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의 눈동자
창29:16~17을 보자.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언니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했는데 약시(弱視)였다는 뜻일까? 히브리어 원문은 “베에네 레아 라코트”(וְעֵינֵי לֵאָה רַכֹּות)로 직역하면 “레아는 낙심케 하는 눈동자를 가졌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낙심케 하는 눈동자를 본 적이 있나? 사람들은 레아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낙심했다고 한다. 어떤 눈동자를 가졌기에 사람들이 낙심했을까?
3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라고 되어있다. “사랑받지 못했다”의 히브리어는 “쉐누아”(שְׂנוּאָה)로 직역하면 “미워한다”는 뜻이다. 즉 남편 야곱이 레아의 눈을 볼 때마다 미워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미워하기까지 했을까?
야곱은 레아의 눈을 볼 때마다 꼴 보기가 싫었고 그로 인해 그녀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레아는 남편이 자신을 미워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을까? 단지 부모가 그렇게 낳았을 뿐이 아닌가.
라헬에 대해서는 “곱고 아리따우니”라고 기록했다. 히브리어로는 “예파트 토아르 뷔파트 마르에(יְפַת־תֹּאַר וִיפַת מַרְאֶה)”로 직역하면 “깨끗하고 환상적이다”라는 뜻이다.
여러분은 “깨끗하고 환상적인 여성”의 눈동자를 본 적이 있나? 아마도 야곱은 그런 “환상적인 모습”에 미쳐 외삼촌 밑에서 14년간 노동을 했는지도 모른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14년이 아니라 20년, 30년이라도 하겠다고?
예수님은 레아의 후손에서 태어나셨다. 사53:2을 보자.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모습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던 것”은 “레아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성화를 보면 꽃미남에 서양인의 얼굴이다. 이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자신들의 문화”로 읽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모습은 중동 사람의 외모에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추남에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키도 작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 처형은 사람을 말려 죽이는 형벌이다. 보통 사람들은 3일을 버텼고 매우 건강한 사람은 일주일을 버텼다고 한다. 막15:44을 보자.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왜 빌라도가 예수님이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겼을까? 예수님이 불과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수님은 풍채가 없는 분이셨다.