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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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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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16:53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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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무위사에는 느티나무, 팽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정면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극락보전이 단아하게 서 있다. 김제 귀신사의 대적광전이나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부석사의 조사당과 안동 봉정사의 극락보전 같은 조선 초기의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집인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바라보면 볼수록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조선 선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는 한때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극락보전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단아하게 서 있다.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로 지정되었다. 1983년 해체, 복원 공사 중 중앙 칸에서 발견된 명문(名文)에 따르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 초기인 세종 12년(1430)에 효령대군이 지은 것이다. 또한 1950년 극락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기문에 따르면 성종 7년(1476)에 후불벽화(後佛壁畵)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아미타삼존좌상이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많은 벽화들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 벽화 보존각을 지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
고려 불화의 맥을 잇는 전통 후불벽화는 신필에 가깝다. 그 벽화에 얽힌 일화는 이렇다. 법당이 완성된 뒤 이 절을 찾아온 한 노(老) 거사가 벽화를 그릴 것이니 49일 동안 법당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하였다. 마침내 49일째 되던 날 무위사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자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벽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다. 갑자기 인기척을 느낀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금도 후불벽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극락전 옆에는 선각대사 형미의 부도비와 삼층석탑이 서 있고 미륵전에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 형상을 한 미륵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옆에는 산신각이 있다.
무위사 미륵불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진 고찰이다. 미륵전에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 형상을 한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월출산 아랫자락 길을 넘어가다 보면 사시사철 푸르게 펼쳐진 태평양 설록차 밭을 만날 수 있고 고개를 올려다보면 불꽃처럼 뾰족뾰족한 바위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땅으로 유배를 가다 월출산 자락을 보며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그 경포대를 바라보는 곳에 월남사지가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정읍 영원의 은선리 삼층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연상시키는데,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절은 고려 중기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수선결사(修禪結社) 운동을 펴다가 입적한 보조국사의 대를 이어 수선결사를 이끌었던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고, 이 비는 이규보가 썼다고 전하지만 창건 이후 중창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가람고』 등에 이 절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 석탑을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벽돌 모양으로 만든 모전석탑이라고 부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백제 탑을 모방한 고려 탑이라고 볼 수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에서 100미터쯤 가면 동백나무 숲 속에 보물로 지정된 부도비가 있다. 진각국사 혜심의 비인데 비문에 그의 제자였던 최이, 최창 등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는 무상한 것이라서 깨진 비석을 등에 진 채 용머리 형상의 거북만 남아 그 옛날을 증언할 뿐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월출산을 배경으로 강진군 성전면 월남마을 중앙에 있는 절터. 폐찰 시기는 알 수 없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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