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번째 생일 다음 날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 선물 받다
뉴질랜드 남섬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 안에 있는 밀퍼드 트랙(Milford Track)은 전 세계 등산가들이 가장 걷고 싶어 하는 길이다.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세계 3대 등산길(trail)’ 중 한 곳이고, ‘죽기 전에 가봐야 할 네 곳’ 중 한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밀퍼드 트랙은 1908년 영국 시사잡지 ‘런던 스펙테이터’(London Spectator)에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The Finest Walk in the World)로 소개됐다. 여행기를 쓴 뉴질랜드 작가 밸런치 보한(Blanche Edith Baughan, 1870~1958)은 원래 이 글의 제목을 ‘A Notable Walk’(뛰어난 길, 혹은 훌륭한 길)로 해서 잡지사에 보냈다. 편집자는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The Finest Walk in the World’로 바꿨다. 그 뒤 이 문장은 ‘밀퍼드 트랙’을 압축하는 선전 문구로 자리매김했다. 편집자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 예이다.
러드어드 키플링, “전 세계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 극찬
영국에서 태어난 밸런치 보한은 정신질환 이력이 있는 어머니의 뒤를 잇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1900년 서른 살 나이에 뉴질랜드행 배에 올라탔다. 어머니는 남편을 죽였지만 정신질환을 이유로 풀려났고 이를 두려워한 밸런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작품 활동만 했다. 그가 쓴 밀퍼드 트랙 여행기는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을, 그를 넘어 뉴질랜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기념비적인 글이 되었다.
수많은 어린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정글북』(Jungle Book)을 쓴 러드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은 1891년 밀퍼드 트랙을 마치고 “전 세계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The Eighth Wonder of the World)라는 탄성을 질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세계 10대 장거리 등산길’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밀퍼드 트랙의 역사는 깊다. 188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첫 등산객을 맞았다. 트랙 길이 대중에게 개방될 때까지 초기 개척자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밀퍼드 트랙으로 가는 길은 절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밀퍼드 트랙 산장(hut) 숙박권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다. 한 시즌에 여섯 달(보통 10월 말~4월 말)만 일반 등산객에게 문을 연다. 그 인원은 하루 딱 40명.(가이드를 따라 하는 트레킹 50명은 제외). 여섯 달을 다 합쳐 7,200명, 가이드 트레킹까지 더해도 16,000명에 그친다.
DOC가 해마다 5~6월경 일반 등산객을 대상으로 온라인 신청을 받는데,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일이 분 안에 매진된다.(2022/23 시즌 산장 예약도 3분 만에 끝났다.) 최근 몇 년은 코로나19 사태 덕분에 키위들의 신청이 조금 수월해지기는 했지만 그 전에는 독수리 타법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천국 여행 승차권’이었다.
53.5km 산길과 물길을 3박 4일간 걷는 코스
밀퍼드 트랙은 53.5km의 산길과 물길을 3박 4일간 걷는 코스다. 잠은 무조건 DOC가 관리하는 산장에서 자야 한다. 다른 위대한 올레길과는 달리 텐트를 치고 머무는 자리가 아예 없다. 그만큼 정부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 보호하고 있는 보물이라는 말이다.
테 아나우 다운스(Te Anau Downs)에서 출발해 샌드플라이 포인트(Sandfly Point)에서 여정이 끝난다.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뉴질랜드 최고의 오지를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Downs’는 ‘초원 구릉’, ‘Point’는 ‘해안의 돌출부 혹은 갑(岬)’.
일반 등산객 40명은 3박 4일 일정을 무조건 같이 해야 한다. 꼭 같은 시간에 출발, 도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군대의 한 소대(platoon, 보통 20~55명), 일종의 운명 공동체처럼 움직인다는 뜻이다.
나는 2022년 2월 6일(일)부터 9일(수)까지 3박 4일간 밀퍼드 트랙의 입산을 ‘명’(命)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특혜였다. 앞서 말했듯이 산장 숙박 허가권을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홀로 여행자, 틈틈이 DOC 웹사이트를 뒤지다가 행운을 얻었다. 어느 누군가 산행을 취소한 것이다. 나는 그 틈을 단숨에 차지했다. 홀로 여행자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2월 6일 이른 아침 오클랜드에서 퀸스타운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본 하늘 아래, 특히 남섬 아서스 패스(Arthurs Pass)를 지날 무렵의 구름 속에 갇힌 산들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멋진 하늘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대원 40명 중 나는 다섯 번째로 나이가 많아
퀸스타운공항에서 테 아나우행 버스를 탔다. 두 시간을 달려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 안내소(Fiordland National Park Visitor Centre)에 도착했다. 안내소 직원은 내게 A4 종이 한 장으로 된 소대원의 명단을 내밀었다. 내가 책임지고 인솔하라는 뜻 같았다.(이 종이를 첫날 머물 클린턴 산장의 산지기에게 전해 주라는 말) 나는 마치 소대장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명단을 훑어보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일흔세 살의 남자(브라이언 존스 Brian Johns), 가장 어린아이는 한 살밖에 안 된 시어도어 몽고메리(Theodore Montgomery)였다. 시어도어는 나흘 내내 아빠가 등에 짊어진 유모차(?)를 타고 걸었다.
