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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란 '미개'와 대응하는 진보된 인간 생활의 총체를 말한다. 라틴어의 'civis'(시민)와 'civitas'(도시)에서 유래한 바와 같이 특별히 도시 문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말에 ‘문화’를 최초로 정의한 타일러는, '문명'과 '문화'를 동일시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T. 홉스 등은 '문명'과 '사회'를 동일시하고 문명 이전을 무질서 상태(자연 상태)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여러 문명은 몇몇 지역에서 시기를 달리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BC 3500~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BC 2500년경, 중국에서는 BC 1500년경에 각각 문명이 형성되었다. 신대륙에서는 멕시코 계곡과 페루에서 기원 전후에 탄생했다. 고대 문명이 발생한 이들 지역을 볼 때 문명의 성립 요인으로는 농경의 발전에 따른 인구 증가, 부의 축적, 직업의 분화, 도시의 형성, 치수, 토기·직물의 제작 등을 꼽을 수 있다.
문명의 첫 번째 특징은 마을이 도시로 발달한 것이다. 큰 강 유역에서 관개농업 이 발달하자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많은 인구가 살게 되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눴지만, 이제는 남에게 노동을 강제하는 지배 계급과 남을 위해 노동하는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신전이 들어서고 주위에는 성벽이 빙 둘러 세워졌다. 법률과 행정 체계가 만들어지고, 이를 집행할 관료 조직이 생겨났다. 다른 도시나 마을을 침략해 약탈하고 지배하는 정복 전쟁이 일어나면서 도시를 방어할 군대도 조직됐다. 수레와 배 등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법률 조항이나 교역 관계, 신전의 의식 등을 기록할 문자도 발명됐다.
지역에 따라서는 구리와 주석(또는 아연)을 합성한 청동기를 쓰기 시작했다. 최초의 금속 도구인 청동기는 검 ・ 거울 ・ 방울 등으로 만들어져 지배자의 위엄을 높이기도 했고, 창 ・ 도끼 등 무기로 만들어져 정복전쟁을 촉진하기도 했다. 인간이 자연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 문명의 ‘빛’이라면, 계급 갈등과 전쟁 등 인간 스스로 위험을 초래한 것은 문명의 ‘그림자’였다.
★세계의 4대 문명
서기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처음 문명이 발생했고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중국의 황하 유역이 뒤를 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정착한 수메르인은 도시 가운데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세우고, 그림 문자를 개량한 쐐기 문자로 창세 신화, 홍수 전설 등을 기록했다. 60진법과 태음력이 사용되고 점성술, 수학 등이 발달했다.
이집트 문명
나일강이 범람할 때마다 비옥한 흙을 날라다 준 덕분에 농업과 관개 시설이 발달했다. 이집트의 왕(파라오)은 태양신의 아들이며 살아 있는 최고 신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와 영혼 불멸을 믿었다. 이집트에는 비석이나 무덤에 새긴 신성 문자와 파피루스에 쓴 민중 문자가 있었다. 태양력을 사용했다.
인더스 문명
대표적 유적인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도시 계획에 의해 벽돌로 건설됐다. 반듯한 도로와 배수 시설, 벽돌 주택, 대형 목욕탕, 창고, 시장 등을 갖췄다. 밀과 보리 등 곡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기르고, 메소포타미아와 무역을 했다.
황하 문명
서기전 2500년경 청동기를 사용했다. 황하를 다스린 영웅 우(禹)가 서기전 2070년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나라를 건국했다.
★이집트 문명
BC 2925년경에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 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지배자의 위치를 계속 이어갔다.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 고대사에서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나일 강 범람의 규칙성을 알아내기 위해 이집트에서는 태양력,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투탕카멘의 무덤,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 등은 이집트 문명의 뛰어난 건축술과 기하학을 보여준다. 이집트 사회는 신, 왕, 죽은 사람, 인간으로 이루어진 하향식 계급 구조 사회였다. 왕은 어떤 인간보다 잠재 능력이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고 파라오라고 불렸다.
고대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동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에 비유될 수 있으며,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 강의 홍수에 의존해 농업이 이루어진다. 또한 주로 나일 강 유역과 나일 삼각주 지역에서 경제적 활동이 행해진다. 나일 강 유역은 띠처럼 길게 이어진 석회암 언덕 사이를 흐르는 나일 강의 비옥한 범람원이고, 나일 삼각주는 오늘날의 카이로 북쪽에 여러 개의 나일 강 지류를 중심으로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땅이다. 아스완에 있는 제1폭포는 이 나라의 거주지역 안에 있는 국경으로는 유일하게 윤곽이 뚜렷한 경계선이었다. 이 폭포 남쪽에는 사람이 살기에 훨씬 부적합한 누비아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나일 강 서쪽에는 몇몇 광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자원이 부족한 사하라 사막이 있었다. 북동쪽에 있는 수에즈 지협은 시나이 반도 및 서아시아와 접촉할 수 있는 주요 통로로서,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교류 지역이었다.
