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南寺 한 바퀴
‘노년엔 무조건 친구를 만나라’는 경고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주위 친구들은 스스로 멀어져갔거나 돌아오지 못할 먼 길로 떠나고 있어 친구 만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 이틀 뒤, 현직 때의 동료들과 학창 때의 친구가 어우러져 집을 나섰다. 마음이 따뜻한 친구는 정확한 행선지를 밝히지 않은 채 석남사 근처를 찾아간다며 묵묵히 자신의 차를 몰았다. 석남사는 주위 경관이 수려해서 현직 때 울산에서 일할 때 몇 번 들렀던 기억이 남았다. 차는 그렇게 사는 곳에서 고속도로로 50여km를 북상했다.
봄맞이 나들이라면 오륙도나 다대포 등 태평양이 조망되는 쪽으로 남하해야 되지만 그쪽은 자주 찾는 곳이라 40년 만에 찾아가는 석남사 쪽 산천이 벌써부터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늘처럼 옅은 안개가 드리운 맑지 못한 날씨는 오히려 사진 속에서 피사체를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찰 일주문은 단청을 새로 했는지 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장송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이곳 소나무들은 그 모양이 특이했다. 꼭대기 부분에서 가지를 꽈배기처럼 비틀어 서로 엉키면서 여인들의 헝클어진 파마머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 소나무를 향해 “조금 더 예쁜 모양을 만들 수는 없었더냐?” 하면서도 그 특이한 형상에 이끌려 나무 윗부분을 여러 컷 카메라에 담았다. 우린 일주문 맞은편 대형 주차장에 차를 세웠지만 신도들 차량인지 사찰을 차로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보였고 걸어서도 오가는 이들이 자주 나타났다. 우리 일행처럼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사찰의 풍광에 이끌려 찾아온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 여행은 이처럼 사람을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영남알프스 고봉들 중 대장격인 가지산 정상이 사찰 뒤 멀리에서 고개를 내밀자 직장 산악회에서 산을 올랐던 중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산은 여전히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지만 지난 기억을 더듬자니 오늘 나들이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지산을 중심으로 빙 둘러 솟은 영남알프스 코스를 종주한다고 무모하게 매달렸던 것이다. 높이가 1000m를 넘는 운문산과 천황산 재약산 신불산 영축산 고헌산 간월산이었다. 이곳에다 알프스란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 유럽 알프스는 한반도 길이보다도 긴 1200여km에 높이도 최고 4800m에 이르는데다 4000m가 넘는 봉우리만 11개나 된다. 가지산 정상 주변에는 기묘한 바위 봉우리들이 많아 다른 산에 비해 그 풍광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더했다.
사찰은 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았다. 절을 앉히던 그 옛날 가지산은 ‘석면산’이었기에 산의 남쪽이란 뜻을 담아 석남사란 이름을 붙였단다. 6.25동란에 완전 소실되었던 절을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다시 지었고 이때부터 비구니 수도처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100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과 마주보는 침계루 밑을 통과해 절 마당에 들어서자 삼층석가사리탑이 나타났고 대웅전 뒤엔 엄나무로 만든 길이가 6.3m나 되는 거대한 구유가 버티고 있었다.
공양 지을 때 씻은 쌀을 담거나 밥을 퍼서 담았던 그릇이라니 당시의 비구니들은 스케일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불자들이 아닌 이들이 절을 찾는 목적은 산과 계곡 경치가 좋아 마음이 평안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수원 오르는 계단 옆에선 봄의 전령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려 탐방객 눈길을 끌었다. 사찰을 빠져나오기 전 우리 일행은 계곡을 건너 절로 오르는 아치형 다리 반야교 위에서 잠시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사가 편안한 표정을 주문해 보지만 굳은 표정은 쉽게 바뀌질 않는다. 이제 있는 것도 버려야하는데 뭣 하러 사진을 찍느냐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셋을 초대한 친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도로를 구불구불 꺾어 올라 산중턱에 위치한 리조트였다. 교통이 불편한 산길 옆에다 리조트를 앉힐 생각을 하다니 하고 모두 놀랐지만 우리가 앉을 자리만 남기고 만석이었다. 리조트는 분위기로 밥을 먹는다는 말처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전망이 시원스레 다가왔다. 외래어 옥호가 마음에 걸린 건 내가 너무 폐쇄적인 때문인지도 몰랐다. 좁은 공간에도 갤러리처럼 시를 몇 편 내걸어 방문자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선물하고 있었다. 리조트를 나서자 오늘 초대한 친구는 다시 차를 몰면서 엑셀을 밟았다.
석남사 입구에서 가지산을 오르는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고 그곳엔 외벽이 그림처럼 하얗게 아름다운 ‘가을찻집’이 있었다. 일층은 손님이 가득 찼고 이층은 텅 비어있었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씩 마시면 될 것을 아이스크림과 오미자차까지 따라 나왔다. 찻집은 통유리로 만들어져 실내에 앉아서도 산중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실내 잡음으로 작용할 음악 같은 건 아예 틀지 않고 있었다. 찻집에서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마산가든’은 지난 시절 옻닭 요리로 멀리서도 손님들이 즐겨 찾던 업소였지만 굳게 문을 닫고 있었다. 차량들이 구불구불 산꼭대기 석남터널로 기어오르던 때가 전성기였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산 아래로 넓고도 시원하게 직선으로 뚫린 능동터널로 인해 산을 오르내리는 차량은 드물었다. 고급 세단으로 자연비경을 자랑하는 배내골 경승지 도로를 들어섰다. 동서로 뚫린 고속도로가 공중에 보였지만 서쪽으론 진입할 인터체인지가 없어 불편할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코로나로 움츠리고 있는 사이 산마루 풍력발전기가 대단지로 변한 고개를 넘었다. 신재생 에너지니 친환경이니 들먹이지만 풍력발전기들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신문 방송에 떠드는 소음공해 말고도 이곳엔 좁은 도로 한쪽에 풍력발전 전선로까지 만들어 공간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차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뒷좌석 친구가 핸들을 잡은 차주에게 물었다. “이제 은퇴했으면 차도 크기를 줄여야 하는 게 맞지 않느냐?” 우리가 오늘 탄 억대에 가까운 세단은 그만큼 운전석에서 사방이 넓게 보였고 인공지능 요소도 가미되었을 터이다. 우리나라에 차가 많지 않았던 1960년대에 이미 미군들은 외출에서 귀대할 때 소형차인 당시의 '김치캡'보다 중형차인 '아리랑택시'를 선호했었다. 주차공간만 허용한다면 운전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몸집이 큰 차량을 타는 것을 타박할 일만은 아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