마흔 명의 소대원 중 남자 대원은 23명, 여자 대원은 17명이었다. 20대가 가장 많았고(11명), 그다음은 30대(10명), 40대(9명), 50대(3명), 10대(3명), 60대(2명), 70대(1명) 순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밀퍼드 트랙을 시작한 2월 6일은 내가 한국 나이로 예순하고도 하루를 더 산 날이었다.(생일은 2월 5일, 1963년에 태어났다). 하루 전 나만의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을 걷는,’ 또 하나의 선물을 내게 선사했다.
“해피 버스데이, 성기.”
테 아나우호수 한쪽에 십자가 하나 있어
안내소에서 밀퍼드 트랙이 시작되는 테 아나우 다운스행 전용 버스를 기다렸다. 30분을 달려 27km 앞에 있는 테 아나우 다운스에 내렸다. 2시에 출발하는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배는 가이드 트램퍼 50명과 나 같은 개인 등산객 40명(Independent tramper)을 밀퍼드 트랙 출발지로 옮겨줬다.
한 시간 동안 테 아나우호수를 가로질러 글레이드부두(Glade Wharf)에 다다랐다. 그 사이 배를 모는 젊은 선장(20대 중반 정도로 보였음)은 테 아나우호수와 밀포드 트레킹의 역사를 우스갯소리를 섞어가며 소개했다.(사람들이 다 함께 웃은 걸로 봐서 분명히 웃기는 얘기가 몇 번 있었다.)
선장은 뱃길을 가는 도중 “저 호수 끝 쪽에 십자가가 하나 있다”고 말했다. 밀퍼드 트랙을 개척한 초기 탐험가 중 한 사람인 퀸틴 매키넌(Quintin MacKinnon, 1851~1892)이 테 아나우호수에서 빠져 실종됐는데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 뒤 퀸틴의 흔적은 더 찾을 수 없었다.
밀퍼드 트랙을 다녀온 유명 인사 중 내가 아는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는 2014년 1월 개인 여행으로 뉴질랜드를 방문, 밀퍼드 트레킹을 즐겼다. 그 뒤 저신다 아던 총리를 만났을 때 문 대통령은 뉴질랜드의 자연환경을 극찬했다.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의 멋진 산수에 반한 게 분명했다.
문 대통령은 2004년에 청와대 생활(민정수석)을 정리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다. 그보다 훨씬 전인 1990년 나도 그곳에서 며칠 머물렀다. 문 대통령은 전문 산악인에 못지않은 참 산사람, 산길을 뚜벅뚜벅 걷는 그의 결연한 표정이 곧고 우직한 소나무처럼 느껴졌다.
부자 등산객 숙소에는 샤워 시설과 소고기도
나는 가슴 속에 신념을 품고 꿋꿋하게 외길(한길)을 가는 사람을 존경한다. 문 대통령이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역사는 훗날 그를 ‘위대한 대통령’(혹은 사람)으로 기록할 것이라고 믿는다.(2018년 문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초대를 받아 그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받았다고 해서 말은 결코 아니다.)
글레이드부두 앞에서 밀퍼드 트랙 출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념사진도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는 명성답게 멋지게 찍혔다.(이 글에 나와 있는 사진을 참고하시길) 작은 승용차 한 대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넓고 평탄한 길을 20분 정도 걷자 글레이드 하우스(Glade House)가 나타났다. 내가 머무를 숙소가 아닌, 부자 등산객들이 우아하게 하룻밤을 주무시는 숙소다.
이곳에는 피아노가 있고(혹은 ‘있었고’.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 정확하지 않다), 샤워 시설이 있고, 스테이크 소고기가 있고, 따듯한 전기담요가 깔린 침대가 있다. 그렇게 4박 5일 동안 칙사처럼 최고의 대우를 받으려면 $2,500~$3,000를 내야 한다.
호기심이 생겨 밖에서 숙소 입구를 째려봤다. 숙소 게시판에는 ‘바우돌산악회’, ‘낯선트레킹’ 등 적지 않은 한국 등산객 팀들이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생각에 속으로만 씩씩거리다가 길을 이어 나갔다.
밀퍼드 트랙 첫날 일정은 글레이드부두에서 클린턴 산장(Clinton Hut)까지 5km를 1~1.5시간에 걸으면 된다. DOC가 등산객들의 첫날 일정을 고려해 트랙 앞부분에 산장을 만든 것이다. 클린턴강(Clinton River)을 따라 쭉 올라가는 길이다. 밀퍼드 트랙의 맛보기 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보고합니다. 총원 40명, 사고 0명.” 소대장 임무 끝
한 시간을 조금 넘게 걸어 산장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고 소대장 자격으로 점호를 했다. 총원 40명, 사고 0명. 소대장의 임무는 여기서 끝났다.
“충성!”
대원들의 명단을 중대장(Warden, 산지기)에게 넘겼다. 아마 오늘 밤은 무척 다디단 밤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잠을 청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