★ 이집트·메소포타미아·아스텍·마야 문명에서 종교는 정치와 구별되지 않았다.
의식(儀式)은 자연과 사회의 우주적 질서를 지속시키는 일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부족단위의 의식은 감명 깊은 교육적 유산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갱신을 위해 연례적으로 거행되었던 신년 축제에서는 창조 신화가 낭송되었고, 혼돈에 맞서 우주적 질서와 다시 한번 합일됨을 강조하면서 왕이 재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이른바 계승 신비극은 왕권의 양위를 나타내기 위해 거행되었다. 이 문화들은 농업 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된 산물들이다. 이 유형에서 왕은 농경·우주·국가의 정치적 생존을 단일한 기능으로 결합함으로써 문명의 본질적 측면을 구현한 화신으로 등장한다. 효과적인 교육적 전달은 이 문명을 존속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했다. 교육은 대개 사제들에 의해 실시되었고, 학교는 성전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바빌로니아 성전 학교에서 청소년들은 복잡한 설형문자의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상급 학생들은 신화, 점성술, 제의와 마술, 그밖의 종교 지식 등 사제 학문의 고급 학과목을 이수했다. 세속 관리직을 수행하도록 선발된 학생들도 흔히 성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집트에서 사제들의 아들은 책의 집이나 신을 모신 '생명의 집'(성전)의 학교에 입학했다. 귀족과 왕가의 아들도 이 학교에 입학하여 그들의 특수한 직무에 따르는 종교적 의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배웠다. 초급 수준의 소년들은 하급관리가 되는 데 필요한 읽기와 쓰기 과목을 교육받았다. 이보다 더 낮은 수준의 '상업학교들'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도덕적 교훈과 국가의 종교적 운명에 대해 철저히 가르쳤다.
문서의 필사와 암기는 교육의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제의와 신앙은 표준화되어 구전 이외의 방법을 통해 전달되었고, 문화적 지혜는 더 확실하게 보존되었다. 신성국가는 기술과 종교를 결합시킨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세속화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계급과 카스트의 구별은 각 개인이 받는 교육의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공식 교육은 전문가들을 훈련시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데 점점 더 치중했다.
사제 계급이 점차 지식인화되면서 사변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이 그들의 공동관심사가 되었고, 평민들은 낡은 형태의 종교를 답습했다. 사제왕이 거행하는 거대한 우주 제의는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는 제의라기보다는 바라보기만 하는 장관에 지나지 않았다.
★ 자연환경
이집트는 북쪽으로 지중해가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남쪽의 누비아 사막, 서쪽의 리비아 사막과 사하라 그리고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 등 척박한 땅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집트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나라 안에서 동질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거의 불모의 땅이나 다름없는 이 지역에서 이집트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일 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조금밖에 오지 않는 기후였지만, 길이가 6,500km 정도 되는 나일 강이 매년 범람함으로써 그 물로 인해 주변 땅은 비옥했으며 그곳은 농업 자원이 풍부했다. 한편 주변의 붉은 사막 지대와 구별해 검은 땅이라는 말로 충적 토양인 그곳의 비옥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나일 강물은 식수나 관개용수 등으로 사용되었고 강줄기는 상업활동과 교통의 주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땅도 사람도 나일 강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을 신성시하기도 했다. 이집트에서는 보리나 밀 같은 곡식, 양파나 파나 콩이나 편두 같은 야채류, 대추야자와 무화과와 포도 같은 과일들이 생산되었다. 기름은 주로 아주까리나 참깨에서 얻었고 아마는 옷의 재료인 린넨을 공급했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돌이 중요한 자원이었다. 화강암이나 석회암, 사암 또는 순도 높은 돌들이 풍부했다. 금도 많은 편이었다. 가축들로는 소, 양, 염소, 돼지, 당나귀, 말 등이 있었다. 팔레스티나로 난 대륙 횡단 도로를 통해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와의 교류나 왕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1세기경 이집트는 나일 강을 따라 남쪽 강 유역의 상부 이집트와 북쪽 삼각주 지역인 하부 이집트 ‘두 개의 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역사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3100년경부터 300년 경에 걸쳐 30여 개 왕조가 통치한 것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구분이나 연도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국력이 강했던 주요 세 시기를 고 왕국 시대(기원전 2700-2200년경), 중 왕국 시대(기원전 2000-1780년경), 신 왕국 시대(기원전 1550-1100년경)라 부르고 그 사이사이를 중간 시대로 본다.
