는 무거운 주제를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일 교회를 다녀와서 주방에 덩그러니 놓인 식은 커피를 보면서
교회 가기 전 아침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9시 30분에 세면을 하고
머리를 말리면서 커피를 끊였습니다.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와이셔츠 소매의 단추를 채웠습니다.
왼쪽 소매는 오른손으로 능수능란하게 채웠지만
오른쪽 소매는 왼손엄지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손바닥과 다른 네 손가락을 총동해서
거의 5분만에 겨우 소매의 단추를 채웠습니다.
왼쪽 소매를 능수능란하게 채우는 오른손을 감탄하며
언젠가 방송에서 보았던 두 팔이 없어 발가락으로 붓글씨를 쓰는 기인이 떠올랐습니다.
사고로 잃은 두 팔을 대신하며
모든 일상을 발로 하면서 발의 기능이 발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팔을 잃고
발가락으로 시계를 수리하였습니다.
불편을 극복하는 삶의 능력은
산 사람의 몫에 태인 십자가였습니다.
비록 5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왼소매의 단추를 채우고 나홀로 양복을 입는 신사의 품위를 더높였습니다.
그 동안 소매의 단추를 채우지 않고 양복을 입은 불편은
소매의 끝이 팔굽치에 걸려있는 상황을 겪지 않은 사람을 절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끊여 놓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놓치고
한모금 입다시고는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식은 커피의 낯선 일상은
비단 주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이 되었습니다.
커피를 한모금씩 마시는 습관은
글을 쓰거나 사극을 시청하다가도 자주 겪는 일상입니다.
카페의 글을 쓰면서 커피를 끊여 놓았는데
글을 다 쓰고 오타를 수정하고 윤문 작업을 할 때 그제서야 커피를 발견하고
식은 커피를 낯설게 마주하였습니다.
사극을 시청할 떄도 커피를 끊여 놓았는데
한모금 마시고는 사극이 끝나고 다음편으로 넘어갈 때야 식은 커피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무엇인가 몰입을 하다보면
평소 그렇게 즐기던 커피마저 식은 커피의 낯선 일상을 만들었습니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면
허브향으로 가득한 온전히 커피를 마시며 임마누엘 허브 동산의 정취를 한껏 느낍니다.
베란다의 바닥에 가득한 자갈은
오랜세월의 풍랑과 파고의 흔적이어서 자연의 상리를 조형한 심상의 유희가 되었습니다.
문득 베란다의 자갈밭을 조성하면서 쓴 글을
다시한번 묵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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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그 창조적 생명의 조형을 느끼게 하는 원예용 자갈은
거친 파도의 풍상을 겪고 협곡의 세류가 빚어낸 조형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흔적으로 남은 조약돌과 자갈에 대한 심상유희는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를 지순한 기쁨으로 느끼는 삶의 정취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몸에 밴 산과 계곡의 풍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계곡을 탐사하며 기암절곡의 신비를 카메라 앵글에 담았습니다.
계곡에서 느끼는 푸른 하늘과 산, 그리고 계곡의 바위 틈으로 흐른는 세류가 만들어낸 자갈의 신비는
심상유희가 충만한 마음의 생태 구조를 작가의 직관적 시선으로 느끼게 하였습니다.
대구에서 가까운 가야산의 합천 홍류동 계곡과 성주 포천 계곡과 만귀정,그리고 고령의 백운동 계곡은
오랫동안 생명의 순환과 대자연의 신비를 심상의 아름다운 조형으로 느끼게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3대 계곡으로 유명한 지리산의 칠선 계곡은
한라산의 탐라 계곡과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보다 훨씬 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였습니다.
지리산은 칠선 계곡 뿐만 아니라 한신 계곡과 뱀사골 계곡 등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계곡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원예용 자갈은 계곡의 세류가 만든 자갈 뿐만 아니라
파도의 풍랑이 만든 조형 예술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해변의 자갈로 제일 유명한 곳은 백령도의 콩돌이요,
소장하고 있는 원예용 자갈은 백령도의 콩돌인 것 같습니다.
백령도의 콩돌 뿐만 아니라 태종대의 자갈마당과 거제도의 몽돌 해변은
조약돌 해변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도의 알작지 해변과 적덕도의 능동 자갈 해변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바닷가의 자갈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그외에도 자갈 해변으로 유명한 곳은
고흥 염포 해수욕장의 자갈 해변,완도의 자갈 해변, 울산의 주전 몽돌 해변,
서산 벌천포의 자갈해변, 대장도의 자갈 해변, 경주 감포 오류고아리 자갈 해변 등 있습니다.
커다란 바위가 자갈이 되는 과정은
대자연의 신비요, 생명의 순환구조를 가진 자연의 상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한 그대로가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대자연의 생명 순환 구조는
태고의 신비를 느끼는 창조적 신앙으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무생물의 생명 활동은 생명의 순환으로 호흡하는 대자연의 신비요,
자연의 상리를 마음의 상으로 느끼는 작가의 살아있는 숨결입니다.
원예용 자갈의 신비한 생명은
허브의 생명보다 훨신 더 유구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였습니다.
편벽나무의 벽과 조화를 이룬 허브, 그리고 물방울 맺힌 원예용 자갈을 바라보는 마음의 탄성은
자연의 상리를 조형한 심상의 유희로 충만한 지순한 기쁨으로 넘칩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전국의 계곡을 탐사하며 자연 그대로 원형의 에너지를 생명의 신비로 축적하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해변의 자갈을 삶의 풍류로 즐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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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커피를 먼저 마시고는
끊여 놓은 된장국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된장국의 주재료인 시금치와 부추와 단배추 가운데
가장 값이 싼 단배추를 식재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참고로 아파트 입구 단골로 애용하는 마트에는
시금치 한단 2600원, 부추 한단 1900원, 단배추 한단 1000원이었습니다.
이번에 끊인 된장국은 단배추 된장국인데
된장국의 정일품 맛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단배추 된장국을 끊일 때는
먼저 배추를 깨끗이 씻고 소금을 약간 넣어 끊는 물에 데칩니다.
그리고 칼로 총총 썰고는 물기를 없애고
찐마늘과 청량고추와 애호박을 썰어 넣고 된장과 함께 충분히 버무려 섞어줍니다.
그리고는 약불에 볶으면서 맛향이 우러나면
물을 부어 센불에 푹 끊입니다.
이렇게 끊인 된장국은
유명 맛집의 된장국보다 훨씬 더 자연의 맛, 그 풍미가 느껴집니다.
정성된 요리의 과정은
행복한 삶, 그 맛의 풍미로 넘치는 프로페셔널한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