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1 중형 세단은 한동안 관심 밖인 차종이었다. 한국 자동차사회에 너무 익숙한 존재인 이유도 있었고, 요즘 시장에서 세단이라는 전통적인 차종이 워낙 열세인 탓도 있었다. 실제로 세단의 최근 입지는 썩 좋지 못하다. SUV의 인기에 떠밀려서다. 그건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명확한 현상이었다. 전통적으로 세단 인기가 탄탄했던 미국이 대표적이다. FCA는 일찌감치 크라이슬러 200과 닷지 다트를 단종했고, 포드는 지난 봄 전통적인 세단을 더 이상 개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GM은 이들만큼 극단의 결정을 내리진 않았지만 쉐보레 소닉(아베오)과 임팔라는 후속모델 개발 계획이 없다. 모두 SUV 개발 및 판매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영향을 적잖이 받아 세단 인기가 좋았던 한국 내수 시장에서도 세단은 예전만큼 위상이 아니다. SUV의 경우 지난 2011년 19.3%였던 점유율이 지난해 35.6%까지 올랐다. SUV의 점유율 확대는 일반 승용차의 점유율 축소와 직결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승용차는 곧 세단을 의미한다. SUV와 반대로 일반 승용 모델 점유율은 지난 2011년 76.5%에서 지난해 60.8%로 대폭 하락했다. 중형 시장도 흐름이 비슷하다. 지난 2011년 중형 승용차 시장에서 38.7%를 차지했던 SUV 점유율은 2014년 50%를 뛰어넘었다(52.2%). 지난해 팔린 중형 승용차 100대 중에선 54대 가량이 SUV였다.
이를 반영하듯 중형 SUV는 중형 세단을 제치고 각 제조사의 간판 노릇을 하고 있다. 올 들어 6월 말 현재까지 판매량을 보면 기아차 쏘렌토(3만5883대)는 K5(2만3163대)보다 성적이 좋다. 르노삼성 QM6(1만2804대)도 SM6(1만2364대) 판매를 뛰어넘었다. 현대차 싼타페(4만3698대)는 말할 것도 없다. LF 쏘나타(3만2770대)를 판매량으로 압도할 뿐 아니라 그랜저(5만8468대) 다음 가는 국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해 있다. 중형 시장에서 세단이 SUV보다 많이 팔리는 건 한국지엠(쉐보레)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지엠에는 중형 SUV가 아예 없다. 말리부 6211대 판매가 전부인데 이마저도 소형 SUV 트랙스(4838대)와 격차가 크지 않다.
중형 세단에도 기회가 없진 않았다. 2016년이 바로 그 기회였다. 중형 세단은 그해 국산차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차종이었다. 르노삼성 SM6, 쉐보레 말리부 등 색다른 ‘맛’과 ‘색깔’의 제품이 종전의 시장 강호(현대 쏘나타, 기아 K5)와 경쟁하며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하지만 시장 전반의 흐름까지 뒤집지는 못했다. 중형 시장 내에서 승용차 비중은 2014년 39.5%에서 그해 42.3%로 커지고 지난해는 44.3%까지 확대됐지만 판매량은 오히려 감소세다. 2016년 20만2588대, 지난해 17만7467대로 지난 2015년(21만2664대) 규모보다 적다. 배기량(1600cc 이상~2000cc 미만) 기준의 분류임을 감안해 범위를 소형차(1000cc 이상~1600cc 미만)까지 넓혀서 봐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2016년 41만7047대, 지난해 37만1139대로 지난 2015년(42만1635대)에 미치지 못한다.
#2 관심 밖에 있던 중형 세단에 최근 다시 눈길이 가는데 그건 수입 모델, 그 중에서도 일본 중형 세단들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 출시한 8세대 토요타 캠리와 올해 5월 선보인 10세대 혼다 어코드는 큰 기대 없이 탔다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캠리의 경우 하이브리드 모델이었는데 낮게 깔린 무게, 견고한 스티어링과 안정된 움직임이 매우 놀라웠다. 재미없는 모범생 이미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L 터보 엔진과 10단 자동기어가 올라간 신형 어코드는 그 충격이 더 컸다. 정교한 움직임, 높은 주행 한계는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스포츠세단에 뒤지지 않아 보였고, 어떤 상황에도 자신감 넘치고 확신을 심어주었다. 말하자면 그간 우리가 기대해온 혼다차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론 둘 다 완벽한 상품은 아니었다. 공간은 여전히 현대·기아차의 그것만 못했고 내장재나 조립품질, 편의사양의 수준이나 가짓수에서도 국산차보다 나은 점을 찾기 어려웠다. 10년 가까이 이어져온 스타일링 혁신도 아직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두 차를 완전히 배제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가격 대비 편의사양, 보험료와 유지·보수 등의 유지비, 순수 차 값을 생각하면 비이성적인 선택인 줄 알면서도 자꾸 되돌아보게 되더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두 차는 내 마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지루함의 대명사였던 두 차의 흥미진진한 변신은 SUV의 유례없는 인기에 잇따른 ‘세단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적 화두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두 차가 2010년 등장한 YF 쏘나타에 큰 내상을 입었던 대상들이라는 것이다. 당시 YF 쏘나타는 미국 중형 세단 시장 내에서도,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반면 당시의 토요타와 혼다는 뒤통수를 맞은 듯 당황하고 허둥대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후 캠리, 어코드는 이상한 변화를 반복했고 매번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은 8년 만에 뒤바뀌었다. LF로 넘어온 쏘나타는 다시 평범해졌고 캠리, 어코드 일본 쌍두마차는 캐릭터를 바로 세우며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반격의 공은 다시 쏘나타에로 돌아왔다. 쏘나타는 내년께 완전신형 모델로 세대 교체한다. 올해 초 제네바에 선보인 르 필 루즈 콘셉트가 스타일링의 토대라는 소문이다. 과연 새로운 쏘나타가 YF 때만큼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을까? 정신 차린 일본 라이벌들에게 다시금 각성을 요구할 만큼 강력한 면모를 갖출 수 있을까? SUV가 활개 치는 지루한 자동차 시장에 약간의 재미라도 더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