◎왕조 이전과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3100-2700년경) : 1-2왕조 때
왕조 이전에는 마을 단위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었고 문화도 지역 중심이었다.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져 있던 국가는 1-2왕조 때 멤피스를 행정 중심지로 하여 통일된 정부하에 통합되어 있었다. 궁정 문화와 왕궁 관료 제도가 발달하였고 지역 구분은 쉽게 바꿀 수 없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외부와의 접촉으로는 특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 고 왕국 시대(기원전 2700-2200년경) : 3-6왕조 때
혁신과 번영이 이루어진 이 시기의 특징은 상당한 수준의 문화와 정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생긴 통치 양식은 계속 다듬어지고 변화되면서 2000여 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집트의 임금 파라오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왕실의 중심은 수도 멤피스 지역이었다.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만들어졌으며 건축뿐 아니라 회화, 조각 등 이집트 예술의 규범이 세워졌다. 이때 응용과학의 기초도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 바빌론 등과 광범위하게 상업적인 교류를 가졌으며, 구리나 터키석 같은 원자재를 찾기 위해 시나이 반도에 원정대가 파견되기도 했다. 정부가 확대됨에 따라 여러 지역 출신 귀족들의 세력이 차츰 커지게 되었고 이것이 중앙으로 모여야 할 권력의 분산을 초래하였으며 결국 고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 제1중간기(기원전 2200-2000년경) : 7-10왕조 때
혼란과 불안정이 가중되고 가난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고 왕국이 무너진 후 중앙 정부가 해체되었으며 오랫동안 도시 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지방들의 독자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마지막 임금은 이집트를 다시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 중 왕국 시대(기원전 2000-1780년경) : 11-13왕조 때
평화와 질서가 유지되고, 풍요로움이 다시 찾아든 시기였다. 비록 왕권은 고 왕국에 비해 약화되었지만 새 임금들은 정부를 중앙집권화하고 새 관개 계획을 세워 농업 생산을 늘렸으며 남부와 서부에 요새를 만들어 국가 안전을 강화했다. 임금들은 여전히 멤피스 지역에서 통치하고 있었지만 테베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이집트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예술이 꽃피고 건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페니키아, 크레타, 레바논, 시리아 등과 광범위하게 무역을 했으며 시나이에서 구리 광산을 조직적으로 운영했고 팔레스티나를 침범하기도 했다.
◎ 제2중간기(기원전 1780-1550년경) : 14-17왕조 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였다. 중앙집권화에서 벗어나려는 세력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고 분리주의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힉소스나 누비아 같은 외부인들이 이집트로 많이 들어왔는데, 우세한 군사적인 기술과 조직을 가진 힉소스족이 이집트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 시기에 시리아-팔레스티나와의 사이에 문화 교류가 많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성공한 지위에 오른 것도 이때인 것으로 추측된다. 테베의 통치자들이 결국 힉소스족을 물리쳤다.
◎ 신 왕국 시대(기원전 1550-1100년경) : 18-20왕조 때
테베에서의 성공으로 새 왕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침입자들은 쫓겨나고 이집트의 상부와 하부는 다시 통합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집트 제국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했다. 하트셉수트 여왕, 투트모시스 3세, 아멘호테프 3세, 람세스 2세 등이 신 왕국의 뛰어난 통치자들이었다. 행정은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고 건설도 활발했다. 외국과의 교역도 확대되었고 시리아-팔레스티나와 누비아에도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세력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미친 것으로 보인다. 눈에 띄기 시작한 상황의 변화는 왕실과 점점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사제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했고 시리아-팔레스티나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셈족 신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아시아인들이 계속 유입되었는데 특히 하부 이집트로 많이 들어왔다.
수가 많이 늘어난 히브리인들이 나라의 안전을 위협하는 외국인들로 간주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등 노예생활을 하다가5)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이 람세스 2세가 통치할 때였던 것 같다. 신 왕국 시대가 끝나갈 무렵 수도를 테베에서 삼각주 지역의 임금들의 도시로 옮겼다. 그리고 이 지역과 테베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에 임금들의 위대함과 위세를 보여 줄 수 있는 건축물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이 시기에는 역사적, 문학적, 종교적인 책들도 많이 저술되었다. 그러나 신 왕국은 정부의 부패, 경제 침체, 더 큰 이익을 추구하는 신전 사제들의 득세 등으로 인해 몰락하고 말았다.
◎ 후기 왕국 시대(기원전 1100-331년경) : 21-31왕조 때
침체와 무질서의 신 왕국 말기 이후 이집트는 내부적으로 지역주의와 분파주의 때문에 약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또 리비아(기원전 945-712년경)와 에티오피아(기원전 712-670년경)와 아시리아(기원전 670-663년경)의 통치 그리고 이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외부 세력의 영향으로 인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집트의 세력 약화 덕분에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강국이 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는 이집트의 침공을 받기도 했다.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남 유다가 멸망할 즈음(기원전 587/6년경) 이집트에서는 에티오피아 왕조와 사이트 왕조가 수백 년 동안 독립과 통일의 마지막 시기를 이끌고 있었다.
임금들은 상업 교류를 확대하고 꽤 큰 외국 식민지들을 흡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파라오들의 세력은 아시아 쪽에서 부상한 아시리아의 침공을 물리치고 바빌론의 공격6) 을 이길 만큼 강하지 못했다. 이집트는 바빌론 이후 페르시아(기원전 525년경)와 그리스(기원전 331년경)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기원전 331년경 이후 이집트는,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임금이 한 장군에게 이집트의 통치를 맡기면서 시작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이 왕조는 한편으로 자기들이 파라오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 했으며 이집트의 행정을 그리스화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티나를 다스리는 문제를 놓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통치자들과 다투었다. 당시 이집트에는 유다인들의 정착지(디아스포라)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대도시로 발전하였는데, 이곳에는 유다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고 여기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기원전 250-150년경)7) 기원전 30년경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 종교, 건축 등 문화와 사회
이집트의 종교는 섬기는 신도 많고 종교적 개념도 많은 다신교였다. 어떤 신들은 나일 강이나 태양, 땅, 공기 같은 자연들을 의인화한 것이었고 또 다른 신들은 지혜나 정의, 질서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로 표현되기도 했다. 자연의 신들은 황소, 악어, 매, 양, 자칼 같은 동물이나 반은 사람이고 반은 동물인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 섬기는 신들도 있었고 지역에서 받드는 신들도 있었다. 태양신 레(또는 라), 하늘의 여신 너트, 땅의 신 겝, 지하 세계의 신 오시리스와 그의 아내 이시스, 제국의 신이 된 아몬-레, 멤피스의 신 프타, 엘레판틴의 신 크눔 등이 잘 알려진 신들이었다.
파라오는 태양신의 육적인 아들로서 지상에 내려온 신적인 존재로 신격화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이 신들이 나일 강을 범람하게 하여 농토를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풍성하게 수확하게 해 주고 출생과 죽음을 결정하는 등 세상과 삶의 모든 일에 긴밀하게 관여한다고 믿었다. 한편 신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씻고 옷을 입고 제물을 먹고 산책하고 잠자리에 드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나라 전체에 신들을 예배하는 신전들이 있었고, 사제들은 신들을 섬기는 예배 의식을 집행하고 신전의 정기적인 축제를 주관하며 신전을 관리했다. 이집트인들은 영원불멸과 죽은 후의 삶에 대한 믿음이 컸다. 파라오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으로 믿고 그를 위해 만든 무덤 피라미드는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보여 준다.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건축물에는 거대한 피라미드들 외에도 스핑크스, 신전 등이 있다. 피라미드들 중에는 높이가 150m, 밑면적이 52,600m2, 밑변의 길이가 240m 정도 되고, 2,500Kg 무게의 석회암을 230만여 개를 써서 건설한 것도 있었다. 이집트의 풍부한 돌자원은 이러한 건설 작업에 쓰였다. 이집트인들은 건축뿐 아니라 응용 수학과 천문학에도 뛰어났으며 상형문자를 발명하기도 했다.
이집트 사회에서 파라오는 모든 땅의 소유주요 모든 법의 근원으로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왕족과 대귀족들이 최고위 계층이었고 그 아래 일반 귀족과 관리들이 있었다. 하위 계층으로는 장인들과 농부들이 있었고 자유 농노와 노예들은 최하위층이었다.
★ 성경에서의 이집트
성경에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다양한 관계를 전해 준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피신처이자 유배지였고 두 나라 사이에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집트와 관련된 사건으로는 무엇보다도 이집트 탈출을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압제 밑에서 430여 년간 고통을 받다가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모세에 의해 구출되었다.(신 왕국 시대로 추정) 이집트는 또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간 곳이었고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실력자가 된 곳이기도 하다. 후에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했을 때 유다인들이 피신한 곳이었고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 헤로데 임금을 피해 잠시 가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다윗과 더불어 시작된 통일 이스라엘 왕국과 솔로몬 왕국의 궁정 조직 체계와 행정 조직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 이집트는 솔로몬의 적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솔로몬이 죽은 후 남북 왕조로 갈라진 상태에서 남 유다를 침공하기도 하는 등 두 나라는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우상숭배와 교만한 권력을 보여 주는 예로 많이 인용되고 있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무리들의 대표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이집트 탈출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을 말할 때 악역을 한 나라로 명시되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으셨다.이집트는 그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고 있지만, 회개를 통해서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